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민주노동당 개방형 국민경선 불발
    :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민주노동당의 유일한 브랜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채택한 개방형 국민경선제도의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대선기획단장인 김선동 사무총장은 2006년 9월 29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대선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토론을 전개하기로 했다”며 완전 개방형 경선제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대선후보 선출방식에 관한 논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에서도 논의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상현 기관지 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직면한 어려움을 타개하고 일거에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원 이외의 후원자, 지지자, 연고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후보 선출 과정에 50만 이상의 일반 국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경선 과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선거인단 모집을 통해 50만 이상의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써 대선 승리의 조직적 토대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의 신임 이석행 위원장은 조직된 대중 백만이 참여하는 개방형 경선으로 진보진영이 쾌거를 이룩하자는 선거 공약을 진작에 내걸었다. 이렇듯 논의의 핵심은 개방형 국민경선제를 채택할 것인가 여부였다. 2007년 3월 11일 당대회에서 진성당원에 의한 직접 선출이라는 당헌 개정 여부로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개방형 국민경선제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파간 대결과 일심회 사건 등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어 있는 조건에서 50만을 참여시키겠다는 포부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국민 경선의 자발적 열기가 전혀 감지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집되는 선거인단 또한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정파 조직에 의해 ‘조직’된 선거인단이라면 대선후보 선출과정은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대중 단체에 조직을 갖고 있는 이들 간 세 과시의 각축장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 등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당이 자신의 정강 정책을 구현할 수 있는 공직 후보를 선출해 유권자에게 심판을 받는 것이 정당 조직 원리인데 공직 후보 선출을 비 정당원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정당 정치의 부정에 다름 아니라는 논리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토론을 거치며 당대회에 상정된 ‘개방형 후보 경선안’은 63.14%의 찬성에 그쳐 2/3를 넘기지 못함으로써 부결되었다. 그러나 당권을 쥐고 있던 측에서는 개방형 경선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중경선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를 관철시키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중앙위에서 승인을 얻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결국 민주노동당이 자랑하는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고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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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 “또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해도 내 행동은 똑 같을 것”

 

 

 

2005년 8월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삼성으로부터 떡값(뇌물)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7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노 의원은 1998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이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모금한 이른바 ‘세풍 사건’ 때도 현대와 대우, SK는 모두 돈을 낸 것으로 드러났는데 유독 삼성만 빠진 것은 검찰이 삼성 봐주기 수사를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삼성X파일에서 보듯 삼성의 상습적인 뇌물 공여에 길들여진 검찰에 의한 공모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이 공개한 명단은 김상희 법무부차관에서부터 홍석조 광주 고검장까지 검찰 수뇌부가 망라된 명단이었고 X파일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검찰 ‘쥬니어’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돈을 살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노 의원에 의해 명단이 공개된 전·현직 고위 검찰 간부들은 골리앗에게 돌을 던진 다윗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안강민 서울지검장을 앞세워 노 의원을 고소했다. 노 의원은 “나를 기소하려면 그렇게 하라. 나의 행동이 공익에 반한다면, 국민이 알 필요도 없는 내용을 공개하고 사리를 추구했다면 스스로 면책특권을 포기할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것이다. 옳다면 해야 한다. 다시 또 이런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의 행동은 똑 같을 수밖에 없다”며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주도한 5개월간의 수사는 삼성과 떡검의 면죄부 주기로 끝이 났다. 뇌물을 주라고 지시한 이건희 회장은 출국정지도 되지 않았고, 소환조사도 받지 않았다. 서면조사에서 이건희가 한 답변은 “개인 돈 일부를 구조본에 맡겼고 알아서 쓰라고 시켰기에 본인은 잘 모른다”는 것이 전부였다. 검찰은 명백한 자료를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이회장이 돈을 준 사실이 없다는 말만 인정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논리로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7명의 검찰 고위간부들은 어떤 법적 심판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노 의원을 고소한 안강민 전 대검중수부장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한부환 서울고검 차장은 삼성비자금 수사를 맡고 특별감찰본부장을 하기도 했다. 삼성 장학생이 삼성 비자금 수사를 맡고, 검찰 내부 감찰본부장을 맡고 있으니 감찰이 공정하게 될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은 언론중재위원까지 맡았다. 역으로 삼성 X파일을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와 떡검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 등이 삼성공화국 황제의 코털을 건드리고 그 호위무사들의 비위를 캤다고 거꾸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삼성X파일은 1997년 100억이 넘는 대선 자금을 여야 정치권에 전달하는 범죄 모의 장면이 담겨 있으며 검찰에게 명절과 연말 정기적으로 떡값을 나눠주는 장면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작년에는 3천만 원 했는데 올해는 2천만 원 하자”는 식의 얘기들이다. 이 범죄 모의 테이프가 밝혀진 것은 2005년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범죄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작년에 2천 했는데 올해는 얼마를 하자”는 얘기가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삼성으로부터 상습적으로 뇌물을 건네받은 검찰 주니어들이 그 후 시니어가 되어 있을 텐데 이들에게 최소한 2004년 연말까지 ‘떡값’이 건네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97년 뇌물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한 것은 애초에 수사 의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수사 검사였던 황교안 스스로가 ‘부당거래’의 한통속이라는 의미다. 황교안 차장은 법무부 장관을 거쳐 2015년 8월 현재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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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노무현 연정
    : 민주노동당은 소연정도 부담스러워

 

 

 

 

핵 반대 열풍으로 원내 1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의 말대로 ‘길 가다 지갑을 주운 것’이었는지 실력 이상으로 얻은 의석수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까먹어버렸다. 2004년 총선 1년이 지난 2005년 4.30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성적표는 6:0 완패, 의석수는 146석으로 줄었다. 이로써 열린우리당의 원내 과반의석 시대는 1년 만에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6월 24일 당-정-청 수뇌부 인사 11인 모임에서 ‘연립정부’ 이야기를 꺼냈다. 법안 처리도 어려워지고, 윤광웅 국방장관에 대한 해임결의안을 막아낼 힘도 없으니 ‘비상사태’라는 말까지 하면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노무현대통령은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끝장내는 정치개혁을 자신의 신념으로 가져온 정치인이고 그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중대선거구제도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혹은 민주노동당이 주장해 온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으로 바뀌어야 하며 기존의 지역구도에 의존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로는 정치개혁이 요원하다는 게 노무현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노무현의 진심은 개헌보다 어려운 선거법을 바꿀 수 있다면 권력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원내에서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이 무너진 이후에 나온 ‘대연정’ 제안은 제안 받은 당사자인 한나라당에 의해 “연정 발언은 여소야대에서 절대 밀릴 수 없다는 오기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선거법 하나 바꾸기 위해 대통령의 권력까지 내놓겠다는 건 헌법파괴적 생각”이며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주는 권력은 안 받겠다”는 공식선언(8.1 박근혜 당대표 기자회견)으로 간단히 무시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이라크 파병에 이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자해 정치에 가까웠다. 실제로 성사시키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접촉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성의를 다하는 것이라기보다 상대의 의중이나 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안함으로써 평지풍파만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들조차 “민생현안이 산더미인데 대연정 제안이 뭐냐?”며 뜬금없다고 받아들였고, 노무현식 돌출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은 8월 10일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공식 포기하는 대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과의 소연정 추진 가능성을 언급했다. ‘선거제도 개혁’과의 빅딜로 제안된 대연정 제안이 거부된 상황에서 소연정을 추진한다는 건 여소야대라는 원내 환경을 역전시키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려웠다.

 

소연정에 대해 유시민 의원은 “소연정을 해서 다수파를 확보하면 국회운영은 다소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 정치발전에는 합당한 대안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당내에서는 연정을 한번 생각하는 자체가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아직까지 덜 여문 당이어서 소연정은 자기의 운명을 거는 식으로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게 “가령 장관을 준다면 좋아할 것 같지만, 오히려 민주노동당에서는 폭탄이어서 부담된다”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대신 “안정적인 과반수 의석 확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 연합이 오히려 쉬운 방법”이라며 한발을 빼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입성해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근 지 1년밖에 안 된 아직 ‘덜 여문’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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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차떼기’와 정치개혁
     : 민주노동당, ‘오세훈법’으로 지구당 폐지라는 유탄을 맞다.






2003년 12월 26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가 삼성, LG, 현대차 등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집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불법 자금의 규모도 규모지만 대기업과 한나라당 간에 불법 자금을 전달하는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007 가방이나 쇼핑백에 만 원 권을 넣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쪽’ 이회창 후보의 모금은 달랐다. 거액의 돈을 실은 차를 통째로 넘기는 방식,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150억을 탑재한 현금수송차량 키를 전달하는 이른바 ‘턴 키’ 방식의 범죄행각은 마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수사를 지휘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은 823억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쪽은 120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혔고 정치인 30여명, 기업인 20여명을 기소했다.


이런 천문학적인 불법 정치자금이 동원되는 고비용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며 정치개혁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4당 합의에 따라 2003년 11월 13일 박세일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이하 정개협)가 출범했고 국회 정치개혁특위도 이런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오세훈법’이라고 하는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의 개정판이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은 ‘클린 정치’를 표방하며 정치관계법 개정을 집도했다.


그러나 오세훈이라는 집도의는 민주주의 정당정치에 대한 철학 자체가 부재한 돌팔이였다. 국회 정개특위는 “돈은 묶고 입은 풀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 불신’에 기초해 정치 자체를 ‘다운사이징’했다. 돈도 묶고 입도 묶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먹는 하마’로 낙인찍힌 지구당의 전면 폐지였다. 민주노동당과 같이 진성당원제로 운영하고 풀뿌리 주민운동과 깊이 결합하는 방식의 정당에게 지구당 폐지는 대중정당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소액 정치후원금 1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되게 한다거나 46석의 비례대표를 56석으로 늘리는 등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공간을 없애버리고 선거시기에도 합동유세를 배제해버림으로써 정치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해버렸다.


민주노동당은 정개협이 제안한 비례대표의 과감한 확대(100석)와 같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게 만드는 정치개혁에서는 소극적이면서 정치를 원내 정치로만, 명사 정치로만 한정하려는 ‘오세훈식 돌팔이 시술’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차떼기로 인한 정치권 전반의 불신 여론은 정치의 축소에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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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1인2표 선거제도가 만든 기적
     :3회 지방선거, 민주노동당이 자민련을 누르고 제3당으로 도약하다

 

 

행운의 여신은 준비한 자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2002년 3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6월 13일 민주노동당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국회의원 하나도 없는 신생정당이 17개의 국회 의석을 가진 자민련을 제치고 일약 제3당으로 도약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준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가임대차보호법 입법 운동을 비롯해 민생을 돌보는 강력한 캠페인도 있었겠지만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현행 선거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 적금을 부어두기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노회찬 부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기존의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기존 방식은 별도의 정당투표를 하지 않고 지역구 출마자의 득표를 합산해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구 후보에게 던진 표를 통한 간접투표이므로 ‘직접’투표라는 헌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 주장의 핵심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였고 2002년 3회 지방선거 때부터 적용되게 되었다.

 

1인2표제라는 획기적인 선거제도 변화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성 정당들은 그래봤자 광역 의회 의석 1석 정도에 불과하다고 가벼이 여긴 것이다. 그러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의 문을 여는 첫 선거였고, 제3당으로 도약하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관문으로 보고 여기에 총력을 쏟아 부었다. 선관위가 변화된 선거제도, 1인2표제 홍보에 소극적이라며 항의하기도 했으며 선관위를 대신해 모의투표용지까지 만들어 홍보했다.

 

3회 지방선거는 붉은 악마의 열기로 가득찬 월드컵 한 복판에서 치러졌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비리를 물고 늘어진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의 부패정권 심판 대 원조 부패 심판이라는 진흙탕 공방전 속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그런 탓에 투표율은 사상 최저인 48.9%를 기록했지만 민주노동당의 “한 표는 현재, 다른 한 표는 미래를 위해”라는 선거 캠페인 전략은 정치적 냉소를 뚫고 나아갔다.

 

1인2표 정당투표제가 처음 도입된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8.13%, 133만표를 득표함으로써 6.5%에 그친 자민련을 넘어섰다. 울산에서 2명의 기초단체장을 당선시켰, 광역비례 9명을 포함해 총 11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언론들은 3회 지방선거 결과를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 참패, 자민련의 몰락, 민주노동당 약진”이라고 정리했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2004년까지 22억여원의 국고보조금을 받는 제3당이 되었다. 그 힘으로 연말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선거방송 토론에 당당히 내보낼 수 있었으며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를 안방 구석구석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민주노동당은 44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10석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도 변화가 정치를 어떻게 바꾸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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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Story]는 한 갑자를 돌아 61회로 지난 주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정의당의 전사로, [진보정당 Story]를 39회를 예정으로 연재한다.

1990년대 초반의 민중당까지 거슬러 갈 수도 있겠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 아래,

 62회 <진보정당 Story>의 주제는 1996년 12월에서 97년 1월로 이어진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 투쟁’과 ‘국민승리21’로 잡았다.




62.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 진보정당 건설 

   : ‘민주노동당’ 건설의 배경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어 7월,8월,9월 노동자 대투쟁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권위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신음하던 노동자들이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억압체제가 이완된 틈으로 마치 마그마가 치솟듯 끓어오르며 억압체제의 얇은 지각을 뚫고 분출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광범위한 사회변혁으로 이어졌다. 전노협, 전농, 전교조, 전빈련, 전대협 등 다양한 사회계급, 계층이 조직되었고, 여소야대의 정당 정치가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겨레신문과 같은 국민주 신문이 탄생하면서 언론환경도 바뀌었고, 지체되긴 했지만 지방자치제도 부활했다.


하여간 6월 민주항쟁은 가히 시민혁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항쟁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를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형성된 정치사회체제를 우리는 ‘87년체제’라고 불렀다. 6월 항쟁을 사회 전반의 변혁으로 이어지게 한 것은 시민사회의 조직화, 특히 노동조합의 조직화 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89년의 노조 조직율은 19.8%를 기록할 정도로 노조 결성 붐이 식지 않고 이어졌다. 국가의 폭압에 눌려 왔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자각이 노동조합이라는 시민사회의 진지가 구축되면서 비가역적인 행진을 지속한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을 보며 한국사회의 진보적 전위들은 ‘민중당’, ‘통합민중당’ 창당 등 정치적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향후 건설될 진보정당의 든든한 기초가 축성되고 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대중운동은 곧바로 진보정당 건설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은 그 후 10년이 지체되었다.


서구의 진보정당들이 건설될 당시의 상황을 보면,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계기를 사회적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의 건설은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의 계기도 놓치고 한국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의심받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분단체제라는 대중적 좌파정당이 자리 잡기 힘든 조건과 함께, 재야운동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여전히 진보정당의 시기상조론을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은 ‘미래’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대중적 노동운동이 ‘민주노총’을 조직할 정도로 커졌고, 외환위기라는 자본주의의 쓴맛을 보았으며, 민주화 이후 전후 세대가 사회의 중핵을 차지하며 레드 콤플렉스가 희석되고 있는 조건에서 더 이상 진보정당의 건설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19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이 결성되었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국민승리21’ 결성의 동력은 1996년 12월에서 97년 1월로 이어진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 투쟁이었다. 민주노총 역사상 유일하게 ‘총파업(제네스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은 날치기로 통과된 법안을 무효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입법부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진보정당이 없는 탓에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를 완전히 철회시키지는 못했다. 97년 3월 노동법이 재개정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결의를 모았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조 간부나 지식인 수준에서 거론되는 말이었으나 97년 이후부터는 조합원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미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체제가 공고히 자리 잡은 상태에서 제3 정당으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6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절반에 불과한 30만 6026표, 1.2% 득표에 그쳤다. 기대에 못 미치는 득표에 실망한 일부는 국민승리21을 떠났으나 울산과 창원, 거제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확인된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은 진보정당 건설의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총 위원장직을 던지고 국민승리21을 기반으로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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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5.06.05 20:20




김형탁(진보정의연구소 부소장,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6월 4일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선언이 있었다. 정의당, 노동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등 네 조직의 대표자들이 2015년 안에 더 크고 더 강력한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을 천명하였다.


아직 대표자들의 의지를 표명하는 선언이긴 하지만, 진보정치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중요한 계기라고 표현한 것은 이 선언이 4자간의 통합에 그치지 않고, 더욱 폭넓은 진보세력의 결집과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공동선언이 지금 당장은 큰 관심을 끄는 사건도 아니고, 또 판을 흔들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지난 재보궐선거에 나타났던 갈등으로 인해 일부에서는 이를 폄하하는 흐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지리멸렬한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진보정치가 도약하기 위해 진보세력의 통합은 반드시 완수하고 넘어가야할 과제다.


공동선언에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여러 가치와 당면과제가 담겨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현 시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노동정치이다.


정의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머릿속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 상을 만들기 위해 지난 3년간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상생추구의 정당,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 사민주의 정당 등 여러 시도를 해 오고 있지만 아직 정의당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정의당의 가장 우군이어야 할 노동조합의 간부들도 정의당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 진보정치의 분열로 만들어진 정당, 또는 몇몇 명망가들의 존립을 위해 존재하는 정당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을 피상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으나, 비판이 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정의당을 노동자들의 정당이라고 보지 않는다. 표현의 정도를 낮추어 노동친화성을 가진 정당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잘 정립된 노동정치의 개념을 가지고 정의당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에는 노동자들이 많지 않다. 노동 출신들이 당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노동현장에 정의당 사람들은 잘 찾아오지도 않는다. 차라리 을지로위원회가 더 친근하다.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는 노동자들, 또는 노동조합을 만들 처지도 못되는 불안정노동자들은 정의당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정의당은 대변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동시장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정의당은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어려운 담론 외에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청년 세대의 실업률이 최고치를 갱신하고, 일에 대한 청년들의 태도가 이전 세대와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대해서도 정의당이 제시하는 해법이나 대안은 없었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은 보인다. 노동조합 활동가들 중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을 통하는 것이 노동정치를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길이라고 보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정의당으로 집단 입당하자라는 식은 아니다. 노동정치에 대한 상을 분명히 하고, 정의당이 노동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치인지 점검하고 내용을 주문할 것이다. 이번 공동선언은 그 흐름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의당은 비정규직 정당임을 선포하고, 천호선 대표는 전국 현장을 순회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당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통합에도 긍정적 신호가 된다. 나아가 당의 핵심 노동 정책이 더욱 중요하다. 알바연대에서 시작되었던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이 전국적인 슬로건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취급되었던 요구가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받는 멋진 슬로건이 되지 않았는가. 진보세력 통합의 과정을 통해 당의 노동정책은 더욱 풍부해 질 것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정의당을 자주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은 정의당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길 원한다. 공동선언은 그 둘 모두를 위한 밑 작업의 하나다.


숨은 정동영 찾기 작업은 그만 하자. 지금은 쪼개고 가르는 시기가 아니라, 뭉치고 합하는 시기다. 이 작업을 못 끝내면 우리는 도약할 수 없다. 도약은 착지점을 보고 뛰는 것이지만, 바람에 날리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모처럼 찾아 온 기회를 이런저런 우려로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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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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