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아! 민주노동당 분당





2007년 대선 직후 12월 29일 개최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지도부는 대선 패배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그에 앞서 문성현대표는 심상정 의원을 따로 불러 비대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심의원은 문대표에게 “우리 당은 걸핏하면 지도부 총사퇴로 모든 걸 덮으려 하는데 진정으로 책임지시려면 왜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되었는지 공개적으로 발언하세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부터 밝히세요. 임기가 며칠 남지도 않은 지도부가 서둘러 사퇴하는 걸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그건 책임지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겁니다” [당당한 아름다움 192쪽]며 ‘독배’가 될지도 모르는 제안에 대해 부담스런 심경을 여과없이 밝혔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개최 직전 12월 27일  [조선일보]에서는 “친북세력과 결별해야 민노당에 미래 있어”라는 제목의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튿날 민주노동당원인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이 진보매체인 [레디앙]에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인 자주파 또는 주체파는 한국적 분단현실의 산물이긴 하나, 그들이 당권을 잡고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책임은 지지 않고,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공부와 학습도 하지 않는 종북 주체일 뿐이다... 이들을 허덕이면서 안고 가는 것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당 창당이 더 낫다”며 신당 창당을 주장했다.


당의 일각은 벌써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2008년 1월 8일, 경기도 구리의 지역위원회 전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부산 지역 당원 52명이, 이어 광주·여수 등서도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1월 27일에는 조승수를 비롯해 선도 탈당한 홍세화, 김혜경 전 대표, 김석준 부산시당 위원장등이 참가한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이 닻을 올렸다. 민주노동당 분당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심상정 비대위 대표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는 대다수는 비대위의 혁신이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비대위가 당을 혁신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예단하고 미리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성급하다”며 선도 탈당 세력을 설득하는 한편 2월 3일 당대회에 “당의 민주주의를 훼손했던 패권주의를 척결하고 편향적 친북정당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혁신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며 “제 2창당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혁신안을 마련해 미래를 책임지는 진보정당으로 나가겠다”며 강도 높은 혁신 의지를 밝혔다.


1월 27일 공개된 당대회 안건에는 세칭 ‘일심회’ 사건의 최기영, 이정훈 당원 제명안과 미군의 완전한 철군과 북핵폐기를 연계시킨 대선공약 폐기 뿐만 아니라 총선 비례대표를 사실상 전략공천으로 채움으로써 정파 패권의 전쟁터가 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겼다.


그러나 이미 평등파 당대의원 일부가 선도 탈당한 상태에서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자주파는 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전의를 불태우며 정면으로 충돌할 기세였다. 한편 당대회가 깨어지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자주파 일부에서는 최기영, 이정훈 제명건에 대해 “당기위에 회부해 절차대로 진행하면 될 일을 비대위에 제출하는 무리수를 뒀다. 당대회 안건으로 올라오면 소명 기회조차 부여하지 못한다. 이건 절차상에 중대한 하자가 있을뿐더러 당 내분을 더욱 확산시킬 수도 있다. 평가의 문제와 인신에 대한 처리 문제는 별개”라며 제명안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대위로서는 일심회 사건에 대한 당 차원의 정치적 의사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드러내는 것을 회피할 수도 없었으며 당기위 뒤로 숨을 수도 없는 핵심 현안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선도 탈당한 이들을 다시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보다 강력한 혁신의 메시지를 던져야 했다.


심상정 대표도 배수진을 쳤다. “이번 당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된다면, 비대위 불신임으로 간주해 사퇴하겠다”며 “그 핵심은 일심회 사건 관련자 제명처리 부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운명의 날, 2008년 2월 3일 당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 위원장“오늘 당대회가 우리가 믿음직한 진보정당으로 다시 설 수 있느냐를 가를 역사적 분기점”이라며 두 당원의 제명 방침을 담은 ‘제 2창당을 위한 평가혁신안 승인의 건’과 18대 총선 전략명부 추천을 담은 안건에 대해 “수정안 제출 없이 찬반토론만으로 원안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오후 3시50분에 시작된 최기영,이정훈 두 당원 제명 안건은 정종권 집행위원장이 “북한 및 북한과 연계된 인물에게 전달할 것을 목적으로 당내 동향과 당직자 신상과 성향을 분석한 자료를 유출한 것은 당헌,당규의 당의 기밀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안건 제안 이유를 설명하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자주파 대의원들은 “당사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당원의 양심을 믿어야지 시대악법인 국가보안법 판결문을 믿을 것이냐”는 등 질문공세를 두시간 가까이 이어가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제명안을 삭제하자는 수정동의안이 제출되었고 862명 투표에 553명이 찬성해 64.1%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비대위 혁신안의 핵심이 거부된 것이다. 자주파 대의원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수정안 통과가 선포되자 심상정 대표, 노회찬의원, 비대위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퇴장했다.


2월 4일 경향신문 사설은 “우리가 보기에 비대위 혁신안은 민노당의 현 상황에서 당의 양대 정파인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을 최소화하고 당을 되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 관련자 2명을 제명하는 등의 조처를 취함으로써 자주파의 친북 편향에 대해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한편 ‘무조건 탈당’을 선도하는 평등파에도 경고를 보냄으로써 양쪽을 다 같이 아우르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내 다수파이자 그동안 당을 주도해온 자주파는 비대위의 혁신안을 ‘국가보안법에 대한 굴복’으로 보고 부결시켰으며, 평등파 역시 당을 살리고자 마련한 대회에서 탈당을 감행하기도 했다”며 심상정 비대위 혁신안 부결을 아쉬워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도 결국 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7일 탈당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에서 심의원은 “현재 민주노동당의 틀로는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드는데 한계에 달했음을 고통스럽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을 희망으로 만들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2월 24일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연대회의’를 공식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을 떠나 진보신당에 참가한 당원은 대략 2만,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8년 만에 분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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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일심회’ 사건의 불똥이 민주노동당에 옮겨 붙다.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체제 하의 공안세력에게 종종 먹잇감을 제공했다.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이 주시하는 ‘공당’으로서 남북관계와 관련된 정치활동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해야 했다. 진보-개혁진영으로부터 악법으로 비판받고 있는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실정법인 이상 당직자가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은 민주노동당이 애써 쌓아온 긍정적 이미지를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입성하기 전에 발생한 2003년 8월의 세칭 ‘강태운 고문 간첩사건’은 민주노동당의 국가보안법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공안부에서는 강태운고문이 일본에 거주하는 공작원 박춘근에게 포섭되어 민주노동당 관련 자료와 국내정세 분석 자료를 전달하고, 중국의 북한 대외연락부 부과장 김문수 등 북한 공작원들과 접선을 계속해왔다며 강고문을 국가보안법 상 간첩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강태운씨를 ‘통일운동가’로 예우해 고문에 위촉했을 뿐 당내 일에 관여하지 않은 인사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구언론들은 민주노동당의 해명을 무시하고 강고문이 민주노동당의 정강 정책에도 깊숙이 개입한 듯 소설을 써댔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강고문의 활동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고문직 해촉과 당적 박탈 등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위반사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불의의 율법이다. 따라서 합법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국가보안법체제를 상수로 놓고 당을 규율하지 않으면 당이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내 입성 이후 2006년 10월에 발생한 소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민주노동당의 뒤통수를 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검찰은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 이정훈, 개인사업가 장민호(마이클 장), 모 학원장 손정목,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 등을 체포했다. 보수 언론은 6.15선언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민주노동당의 연루 사실을 부풀렸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건은 연루된 이가 마이클 장 등 4인에 불과했고, 강령과 규율을 별도로 정하지도 않았고, 조직을 결성한 것도 아니었으며, 구성원 서로가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는 점에서 ‘이적단체를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심회’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북한 공작원에 제공했다는 국가 기밀이라는 것조차 민주노동당 사업계획이나 ‘자민통 서울모임’ 내부 회의자료 정도여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유죄 증거물조차 “국가 안보를 위협할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등 사실상 ‘태산명동에 서일필’식으로 전형적인 부풀리기 수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민주노동당의 당직자가 344명의 당직자 성향분석 자료를 작성해 소위 ‘본사(북측)’에 넘긴 사실이나 “김정일 장군께 충성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는 따위의 맹세문을 보내는 등 친북 일탈행위는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 내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전에 당직자 신상정보 유출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진보운동의 일탈행위”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자주파 인사들은 “당을 음해하려는 검찰의 공작”이라고 일축하고 국민이 납득할만한 공식 브리핑이나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2003년 강고문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공식적 대응이 이렇게 모호해지면서 세칭 ‘일심회’사건의 불똥은 민주노동당 전체로 옮겨 붙었다. 보수세력은 연일 민주노동당을 ‘친북당’, ‘간첩당’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심상정의원은 “당이 진상조사를 통해 깨끗이 해명하고 일탈행위엔 국민적 눈높이에 맞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도부에 촉구했으나 ‘책임 있는 조치’는 굼뜨게 유보되었다.

당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의 핵심은 ‘일심회’사건은 공안세력이 부풀린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문제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작품’의 재료를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당 내부의 취약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심회’ 사건에 수세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진보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박노자교수 조차 “민족해방파(NL)에 대한 제 솔직한 의견을 묻는다면 한국 진보운동이 앓고 있는 ‘소아병적 질환’이라고 답하겠다.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고 싶어도 거기에 주사파가 너무 많아 주저한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며 “운동담론이나 당 차원에서도 북한의 국가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무슨 ‘민족해방 이념’ 쯤으로 착각하는 분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 리스크를 짊어지고 다니는 정당이었다. 결국 자주파가 “동지를 버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국민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북한 추종 노선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비판하는 측의 분당 압력도 점차 커져갔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비합법 운동을 해왔던 이들이 제도권 대중정당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각종 제도적 제약을 감안하고 이른바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체제 안에서 일하며 민주주의의 힘으로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진보적인 대중정당 노선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민주노동당의 키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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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민주노동당, 당내 독립언론의 성장과 갈등
    : 주간 ‘진보정치’, 월간 ‘이론과 실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치’라는 주간지와 ‘이론과 실천’이라는 월간 기관지를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특히 ‘진보정치’는 민주노동당이 창당하기 전부터 준비를 해 독립된 편집권을 갖고 독자재정으로 운영되는 기관지로서 민주노동당 당원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를 응원하는 지지자들까지 시선에 넣는 대중적 진보언론을 지향했다.


‘진보정치’ 창간을 주도한 이광호 편집장은 당 창당 이전부터 기관지를 준비해온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과 향후 진보정당과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기관지가 가장 중요한 몫을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래로부터 시작한 셈이죠.”라고 설명했다. (<미디어오늘> 2000.6.29). 그리고 당의 기관지이지만 독립된 편집권을 갖는 ‘진보정치’의 위상에 대해서는 “어찌 보면 기관지는 내부언론이지만 당의 입장, 방침만을 알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로서의 장치이거든요. 이러한 취지가 훼손된다면 언제라도 거부하거나 미련 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당의 공식입장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일방통행식 당보와는 분명히 차별된 독립 진보언론임을 명확히 했다.


2000년 3월 24일 창간된 ‘진보정치’의 뒤를 이어 2001년 7월 27일 월간 ‘이론과 실천’도 창간되었다. 최영민 편집장은 “<진보정치>가 대중적 정치신문이라고 한다면 <이론과 실천>은 보다 선진적인 당원과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운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상대적으로 심층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매일노동뉴스> 2001.7.31.)


‘진보정치’의 초대 기관지위원장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금수 이사장, 편집위원장은 이광호 전 민주노총 편집실장이 맡았고 주간 24면으로 발행되었다. ‘이론과 실천’은 장상환, 황광우 등 당 내 이론가와 활동가 15인을 편집위원으로 구성하고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 등 해외 이론가들이 해외자문위원으로 참여하도록 진용을 구성했다. 민주노동당이 원외 정당이던 권영길 초대 당대표 시절에는 비록 박봉이지만 기자들과 현장 통신원, 그리고 편집진은 당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도 가감 없이 반영하는 등 독립 진보언론으로서 기관지를 열과 성을 다해 만들었다.


종이 신문과 기관지 말고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의 인터넷 매체인 ‘판갈이.net’도 변화하는 매체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서 있는 ‘진보누리’와 같은 논객들 중심의 매체도 좌파 인터넷 매체로는 꽤나 독자층을 갖고 있었지만, ‘노사모’ 계열이 주도하는 ‘서프라이즈’와 같은 매체 파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진보정치’와 연동해서 뉴스까지 제공하는 ‘판갈이넷’은 급속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기관지위원회에서는 인터넷 매체 창간과 기관지 발전 방향을 두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6월 2기 당 대표체제가 출범하였다. 새롭게 선임된 정성희 기관지위원장이 ‘이론과 실천’의 최영민 편집장을 해촉하면서 기관지를 둘러싼 논란이 가시화됐다. 인터넷매체 창간과 기관지 발전방향을 두고 기관지위원회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면서 기관지를 둘러싼 갈등은 본격화됐다. 정성희 기관지위원장은 ‘진보정치’가 편향된 정파적 입장에서 기관지를 제작한다고 지적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문제 삼아 이미 인쇄를 마친 ‘진보정치’의 배포 중단 사태까지 일어나는 등 기관지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져갔다. 뜻있는 여러사람들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기관지위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기관지 창간을 주도한 이광호 편집장이 2005년 1월 말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4명의 기자 중 3명이 동반 사퇴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당 안팎의 편집기획위원들도 줄줄이 그만뒀다. 만평을 연재하던 만평가 이창우(필자)도 ‘진보정치’에 연재하던 만평 송고를 중단하는 등 독립언론으로서의 기관지 위상을 침해하는 일련의 공격에 대해 항의가 잇따랐다.


‘진보정치’ 이광호 편집장은 앞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미련 없이 떠났다. ‘진보정치’와 ‘이론과 실천’의 초대 편집장들은 모두 떠났다. 인터넷 매체 ‘판갈이넷’도 꺾였다. "이견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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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당직과 공직은 겸직할 수 없다?
    : 민주노동당, 제도권에 등장하자마자 당을 대표하는 리더를 배제하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문화를 혁신하는 리더였다.


우선 진성당원제가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이나 새천년민주당 등 기성 정당들은 당비를 내지 않는 페이퍼당원 수백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기가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여당과 야당에 동시에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철저히 당비를 내는 자에 한해 당원의 자격을 부여했고, 이런 진성당원이 2004년 17대 총선을 치를 당시 5만 명에 이르렀다. 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당원시스템은 정당운영의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개혁국민정당도 그 뒤를 이었고, 나중에는 열린우리당도 진성당원제를 모방하려 했었다. 진성당원제는 자연스럽게 공직후보에 대한 공천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후보자는 당원들이 직접 선거를 해서 선출하며 선출된 후보에 대해 당원들이 책임을 지는 구조였던 것이다.


진성당원제 말고도 민주노동당만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는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의 취지는 당이 이른바 ‘의회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막자는 것이었다. 당의 대중적 토대인 대중운동과 튼튼히 결합되어 비제도권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투입하는 방식으로 의회 연단을 활용해야 한다는, 변혁적 원칙이 강조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며 대중투쟁과 굳건히 결합해 온 민주노동당의 ‘검증된’ 의원단조차 의회 내의 제도적 틀에 갇혀 변질될 수 있다는 의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오직 시스템과 제도만이 국회의원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대표적인 리더십들이 대거 의회로 진출한 상황에서 이들이 당을 대표할 수 없게 만든 겸직 금지제도는 애초의 취지와 달리 오히려 당과 원내활동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권영길 대표를 비롯해 노회찬 사무총장 등 당의 국민적 대표선수들의 공백을 ‘듣도 보도 못한’ 정파의 리더들로 대체하는 부정적 후과를 낳았다. 당의 설계자들이 선의로 만든 이 제도는 원내 입성 후 권영길, 노회찬 등이 당을 대표할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곧바로 당내 논란을 불러왔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5월 6일 7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당규를 일부 완화하자는 내용의 수정안을 검토했다. 중앙위에 앞서 실시한 당원 설문조사에서는 57.5%가 “겸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당 중앙위는 당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의 숱한 기대 속에서 원내 입성하고도 당직과 공직을 분리함으로써 원내 활동의 성과를 당의 성장으로 흡수할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박차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직 선거를 이른바 NL과 PD 간의 대결이라는, 국민들이 보기에 낯선 정파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작은 성과에 취해 그것을 서로 빼앗으려는 집안싸움과 같은 모습으로 비춰지면서 국민들의 기대는 급속히 식어버렸다. 한 때 20%대를 육박하던 정당의 지지율도 곤두박질쳤고, 북새통을 이루던 기자들도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최고위원회의 다수파를 차지한 소위 ‘자주파’는 반미자주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유세와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같은 민생노선으로부터 동떨어진 정치적 결정을 독점하고 소수파들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켜나갔다.


3년 후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당규는 폐기되었다. 하지만 원내 입성과 동시에 당을 국민적으로 대표해왔던 리더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당규는 그 아름다운 취지와 달리 이미 당을 자해한 무서운 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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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부자에게 세금을!”

    : 민주노동당 ‘부유세’ 캠페인, 종합부동산세 신설로 결실을 맺다.
 




민주노동당은 시민사회와의 밀접 접촉을 통해 희망의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슈퍼 전파자의 역할을 해왔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제기했던 민주노동당의 대표 브랜드인 ‘부유세’도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한뇌연)이 2003년 3월 민주노동당에 부유세 도입 서명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해 옴에 따라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2003년 6월 26일 민주노동당은 한뇌연과 함께 부유세 도입을 통한 장애인 연금법 제정 2백만 서명운동 발대식을 개최했다. 한뇌연 사무국장 최영신은 “장애인 연급 도입을 위한 재정확충 방안을 찾던 중 민주노동당이 지난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부유세를 검토하게 됐다”며 “장애인 연금 도입이 소수 약자를 위해 일하는 민주노동당의 뜻에도 부합된다고 판단해 서명운동에 결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은 전 지구당 조직을 가동해 2004년 총선 전까지 1백만 명 서명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자들에게도 동의를 받으며 부유세와 장애인연금법 제정 문제를 부각시켰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조세체계로는 소득격차의 확대로 인한 양극화를 잡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부유세는 부동산과 같은 보유자산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재산세 중심의 조세체계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유세는 이미 유럽의 OECD 국가들은 지난 70년간 시행해 온 역사가 있고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스리랑카, 파키스탄에서 시행 중이었고, 남미 콜롬비아와 우루과이에서도 시행하고 있었다. 부유세에 대한 동료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민들이 체감하는 것은 경제위기 이후 빈부격차가 더 벌여졌고 개인 소득세와 재산세가 소득재분배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제력이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대한민국의 불평등 정도도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캠페인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그해 9월 종합부동산세 신설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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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정당 문화를 바꾸는 민주노동당
    : 비례후보 1순위가 여성인 정당, 비례 50% 여성할당을 당헌에 못박다





2003년 3월 1일 민주노동당은 정기 당대회에서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할당비율을 종전 ‘30% 이상’에서 ‘50% 이상’으로 확대했다. 아울러 명부의 순위 1,3,5번 등 홀수 순번을 여성에게 할당할 것을 당헌에 못박음으로써 여성할당 50% 이상을 명문화한 최초의 정당이 됐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당시 당헌에 당직과 공직 후보에 여성 30% 이상의 할당을 명시한 바 있다. 그러다가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당규를 정비해 광역비례 후보의 50%를 여성으로 할당하고 1번부터 홀수 순번을 모두 여성으로 할당함으로써 9명의 여성 광역의원을 배출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의 여성당원 비율은 2002년 말 현재 22%에 불과해 남성당원에 비해 현저히 그 비율이 낮았으나 남성에 비해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진보적 지향을 100% 관철시킨 것이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의 경우 말로는 여성의 정치적 진출을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비례대표 후보의 후순위와 말석에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실질적인 보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여성공천할당제가 처음 도입되긴 했으나 강제성이 없고 자발적 실시를 원칙으로 한 탓이다.


2002년 3회 지방선거에서 광역비례 전원을 여성으로 채우는 것을 확인한 여성단체들은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의 당이라며 그 진가를 인정했다. 17대 총선을 1년 앞둔 2003년 3월에는 아예 당헌에다 못을 박으니 나머지 당들도 마지못해 끌려왔다. 이렇게 해서 비례대표 여성의원 수는 13대와 14대, 15대에서 6명, 3명, 7명에 그쳤으나 여성할당제가 도입된 16대엔 11명으로 두 자릿수로 올랐으며 17대에 29명, 18대 27명, 19대 28명으로 30명에 근접했다. 전체 비례대표 54명 중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여성할당 외에도 진성당원제에 의한 당 운영과 당원의 직접 투표로 공직 후보를 선출하는 민주노동당 방식은 기성 정당에서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원외정당이지만 민주노동당의 선진적인 정당문화는 시민사회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기성 정당들의 내부 개혁을 자극했다. 민주노동당은 이렇게 정당 문화를 하나씩 바꿔내면서 정치를 바꿔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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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 ‘2군 후보’ 선수가 본선 무대에 올라 국민을 놀라게 하다

 

 

 

 

2002년 3회 지방선거에서 일약 3당으로 올라선 민주노동당은 쾌속 항진을 계속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대선후보 방송 토론에 진출했다. 5년 전 국민승리21 대선후보로 나서 2군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별 존재감도 없이 뛰던 권영길 후보가 당당히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이다.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소박한 물음은 권영길 후보가 방송토론에서 선보인 말이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는 것을 권영길 후보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양 쪽에 놓고 권영길 후보는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이며 민주당은 ‘부패 신장개업당’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부유세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가뭄의 단비 같은 공약을 쏟아내며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국민들의 귀에 쏙쏙 들어가게 설명할 수 있었다. 평소 제도 언론에서는 잘 눈에 띄지도 않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방송토론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었다. 동료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선 전 9월 5일 1.7%의 지지율이 선거 직전 12월 15일에는 4.7%로 뛰어올랐다. 양강 구도의 틈바구니에서조차 권영길 후보의 지지율은 쑥쑥 자라고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30만 표로 좌절했던 기억을 깨끗이 씻어내고 100만표 돌파는 무난해 보였다. 그러나 최종 득표는 3.9%인 95만7,148표. 100만 표의 벽을 넘지 못했다.

 

16대 대선 투표 직전에 정몽준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 선언이 있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낙승을 예상하던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유시민은 12월 19일 0시 50분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다. “노무현의 승리를 예상하고 권영길에게 표를 주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거 노무현으로 돌아 설 것입니다. 이 사태로 인해 권 후보 득표율은 여론조사 지지도의 절반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근원이 쓴 <아빠의 현대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주에 사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J씨는 이름난 노동운동가이고, 한때 혁명을 꿈꾸는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12월 18일 밤 10시 정몽준이 노무현과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잠을 설쳤다. 결국 그는 집사람과 함께 투표장에서 노무현을 선택했다. 그리곤 민주노동당에서 재정 마련을 위해 조직한 선거 참관인을 했다. 이 하나의 장면이 2002년 대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뒷날 조사해 보니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서 36.8%가 권영길을, 47.4%가 노무현을 찍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른바 소신투표(선호투표)와 전략투표의 딜레마였다.

 

권영길 선거 캠페인을 하던 이들도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을까 싶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던 많은 장면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진보적인 인사들 내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대선 결선투표제가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1차 투표에서는 소신투표를 하고 결선투표에서는 전략투표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갈등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갈등하고 결국 반목하는 만드는 것은 결국 제도의 불비 때문이다. 원래 제도화란 이런 국민들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두 번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추가로 든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선진국인 프랑스가 왜 그런 비용을 치르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비용을 아낀 결과는 국민들이 원치 않는 정치적 결과를 보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40조에 이르는 자원외교 혈세 탕진 같은 경제적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불비한 제도를 탓할 수 없었다. 권영길 후보는 동요하는 동료시민들에게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르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행복해지는 걸 두려워 말라고 호소했다. 비록 절반의 표를 도둑질 당했지만 100표에 근접한 성공을 거둔 민주노동당은 대선 이후 괄목상대할 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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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1인2표 선거제도가 만든 기적
     :3회 지방선거, 민주노동당이 자민련을 누르고 제3당으로 도약하다

 

 

행운의 여신은 준비한 자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2002년 3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6월 13일 민주노동당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국회의원 하나도 없는 신생정당이 17개의 국회 의석을 가진 자민련을 제치고 일약 제3당으로 도약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준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가임대차보호법 입법 운동을 비롯해 민생을 돌보는 강력한 캠페인도 있었겠지만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현행 선거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 적금을 부어두기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노회찬 부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기존의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기존 방식은 별도의 정당투표를 하지 않고 지역구 출마자의 득표를 합산해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구 후보에게 던진 표를 통한 간접투표이므로 ‘직접’투표라는 헌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 주장의 핵심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였고 2002년 3회 지방선거 때부터 적용되게 되었다.

 

1인2표제라는 획기적인 선거제도 변화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성 정당들은 그래봤자 광역 의회 의석 1석 정도에 불과하다고 가벼이 여긴 것이다. 그러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의 문을 여는 첫 선거였고, 제3당으로 도약하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관문으로 보고 여기에 총력을 쏟아 부었다. 선관위가 변화된 선거제도, 1인2표제 홍보에 소극적이라며 항의하기도 했으며 선관위를 대신해 모의투표용지까지 만들어 홍보했다.

 

3회 지방선거는 붉은 악마의 열기로 가득찬 월드컵 한 복판에서 치러졌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비리를 물고 늘어진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의 부패정권 심판 대 원조 부패 심판이라는 진흙탕 공방전 속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그런 탓에 투표율은 사상 최저인 48.9%를 기록했지만 민주노동당의 “한 표는 현재, 다른 한 표는 미래를 위해”라는 선거 캠페인 전략은 정치적 냉소를 뚫고 나아갔다.

 

1인2표 정당투표제가 처음 도입된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8.13%, 133만표를 득표함으로써 6.5%에 그친 자민련을 넘어섰다. 울산에서 2명의 기초단체장을 당선시켰, 광역비례 9명을 포함해 총 11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언론들은 3회 지방선거 결과를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 참패, 자민련의 몰락, 민주노동당 약진”이라고 정리했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2004년까지 22억여원의 국고보조금을 받는 제3당이 되었다. 그 힘으로 연말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선거방송 토론에 당당히 내보낼 수 있었으며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를 안방 구석구석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민주노동당은 44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10석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도 변화가 정치를 어떻게 바꾸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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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의석 하나 없는 정당이 법을 만들다


   : 민주노동당의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운동







“의석 하나 없는 정당이 모범적인 입법 활동을 해냈다”


민주노동당의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을 두고 한 말이다. 1997년 대선의 권영길 후보 정책 공약이었던 이 법안은 민주노동당의 민생정책 과제로 이어졌다. IMF 사태 이후 급증한 임대차 분쟁 과정에서 영세 상인들은 일방적인 임대료 인상이나 계약해지 통보뿐만 아니라 보증금을 떼이기도 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녹색소비자연맹, 함께 하는 시민행동, 참여연대 등과 함께 ‘상가임대차보호공동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캠페인에 착수했다. 당은 피해사례 조사와 전 당원 민원신청 운동, 거리 상담을 비롯한 무료상담, 법 제정 캠페인과 상인대회 등 강력한 캠페인을 벌여나갔다. 의석 하나 없는 정당이었지만 캠페인 능력에서는 발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은 강한 정당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로 치킨집을 차렸다가 건물주 부도로 임대보증금을 통째로 날리기도 한 영세상인들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의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활동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부동산신탁의 부도사건이 터졌다. 서민들의 피해액만 2천5백억에 달했으며 피해 상인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정치권도 민주노동당이 입법 청원한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2001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는 짧은 한마디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권영길 후보의 제안이 있은지 4년만에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비록 입법취지를 훼손할 수 있는 결함도 포함되긴 했지만, 경매 시 세입자의 임대보증금을 보호할 수 있는 대항력 제도와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제도 등 400만 상가 임차인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재벌의 소유구조 개혁이나 노동자의 고용 안정과 같은 문제뿐만 아니라 영세상인들의 민생을 챙기고, 약탈적 고금리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민생고에도 주목한 명실상부한 ‘민생지킴이 정당’, ‘경제민주화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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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 부설 정책연구소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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