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Story]는 한 갑자를 돌아 61회로 지난 주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정의당의 전사로, [진보정당 Story]를 39회를 예정으로 연재한다.

1990년대 초반의 민중당까지 거슬러 갈 수도 있겠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 아래,

 62회 <진보정당 Story>의 주제는 1996년 12월에서 97년 1월로 이어진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 투쟁’과 ‘국민승리21’로 잡았다.




62.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 진보정당 건설 

   : ‘민주노동당’ 건설의 배경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어 7월,8월,9월 노동자 대투쟁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권위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신음하던 노동자들이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억압체제가 이완된 틈으로 마치 마그마가 치솟듯 끓어오르며 억압체제의 얇은 지각을 뚫고 분출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광범위한 사회변혁으로 이어졌다. 전노협, 전농, 전교조, 전빈련, 전대협 등 다양한 사회계급, 계층이 조직되었고, 여소야대의 정당 정치가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겨레신문과 같은 국민주 신문이 탄생하면서 언론환경도 바뀌었고, 지체되긴 했지만 지방자치제도 부활했다.


하여간 6월 민주항쟁은 가히 시민혁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항쟁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를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형성된 정치사회체제를 우리는 ‘87년체제’라고 불렀다. 6월 항쟁을 사회 전반의 변혁으로 이어지게 한 것은 시민사회의 조직화, 특히 노동조합의 조직화 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89년의 노조 조직율은 19.8%를 기록할 정도로 노조 결성 붐이 식지 않고 이어졌다. 국가의 폭압에 눌려 왔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자각이 노동조합이라는 시민사회의 진지가 구축되면서 비가역적인 행진을 지속한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을 보며 한국사회의 진보적 전위들은 ‘민중당’, ‘통합민중당’ 창당 등 정치적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향후 건설될 진보정당의 든든한 기초가 축성되고 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대중운동은 곧바로 진보정당 건설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은 그 후 10년이 지체되었다.


서구의 진보정당들이 건설될 당시의 상황을 보면,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계기를 사회적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의 건설은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의 계기도 놓치고 한국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의심받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분단체제라는 대중적 좌파정당이 자리 잡기 힘든 조건과 함께, 재야운동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여전히 진보정당의 시기상조론을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은 ‘미래’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대중적 노동운동이 ‘민주노총’을 조직할 정도로 커졌고, 외환위기라는 자본주의의 쓴맛을 보았으며, 민주화 이후 전후 세대가 사회의 중핵을 차지하며 레드 콤플렉스가 희석되고 있는 조건에서 더 이상 진보정당의 건설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19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이 결성되었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국민승리21’ 결성의 동력은 1996년 12월에서 97년 1월로 이어진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 투쟁이었다. 민주노총 역사상 유일하게 ‘총파업(제네스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총파업은 날치기로 통과된 법안을 무효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입법부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진보정당이 없는 탓에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를 완전히 철회시키지는 못했다. 97년 3월 노동법이 재개정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결의를 모았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조 간부나 지식인 수준에서 거론되는 말이었으나 97년 이후부터는 조합원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미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체제가 공고히 자리 잡은 상태에서 제3 정당으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6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절반에 불과한 30만 6026표, 1.2% 득표에 그쳤다. 기대에 못 미치는 득표에 실망한 일부는 국민승리21을 떠났으나 울산과 창원, 거제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확인된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은 진보정당 건설의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총 위원장직을 던지고 국민승리21을 기반으로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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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5.05.22 15:19

 

 

 

 

 

 

 

 

 

 

 

 

김정순 (진보정의연구소 사무국장)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엎디어 자칫하다간 키가 큰 사람들의 정수리에 맞닿을 정도로 바짝 내려앉아 있었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나는 공연히 진땀이 났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서점 앞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한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잠을 설쳤는지 얼굴이 두더지가 뒤집어놓은 밭고랑처럼 푸석푸석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도 가벼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9시 10분 전, 지부장은 눈동자와 손가락으로 모인 인원을 점검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자!”

 

전장에 나가는 어느 장수의 말소리가 이렇게도 진중하고 무거웠을까? 우리는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5층과 6층에 우리들의 일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대여섯 명의 소장들이 마치 도열하듯 서 있었다. 생각보다 영업국에 모인 소장들이 몇 명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구마다 영업국이 있었고 각 동마다 영업소가 1~2개가 있어 소장들만 모아도 족히 30명은 넘었다. 그 시간 대부분의 소장들은 영업국장의 지시로 이미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철역 입구나 버스 정류장에 나가 있었다. 

 

오늘은 회사에 민주노조가 들어선지 처음으로 파업을 선언한 첫 날이었다. 파업으로 돌입하기 한 달 전부터 ‘준법투쟁’의 일환으로 ‘정시 출퇴근’, 노동조합에서 나눠준 리본 달기나 사복근무만으로도 관리자들의 엄포와 회유로 그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체험한 나로서는 아예 일손을 놓는 파업은 얼마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될지 두렵기까지 했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아침에 모두 본사가 있는 시청역으로 출발했어야 하나, 어제 밤부터 아니 훨씬 그 전부터 과장과 소장들은 돌아가면서 담당직원들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등 조합원들의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자 지부장은 영업국장과 담판을 지었다. 그것은 파업 첫 날 소속 조합원들과 함께 노동조합이 있는 본사가 아닌 영업국에 모여 다시 한 번 파업참가에 대한 회의를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거의 매일 지부장을 불러 ‘파업참가를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우리 영업국이 선두에 서는 꼴은 볼 수 없다.’며 엄포를 놓곤 하던 국장으로는 오히려 반갑고도 다행스러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파업 첫 날만 잡아 두어도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본인 또한 본사 인사과장에게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과장이 미리 준비해 둔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전부 회의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과장은 남직원으로 하여금 회의실 문 앞을 지키게 했고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을 지키고 있던 소장들을 불러들였다.

 

회의실에 갇히게(?) 되자 지부장은 앞에 앉은 조합원 두 명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들은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지부장의 눈짓에 맞춰 회의실 구석에 천장까지 쌓여있던 휴지나 행주가 들어있는 박스들을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평상시 영업사원들이 고객 응대용으로 사용하곤 하는 물품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옮기자 아주 좁은 문이 하나 나왔다.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었다. 그 밑으로 역시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먼지 덮인 비상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상시 회의실 청소를 담당하던 여직원들이 아니고서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비상구 표시 없는 비상구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제히 숨을 죽이고 한 명씩 가방을 챙겨 그 문을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지부장의 지략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집결시간을 한 시간 가량 넘겨 도착한 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합원들로 대한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조합원이 3,000명이었는데 그중 1,500명 이상은 모인 듯하였다. 저마다 가방 하나씩을 들고 메고 있어 얼핏 보면 여행객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현장에 나와 있던 노동조합 간부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남대문 앞에 있는 본사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합원의 대다수가 여직원들이라 그런지 그녀들이 뿜어내는 활달함과 유쾌함은 파업이 주는 무게감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사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기다리고 있는 한 무리의 남성 관리자들의 모습이 보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서로가 팔짱을 끼고 건물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관리자들은 자기네 소속 여직원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욕설을 하기도 하고 어떤 관리자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무리 중의 누군가를 끌어내려고도 했다. 그들의 탄압이 거세지던 어느 순간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위해 일제히 앞사람의 허리를 꽉 잡고 본사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들릴락 말락 작게 들리던 그 노래는 이윽고 가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마침내 거대한 합창이 되어 들려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1,500여명이 3~4줄을 맞춰 오르다보니 노래는 몇 순배를 돌았고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에 누군가는 울음을 섞어 부르기도 했다. 때맞춰 가랑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분위기는 더욱더 비장해졌다. 행렬은 끝없이 이어져 계단을 이용해 8층 대강당에 이르기까지 노래 또한 끊일 줄 몰랐으며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모여든 관리자들도 감히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나는 전율했다. 노래 가사에 전율했고 비장하고도 뭔가 모르게 서러우면서도 감격스러운 분위기에 전율했으며 층층마다 진중하게 울려 퍼지던 노래에 전율했다.

 

그날의 그 전율은 이후 입사 겨우 두 달 만에 파업에 참가하였다며 한 달 동안 말을 걸지 않던 선배의 부당한 처사도, 수습 딱지가 떨어지기가 무섭고 외따로 떨어진 영업소로 발령이 났을 때도 나를 푸르게 살아있게 했다.

 

노래의 마지막 단락,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두고두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를 없애주었다.

 

광주항쟁이 낳은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작 광주항쟁 기념식에서 거부당하는 일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들에게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부정되자 마치 지금까지의 내 삶이 또한 통째로 거부당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동자 민중들에겐 아리랑과 같은 곡이다. 천천히 읊조리듯 부르면 그것처럼 슬프면서도 애잔할 수가 없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노래이며 팔뚝질과 함께 부르면 또 그것처럼 힘이 뻗쳐오를 수가 없는 노래다. 부디 노래에 덧씌운 어처구니없는 구실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서로서로 입을 모아 뜨겁고 힘차게 부를 수 있는 푸르른 오월이 다시 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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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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