소장 칼럼2016.06.30 15:28

[미래정치센터 조성주 소장]  



지난 4·13 총선 이후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협치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총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협치를 강조했고 그제 여당의 원내대표도 국회에서 협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만약 청와대와 새누리당만이 총선 이후 협치를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면 이는 의회의 다수를 점하게 된 야당을 대상으로 국정운영에 발목잡기 하지 말라는 경고나 사전포석으로 해석하고 고깝게 볼 만도 하다.

 

그러나 협치라는 용어는 야당들에서도 중요한 정치용어로 등장하고 있다. 야당들도 앞다투어 우리 정치에는 협치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나서고 있다. 이쯤 되면 지난 몇 년간 한국정치의 가장 큰 화두처럼 보였던 새정치라는 말을 이제 협치라는 용어가 대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정치라는 단어가 그 안에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내는 구체성 확보에는 실패한 채 보수편향적인 정당체제로 귀결된 것처럼 협치라는 용어 역시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성과는 관련 없이 한때의 유행처럼 사용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은 최근 진영간 증오의 동원을 통한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백번 곱씹어봐도 맞는 지적이다. 한국정치는 최근에 여야 할 것 없이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을 통해 자기 진영의 강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을 반복해 왔다. 이는 한쪽 극단의 입장에만 서기 힘든 평범한 다수 시민들의 목소리를 삭제한 채 목적을 잃어버린 정치적 공방만 남기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증오만을 동원하는 정치는 정치계와 시민들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아름다운 말의 성찬 속에서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만을 연출하는 것이 본질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풍경이 날선 비난의 진흙탕보다 품격 있는 대화와 논쟁의 장인 것이 낫다고는 하지만 그 모두가 답답한 현실의 개선 방향과 관련 없는 미학적 연출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진흙탕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현실의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정치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정치가 협치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없는지 그리고 협치를 해야 한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협치라는 말에는 마치 현실에서의 수많은 갈등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연이 부차적인 것처럼 치부하고 기계적으로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갈등해결책인 것처럼 말하는 듯하다. 물론 타협은 정치의 속성이자 현실세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갈등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타협과 협치 이전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하고 다투는 갈등이 없다면, 대부분의 타협은 현실세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굴종의 요구를 미화시키는 액세서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대표해야 하는 민주주의 정치는 협치의 방법론에 집중하기 이전에 갈등을 조직하고 드러내는 정치의 목적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즈음 오히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출입구에 메모지를 붙이며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의 비극과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정치는 이를 더 큰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갈등으로 조직하기보다는 협치의 자세를 말하며 애써 이 갈등들을 안타까운 하나의 사건 정도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존의 위협에 놓여있는 최저임금의 인상을 요구하는 절박한 청년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중향평준화협치는 혹여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요구하는 복종의 부드러운 명령이지는 않은가?

 

만약 협치라는 용어가 이런 방식으로만 사용된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지하철 출입구와 스크린도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제도와 시스템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채 기존의 폭력을 반복할 뿐이다. ‘협치라는 용어가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강자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복종이거나 정치세력들 간의 야합이 아니라 절박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겪고 있는 갈등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할 때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정치는 평화로운 협치를 도모할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떻게 더 치열하게 대변하고 대표할 것인지를 두고 더 크게 갈등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한 단어는 강자의 미학으로서의 협치가 아니라 약자의 정치학으로서의 갈등이라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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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5.11.10 10:22

 

 

 

 

 

 

 

 

정미나(미래정치센터 전문위원)


20대 후반, 직장생활 5년차

 

얼마 전 미용실에 갔다. 자리에 앉아서 조성주의 ‘청춘일기’를 꺼내드니, 디자이너를 보조하는 어린 직원이 그 책 재미있냐고 물었다. 반가운 마음에 조성주를 아시냐고 물으니, 전혀 모른다는 답이 왔다. 제목에 눈길이 갔나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물어봤다. 이쪽 일 힘들지 않냐고. 그랬더니 덤덤하게 “힘들죠,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첫 끼를 먹을 때도 많았어요.”

 

요즘 우리 화두는 청년문제이다. 특히, 광장밖에 있는, 노동운동 밖에 있는 노동자들.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는 청년이 바로 이 친구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해 물어봤다. “이직이 잦을 텐데, 고용보험 가입이 되면 좋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내가 손님인지라 쉽게 답을 못하다가, 이내 “글쎄요.. 이쪽 업계는 오히려 일할 사람이 부족해요. 직장은 쉽게 구해요. 문제는 보통 11개월 단위로 계약을 해요. 퇴직금 안 주려고. 고용 보험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월급 안 밀리면 다행이죠”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색했다. 20대 후반에 이쪽 업계에서 일한지 5년이나 됐다는데, 아직도 늦은 저녁에 첫 끼를 먹고, 퇴직금은 꿈도 못 꾸고, 월급 꼬박 받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청년에게, 고용보험 얘기나 하고 있자니 민망해졌다. 일자리는 많다니 청년 의무고용할당제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고용보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내 다시 물었다. 직장을 옮기면서 가장 오래 쉰 기간이 얼마나 되냐고. 거의 쉰 적이 없고, 3주 정도가 가장 오래 쉰 기간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절대 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쉬고 나니 빚을 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을 수 없었고, 월세와 이자, 핸드폰 비를 내고 나니 도저히 생활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어떤 조건의 직장이든 당장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청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은 무엇일까. 실직 그 자체가 삶의 나락을 의미해서 단 하루도 쉴 수 없고 퇴직금은커녕 밥도 못 챙겨먹는데, 그렇게 해도 저축조차 할 수 없어서, 성실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 청년들에게 국가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여러 제도들, 퇴직금이든 4대 보험이든 최저임금이든, 이 친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떻게든 4대 보험에 가입하라고, 고용주를 고발하라고, 최저임금, 질 좋은 일자리를 위해 싸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투쟁은 먹고살기 위해 바쁘고 지친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순간적으로 성남시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청년배당금이 떠올랐다. 아마 이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고려됐을 것이다. 즉, 개인에게 제도 변화를 위한 무거운 짐을 지우기보다는, 일단 당장의 소득을 올려주는 것이다.


행복한 나라, ‘행복의 제도화’

 

하지만, 여전히 찜찜하다. 과연 이것이 지금 이 시대 청년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청년 문제는 비단 실업 그 자체만은 아니다. 더욱이 청년문제는 19세에서 24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논의되는 청년배당금은 다양한 위기를 고려한 정책은 아니다. 지자체 차원에서 당장 어려운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 주고자 한다면 이 역시 반대할 일은 아니나, 지속가능하고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높은 수준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혜 대상은 상당히 선별적이면서도 위기관리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수혜대상이 되려면, 일단 특정 나이(서울시, 성남시)이어야 하며, 실업상태 중에서도 더 다급한 처지임을 증명하여 선발돼야 한다(서울시의 경우). 그렇게 6개월이든 1년이든 배당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를 통해 청년의 ‘어떤’ 위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삶의 위기는 다양하다. 어떤 이에게는 실업이, 어떤 이에게는 주거가, 빚이, 건강이, 혹은 가족부양이 혹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위기를 야기한다. 한 개인이 인생 곳곳에서 처할 수 있는 위기는 다양한 성격을 띠며 그 위기의 순간이 절망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주요한 목표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을 다루는 정책은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돼야 한다. 즉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이어야 하며, 위기에 처한 국민 모두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는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종의 규칙과 규범으로서, 내가 인식하지 못한 채 내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다. 빨간불이 켜지면 멈추듯이, 8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가듯이, 병원에 가면 의료보험증을 내밀 듯이, 높은 수준의 제도화는 그 제도가 언제 바뀔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그 규칙에 맞춰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파란불이 정지신호가 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8세에 초등학교를 못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는다. 이미 제도화 수준이 높아서 인식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는 단순히 국가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없으면 티가 나지만,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그런 것이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제도화는 ‘삶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제도가 많으면 그 국민의 삶 자체가 불행하고, 좋은 제도가 많으면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다. 즉, 좋은 제도의 제도화 수준이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도 ‘제도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유럽 복지국가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 나라 자체가 아니라 그 국가들의 좋은 제도들이 그들 국민의 삶을 공기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삶의 질이 보장받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우리보다 높은 수준의 행복이 제도화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청년문제를 국가가 해결한다고 할 때는,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위기를 분류하고 그 위기의 특성에 맞게 관리 가능한 정책, 그리고 특정 위기에 처한 모두에게 적용될 수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특정 위기가 발생했을 때 공기처럼 내 삶에 적용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이것이 비로소 우리 모두의 제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받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보험은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 누구나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이지만, 건강이라는 위기를 특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선별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민 누구나를 대상으로 하되,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위기를 특정한 보편복지적 제도가 확대돼야 한다. 따라서 실업에 대한 지속가능한 제도적 대안은 현재로서는 ‘고용보험’일 것이고, 한국사회에서 청년 실업의 심각함을 고려해 볼 때, 고용보험은 시급히 건강보험 이상의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 돼야 한다. 고용보험이 실직자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자발적 실업을 인정하고, 수급기간을 늘려서 가입하고 싶은 제도로 만들고, 가입 대상자도 넓혀서 실업이 절망이 되지 않도록 고용보험을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이것이 질 좋은 일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통계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점차 주거와 부채 문제에도 확대되어야 한다. 청년을 위한 정책이라면 청년들이 처한 위기를 특정하고 그 위기에 처한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늦은 저녁에 첫 끼를 먹는 그 청년도 보다 좋은 일자리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 책임은 한 개인에게 있지 않다. 좋은 제도를 만들기 위한 투쟁은 개인이 아니라 정치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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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5.07.06 10:02

 

고광용 (진보정의연구소 연구위원)

 

 

 

1. 국가별 행복지수와 정부역량 수준의 높은 상관성

 

우리나라 국민들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유엔이 발표한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국민행복지수는 전 세계 158개 국가 중 10점 만점에 총 5.984점으로 47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세계 경제순위는 2015년도(GDP기준)에 11위를 차지했던 것을 보면, 경제적 풍요로움에 비해, 실제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턱없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로 OECD 국가 중 세계 1위의 자살률,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1.25명, 미국 중앙정보부 2014년 6월 ‘월드팩트북’)이 우리나라 국민행복의 현실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한편, 가장 행복한 나라는 스위스(7.587)였고, 아이슬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순으로 세계 5위권의 행복한 나라로 나타났다. 그 외에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도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꼽혔다.

 

놀랍게도 유엔의 국가별 행복지수와 유사한 순위를 보이는 지수가 있다. 그것은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정부역량(strength of state) 지표를 활용하여, 고려대 김태일 교수(2013)가 OECD 국가를 대상으로 분석한 정부역량의 세부지표(부패통제, 정부효과성, 정치적 안정성, 법치주의, 규제의질, 참여/책임성) 수준(2001년을 제외한 2000년~2010년간의 평균)이다. 정부역량이 가장 높은 국가는 핀란드였고,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가 5위권 안에 들었으며, 네덜란드와 노르웨이가 각각 7위와 8위를 기록했다. 유엔의 국민행복지수와 순위 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가장 상위권에 위치한 국가들은 매우 유사하게 나타났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로 상위권에 위치한 국가들이 정부의 크기(큰정부/작은정부)와 관계없이 유능한 국가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은 무능한 작은 정부에 해당되었다. 즉, 정부역량(정부의 질)과 국민행복(국민 삶의 질) 간에 비교적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행정학 분야의 연구들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질(제도, 공공서비스 만족도, 정치적 안정, 정부효과성, 법치 등)이 삶의 만족이나 행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정부의 질이 낮으면, 국민행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2. 행복과 욕구 : 욕구는 행복의 필요조건

 

행복은 대단히 주관적 속성을 가지기에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고 행복은 육체적․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쾌락에 있다’고 주장하듯, 대체로 행복은 욕구와 관련이 높다. 한편, 종교나 철학에서는 욕구를 줄여야 행복이 커진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욕구수준을 낮춤으로써 욕구충족을 더욱 빨리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욕구충족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 필요조건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미국의 심리학자 머슬로우(Maslow)는 5단계로 제시했다. 1단계 의식주 등 생리적 욕구, 2단계 추위·질병·위험 등 위협으로부터 안전 욕구, 3단계 애정과 소속 욕구, 4단계 자기존중 욕구,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이다. 머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계층적으로 배열한 것이지 행복을 계층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3. 정부의 국민욕구 불충족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행복의 필요조건인 국민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주고 있는가? 우선, 우리 국민의 10명 중 4명 이상이 ‘내집 마련’을 못하고 있어, 1단계 생리(주거)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 국토교통부 2014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자가주택 보유율은 58%였는데, 첫 조사를 시작한 2006년 61%에서, 2008년 60.9%, 2010년 60.3%, 2012년 58.4%로 지속적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같은 기간 중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자가주택 보유율은 각각 0.2%p, 2.9%p가 줄어 주거양극화도 심화되었다.


둘째, ‘세월호 침몰사건’과 ‘메르스 확산’은 2단계 욕구인 국민안전을 크게 위협했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3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무분별한 규제완화와 민간위탁, 책임성 부재, 초동대처 실패 및 뒤늦은 구조 등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메르스 확산 또한 정부의 안일한 초기 대응, 뒤늦은 병원공개, 컨트롤 타워 오작동 등으로 6월 30일 기준, 사망 33명, 확진자 182명으로 세계 2위의 메르스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사스가 발생하자 국내유입 차단, 빠른 초기대응, 선제적 콘트롤 타워 작동 등으로 1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동시에 WHO로부터 ‘사스예방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정부역량에 따라 국민안전이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최근 ‘삼포세대(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의 집값,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 지출 등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인데, 이러한 삼포세대는 3단계 애정과 소속 욕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심지어 청년세대를 실업자와 신용불량자가 넘쳐난다는 의미에서 ‘실신세대’라고 까지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년세대의 취업난과 비정규직 문제를 통해 청년들이 4단계 자기존중의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까지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청년문제에 대한 이해는 있으나 내놓은 청년고용정책은 취업지원 서비스, 일자리 창출지원, 직업능력개발 지원 등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하는 대안들이다.

 

 

4. 정부역량과 국민행복... 그리고 좋은 거버넌스

 

박근혜 정부는 현재 1단계 생리(주거) 욕구부터 5단계 자아실현 욕구까지 모두 적절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박근혜 정부가 국가비전으로 제시한 ‘국민행복시대’ 달성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정부가 유능하고 역량이 높아야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국민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마커스 아그나포스(Marcus Agnafors)는 ‘좋은 거버넌스(국가관리/협치) 혹은 정부의 질은 ①최소의 도덕성과 공공정신(public ethos), ②좋은 의사결정과 이유제시, ③선행의 원칙(갈등의 가이드라인 제시), ④효율성, ⑤법치와 공명정대, ⑥안정성 등 6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6가지 구성요소와 욕구 5단계의 충족여부는 향후, 정의당이 제시할 국민행복을 가져오는 좋은 정부(Good Government)이자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기준으로 삼을 만 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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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5.06.15 16:23





박철한(연구기획실장)


중동 급성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가 우리사회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5월 20일 첫 메르스 확진자 발생 이후 25여일 만인 6월 15일 11시 현재, 확진자 149명, 사망자 16명, 격리자 5,897명 등 메르스는 우리 사회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한 위기와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메르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른 것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다분히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발생과 전파 경로에 대한 비밀주의로 메르스 확산은 초동 대응에 실패하고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와 같이 ‘컨트롤타워 부재’, ‘정부의 소통 부재’는 국민들의 공포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전염병이 일단 발생하게 되면, 국민들은 위기감과 공포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대응이었다. 메르스 발병과 전파 경로, 전염 병원 등에 대해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결과가 국민의 건강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금은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부문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메르스가 경제성장율에 미치는 문제는 차지하고 메르스의 여파로 노인급식소와 아동센터가 폐쇄되면서 가난한 노인, 아동, 청소년들이 끼니를 걱정하고 있다. 자영업 매출은 급감하고 아르바이트, 일용직 등 청년의 일자리는 메르스의 직격탄을 맞아 청년들의 생계난이 가중되고 있다. 더욱 문제는 메르스의 확산을 막기 위한 병원 자체의 확진, 격리조치도 병원의 정규직에만 국한되어 병원청소, 운전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메르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 부처는 초기에 대국민 메르스 정보제공과 2중, 3중의 방역망 구축을 통해 충분히 메르스 확산을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응은 무력하였다. 덧붙여 박근혜 대통령은 초기 확진 환자 발생 후 보름이 지난 후에, 그것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메르스에 노출된 병원을 공개한 것은 늦어도 너무 늦은 대응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메르스는 박근혜 정부의 안일함, 무능, 무책임이 결과가 불러온 인재에 다름 아니다.


또한 메르스 전염과 공포를 확산시킨 주범은 방역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삼성서울병원의 ‘무소불위의 갑질’ 때문이었다. 메르스의 확진 환자를 처음 발견하고 방역 당국에 신고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문제는 그 때 뿐이었다는 것이다. 최초 메르스 환자 확진 이후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전염의 2차, 3차 진원지가 되었다.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차단를 위한 대응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삼성서울병원은 자체 방역을 이유로 방역 당국의 통제 밖에서 대규모 메르스 확진자를 발생시키는 가운데서도 병원의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병원 폐쇄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국민들의 비판이 커지고 메르스 확산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부분 폐쇄’를 결정한 바 있다. ‘정부 위의 삼성’, ‘슈퍼 갑질’이 메르스의 확산을 키운 또 다른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초기 메르스 발생 당시 보인 방역 당국의 무능한 대응이다. 메르스 발생 초기, 이를 차단할 수 있는 호기임에도 방역 당국은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했다. 보건당국은 메르스 확산 추세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메르스 전파 경로에 무지했으며, 메르스 확진자, 격리자에 대한 통계가 오락가락하는 등 국민들의 공포심과 위기감만 가중시켰다.


여전히 오늘도 방송과 언론에서는 ‘메르스 지역전파는 없을 것이다’, ‘지켜보자’, ‘내일이 고비다’,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들이 박근혜 대통령과 보건당국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공포로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과 보건당국의 이렇게 엇나간 발상과 안일한 대응이 국민의 메르스 공포를 부채질 하고 있다.


메르스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지금은 경제보다 국민의 생명을 우선시 해야 할 국면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메르스에 따른 경기 위축을 ‘경제 살리기’의 대국민 심리전으로 어설프게 대체하여 국민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게 아니라, 메르스의 완전한 종식만이 진정 경제에 도움되는 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메르스 종식에 모든 정책 수단과 역량을 총동원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메르스 사태로 생계난을 겪고 있는 극빈층, 청년, 자영업자 등에 대해 적극적인 생계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메르스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은 정부와 보건당국의 적극적이고 철저한 메르스 차단이다. 정부는 메르스 확진자와 의심자를 적극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지역별 대규모 의료 격리시설을 확보하여 메르스의 지역전파를 단호하게 막아야 한다. 또한 메르스 발병 병원과 감염 경로, 발생 지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만이 국민들의 메르스 공포를 낮추고 메르스 사태를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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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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