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야권연대로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
   : 전략의 승리와 전략의 패배





2010년 지방선거는 진보양당체제 하에서 진보정당 대표선수를 가리는 최초의 진검승부처였다. 진보신당민주노동당을 ‘진보하지 않는 진보’로 규정하고 민주노동당을 넘어 대표 진보정당으로 나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 또한 내부 혁신을 통해 민생정당의 면모를 강화했다. 광우병 촛불집회를 거치며 이정희와 강기갑이라는 대중적 진보정치인을 키워낸 것이 민주노동당의 저력이었다.


노회찬, 심상정 같은 국민적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보유하고 있는 진보신당은 광역단체장 선거를 중심에 두고 정당 득표율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었고, 권영길, 이정희, 강기갑 등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있던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와 기초의회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는 전략이었다.


이명박정권에 대한 심판 선거로 치러진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최초로 본격적인 야권연대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5+4’라는 야권연대 테이블에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4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야권 단일후보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다. 그에 반해 진보신당은 기초 보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비중을 두고 있었으므로 광역단체 어느 한 곳도 보장되지 않는 야권연대 협상은 일종의 계륵 같은 것이었다.


진보신당의 노회찬이나 심상정 등은 광역단체장 후보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정당 지지율이 떠받쳐주지 않는 조건에서 후보만으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야권연대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야권 단일후보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제 1야당인 민주당은 그럴 의사도, 정치적 조정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의 ‘진보연대’를 통해 우선 진보후보 단일화라는 사전 과정을 거쳐서 진보진영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던 노력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초를 중심으로 판을 짜던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진보연대 보다 더 큰 야권연대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굳이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득표력 있는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부담스러웠던 민주당은 민주노동당을 지렛대로 진보신당 후보를 야권연대 틀 안에서 누르고자 했다. 진보신당과 진보 대표 정당을 두고 겨루는 입장에서 선거 이후 ‘누가 진보대통합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봤을 때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파괴력이 커지는 건 민주노동당에 달가운 게 아니었다.


진보신당으로서는 보병전보다 고공전에 유리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광역단체장 후보 방송토론회 등으로 진보신당 인지도와 지지도를 끌어올리면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민주노동당을 넘어서는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야권연대’라는 격랑 앞에서 후보 사퇴 압력에 시달릴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주관적 전략에 불과했다. 심상정이 후보 수락 이전에 기초단체장(고양시장) 후보로 나서는 문제까지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광역단체장 중심 후보 전략을 추진하던 중앙당 방침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심상정은 경기지사 후보로 나섰다. 부산에서는 김석준, 울산에서는 노옥희, 대구에서는 조명래, 광주 윤난실, 전북 염경석 등이 광역단체장후보로 나섰다. 노회찬 대표는 서울시장후보로 출마해 최전선에 섰다.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은 광역의원 24명, 기초단체장 3명, 기초의원 115명을 당선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22명에 불과했다. 기초 중심의 민주노동당 전략은 성공했고, 풀뿌리 기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 중심의 광역단체장 후보 전략을 구사했던 진보신당은 실패했다. ‘5+4’ 협상에서 우왕좌왕하던 진보신당은 결국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오며 독자완주라는 독배를 들었다. 그러나 일부의 선택은 달랐다. 경기지사 후보 심상정과 부산시장 후보 김석준은 이명박정권을 심판하는 야권연대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심과 민심이 서로 상충할 때 정치적 리더는 모종의 결단을 요구받는다. 심상정은 후보를 사퇴했고, 김석준은 민주당 김정길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끝까지 추진했다. 심상정과 김석준은 민심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고 당원들을 설득했지만 진보신당 지방선거 전선은 당 전략의 실패로 말미암아 선거 막판으로 가면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졌다.


야권연대의 요구는 한나라당과 야권의 1 대 1 구도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정후보의 개인기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급속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후보단일화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간 쌓아온 국민적 지지를 일거에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5+4’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거부한 정당으로 비판을 받았고, 초박빙 접전 끝에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한명숙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자 두 후보의 표차(2만6000표)보다 많은 14만 표를 얻은 노회찬 후보에게는 한나라당에 어부지리를 준 장본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물론 한국 정치에 진보세력의 씨앗을 뿌리려던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없지 않았으나 대중정치인으로서 노회찬은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중도에서 후보를 사퇴한 심상정후보는 또 다른 방향에서 비난을 받았다. 심상정후보는 독자 완주의 당론을 어겼다는 이유로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처지는 한 마디로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대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진보신당은 이후 진보대통합 논의로 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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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겐 미래가 없다 
    :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참패

 

 

 

 

2007년 대선은 노무현정권 심판 선거였다.


민주정부 10년 집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갈수록 고달파졌다. 서민들의 입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말이 쉽게 튀어나왔다. 기대를 배반하는 정치, 열망과 실망의 지겨운 싸이클이었다. 노무현은 권력을 쥐고서도 기득권층의 반발을 달래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고백해야 했다. 분양원가 공개는 스스로 나서서 반대했다. 시장권력, 관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 등 사회 권력들이 기승했다. 거시경제 지표를 관리해야 하는 국정 책임자의 중압 때문일까? ‘기업이 투자를 해야 일자리가 는다’는 시장의 협박에 밀렸다. 정치권력은 무기력했다. 비정규직은 갈수록 늘어났다. 시장권력에 맞설 노동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은 양극화에 속수무책이었다.

 

노무현 집권 후반기에 불만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잘못된 일은 모두 노무현 탓, 노무현 때리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보수언론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공격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라고 각을 세웠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노무현은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푸념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민주노동당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노무현정권을 진보로 치부하던 국민들은 진보세력 전체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억울했다. 원내교섭단체에서 배제되어 국정운영에 개입할 수 없었던 소수정당이 왜 정치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느냐?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의 대립 때문에 교착된 정치를 민주노동당에 묻는 건 분명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정당으로서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가 없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둔 민주노동당도 이미 기성 정당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으며 일약 3당으로 도약해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지난 3년간 대국민 정치활동을 평가받아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 때 20%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들으며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원내교섭단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성정치의 장벽 탓도 있었겠지만 민주노동당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한 석만 있어도 정치가 바뀔 것이라던 호언장담은 10석을 가지고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원내 정당이지만 원외의 재야 운동권과 무엇이 다른 지 원내 진보정당으로서의 효능감을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내 입성 이후 3년간 민주노동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탁월한 대중정치인을 배출해냈으며 이런 저력에 힘입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당 지지율 12%를 지켜냈다.

 

민주노동당에겐 2007년 대선이 반전의 기회였다. 일심회 사건, 북핵의 자위력 인정 발언 등으로 고립의 늪에 빠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을 구출할 수 있는 구명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배출해 낸 새로운 대중 정치인을 전면에 내세워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내 후보 경선과정에서 권영길후보가 자주파와 손잡으면서 변화된 당의 모습을 기대하던 민심은 정파 선거의 벽에 부딪혔다. 결선에서 혁신을 내세운 심상정후보는 통합을 내세운 권영길 후보에게 패했다. 52 대 48, 이 수치는 지난 당 대표 선거에서 문성현과 조승수가 얻은 표와 겹친다. 그때도 52 대 48이었다. 흔쾌하지 못한 결과였다.

 

5년 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고 묻던 권영길은 여전히 참신했다. 그러나 2007년은 달랐다. 이미 생물학적 나이도 70대로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마지막 선거였다. 경선 때부터 따라붙었던 대선 3수생이라는 꼬리표가 권영길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식상하다’는 것이었다.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들고 나왔지만 자주파라는 패권정파의 등에 업혀 민생문제와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코리아연방’과 같은 선거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오히려 당내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후보로 선출된 9월 이후 한 달간 선대위도 꾸리지 못하고 허송했다. 고질적인 정파 대립 구도로 당력 결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도 그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당 혁신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 전통적인 민주노동당 지지층은 문국현 후보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10% 득표를 목표로 내세웠다.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이명박후보가 고공 지지율을 보이면서 민주노동당 사표론이 먹혀들 여지도 적었던 선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정했다.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게 가차 없는 회초리를 들이댔다. 권영길후보는 문국현후보에게도 뒤지는 5위를 기록했고, 선거기간 중의 지지율인 5% 선조차 무너진 3.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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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북핵, 민주노동당을 흔들다.
    : 비핵화 강령이냐? 핵자위권 인정이냐? 내분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대한민국 지질자원 연구원이 감지한 리히터 규모 3.58의 지진파가 민주노동당을 흔들어 놓았다. 지진파의 진앙은 북한 함경북도 화대군이었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 지진파를 일으킨 1차 핵실험에 대해 “강위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갈망해온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커다란 고무와 기쁨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이다”라고 열에 들떠 고창했다. 민주노동당북한의 핵실험 발표 직후 의원대표단과 당대표, 최고위원이 참석하는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격론을 거친 끝에 “민주노동당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지지하고 평화군축 강령을 가진 정당”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것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강한 충격과 유감을 표명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덧붙여 “북의 핵실험 강행의 과정에서 미국이 취해온 대북 고립·압박 정책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주요 원인”이라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긴장과 대결국면을 조성한 일차적 책임은 미국의 적대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이 밝힌 “핵실험은 조선반도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최고위 논의에서 포함됐는데 김선동 사무총장이 대변인 발표에서는 삭제를 요구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북한 핵실험에 대한 주요 당직자들의 엇갈린 발언들은 당을 일대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용대 정책위 의장이 <민중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북미간 정치군사적 대결 국면인데 북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할 수 있느냐”며 “핵이 자위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강령에 반하는 ‘핵 자위권’ 인정 문제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10월 15일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특별 결의문’ 채택을 둘러싸고 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북핵 '반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측과 자위권 측면에서 북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측이 나뉘었다. 그러나 이즈음 민주노동당의 의결기구는 숙의가 배제된 다수파 의 다수결이 횡행했다. 최고위원회가 올린 ‘북핵 실험 유감’을 북핵 실험 ‘반대’로 바꿔야 한다는 소수파인 평등파의 수정안은 간단히 부결되었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자주파 측에서는 오히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북미 사이의 긴장과 대결이 북의 핵실험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로 수정안을 제출했다. 최고위원인 김선동 사무총장과 이용대 정책위 의장도 원안을 제출한 최고 지도부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수정안에 찬성표를 던져 가결시켰다. 자주파의 수정안은 미국 책임론만 강조되었고 북한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 삭제된 것이었다. 결국 평등파를 주축으로 한 중앙위원들이 반발하면서 퇴장했고 자주파의 수정안은 공식 채택되지 못했다. 중앙위가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하자 노회찬 의원은 이틀 후인 17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자위를 위해 개발했기 때문에 용인해야 한다고 한다면 일본의 핵 개발도 용인해야 하고 우리가 전술핵 배치에 반대했던 이유도 부정해야 한다”며 “북한 핵실험에 대해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달 31일 북한 조선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당 지도부가 방북하는 문제를 놓고도 당내에 찬반이 엇갈렸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방북은 그 정치적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다. 당연히 민주노동당과 남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공식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방북은 하되 문성현 대표가 ‘개인적’ 차원에서 북한 핵실험에 반대 뜻을 표하는 것으로 어정쩡하게 절충되었다. 다수파인 자주파는 북한의 2005년 미사일 발사에 대한 반핵 결의안도 무산시켰고, 북핵 실험 유감 표명조차 틀어막았으며, 대표단의 방북을 한가한 나들이로 만들어버렸다. 당 내에서는 다수파고 큰 소리를 내지만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국민들에게 납득할만한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불투명한 당의 이미지만 키워간 것이다. 북핵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지속적인 대북 포용 정책으로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현실 정치의 문법은 아직 민주노동당의 운동권 자주파에게는 요원한 것이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이 같은 혼선으로 당내의 반목과 불신은 더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이에 김종철 전 서울시장후보는 "북핵에 대해 단일한 슬로건으로 갈 수 없다면 미국을 규탄하는 쪽과 동아시아 핵무장을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서라도 진보진영이 의제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차라리 따로 따로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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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민주노총에서 금기어가 되어버린 ‘사회연대전략’
    : 노동운동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한 제안이 ‘정규직 책임론’을 강화한다고?

 

 

 

정규직 노동자가 나서서 연금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국민연금 보험료지원사업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에 의해 2006년 11월 10일 공식 제안되었다. 권 대표는 국회 본회의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사업장 가입자의 국민연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해 이것을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역 가입자들의 연금보험료를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 민주노동당은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양극화에 대한 대안으로 부유세를 비롯 사회복지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일방적인 주장과 요구에 그칠 뿐 양극화 추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이에 국가나 자본, 고소득층에 대한 일면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 스스로가 사회 연대적 실천방안을 스스로 찾아 나설 때 주장의 정당성과 진정성이 담보될 수 있다고 보고 정규직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서 논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권 대표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사업은 우리 노동운동에서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정규직 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이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비타협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어 사회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이 울산에서 참패한 가장 큰 이유가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 때문이었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말로만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냄으로써 당을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시선을 바꾸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민주노총의 고립이 곧 민주노동당의 고립이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사회연대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분석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 2천4백만명 중 공적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은 약 1천30여만명. 이를 방치할 경우 현재 빈곤이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월급 160만원 노동자가 매월 1,800원의 연금 보험료를 지원해 고소득층과 자본, 국가의 참여를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함으로써 연금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제도를 설계한 오건호 민주노동당 정책전문위원“민주노동당은 진정한 사회연대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이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노동자의 연대철학에 의거해 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기존의 ‘일면적 요구’에서 ‘참여를 기초로 한 요구’활동이 필요하고 이는 산별노조 시대와도 조응하는 활동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조형일 IT연맹 정책실장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불신에 대한 고민 속에서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라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타협과 양보, 참여는 노조에 금기단어였다. 민노당의 제안은 우리 운동의 전환과 관련해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김태현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은 "민주노총 정책담당자 회의에서 1차적으로 논의를 한 결과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고, 고윤남 사무금융연맹 정책기획국장도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한다. 처음 논의보다 현실화가 가능하도록 보완이 많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후보로 나선 모든 진영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할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함으로써 풀자는 취지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연대전략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자칫 ‘정규직 책임론’을 강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이들이 경계한 부분이었다. 연맹급 정책담당자들조차 "취지는 좋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식의 반신반의 상태였다. 갈 길이 멀어보였다.

 

민주노동당은 2006년 10월부터 노동조합과 당 지역위원회를 방문해 사업설명회를 추진했고 12월 21일에는 사회연대연금노동조합 대의원대회에서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 지지 결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운동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석행 민주노총 신임위원장이 문성현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민주노동당의 연금개혁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조직의 수장이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장벽에 부딪혔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전략’이 마치 ‘정규직 책임론’의 다른 이름인양 금기어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반발을 무릅쓰고 산하 단위노조에서 설명회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정치력이 민주노총 위원장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이 고심 끝에 내놓은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은 큰 기대를 모았으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공방을 넘어서지 못한 채 캐비넷 속에서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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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민주노동당 개방형 국민경선 불발
    :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민주노동당의 유일한 브랜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채택한 개방형 국민경선제도의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대선기획단장인 김선동 사무총장은 2006년 9월 29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대선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토론을 전개하기로 했다”며 완전 개방형 경선제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대선후보 선출방식에 관한 논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에서도 논의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상현 기관지 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직면한 어려움을 타개하고 일거에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원 이외의 후원자, 지지자, 연고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후보 선출 과정에 50만 이상의 일반 국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경선 과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선거인단 모집을 통해 50만 이상의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써 대선 승리의 조직적 토대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의 신임 이석행 위원장은 조직된 대중 백만이 참여하는 개방형 경선으로 진보진영이 쾌거를 이룩하자는 선거 공약을 진작에 내걸었다. 이렇듯 논의의 핵심은 개방형 국민경선제를 채택할 것인가 여부였다. 2007년 3월 11일 당대회에서 진성당원에 의한 직접 선출이라는 당헌 개정 여부로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개방형 국민경선제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파간 대결과 일심회 사건 등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어 있는 조건에서 50만을 참여시키겠다는 포부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국민 경선의 자발적 열기가 전혀 감지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집되는 선거인단 또한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정파 조직에 의해 ‘조직’된 선거인단이라면 대선후보 선출과정은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대중 단체에 조직을 갖고 있는 이들 간 세 과시의 각축장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 등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당이 자신의 정강 정책을 구현할 수 있는 공직 후보를 선출해 유권자에게 심판을 받는 것이 정당 조직 원리인데 공직 후보 선출을 비 정당원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정당 정치의 부정에 다름 아니라는 논리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토론을 거치며 당대회에 상정된 ‘개방형 후보 경선안’은 63.14%의 찬성에 그쳐 2/3를 넘기지 못함으로써 부결되었다. 그러나 당권을 쥐고 있던 측에서는 개방형 경선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중경선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를 관철시키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중앙위에서 승인을 얻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결국 민주노동당이 자랑하는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고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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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한미FTA 협상 개시
   : 민주노동당은 주권을 건 도박에 단호히 반대







2007년 초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가 만든 TV광고를 보면 대륙을 경영하던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웅혼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광고가 시작된다. “개척자 광개토대왕처럼, 해상왕 장보고처럼(물살을 가르는 배와 효과음이 보태진다) 우리 민족에겐 뜨거운 도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시장을 향한 우리의 끝없는 도전(기마부대가 미국 지도 위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새로운 기회입니다.(개척자 광개토대왕이 탄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처리된다. 마무리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세계와 경쟁합니다.”


노무현 행정부는 제조업에서는 중국에 추격을 당하고 있고 서비스업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에 열세인 ‘넛 크래커’ 상황으로 진단했다. 이에 금융서비스를 비롯한 생산자 서비스 분야의 강자인 미국과 FTA를 체결해 동북아 금융허브의 위치를 선점하자는 유혹에 빠져들어갔다. 노무현 행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은 ‘넛 크래커’론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뭐로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제조업을 경시하는 금융허브 논리는 실물경제와 유리된 거품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얼마 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증명되었다.


애초 한국 정부의 FTA 추진 로드맵에는 미국과의 FTA 체결은 중장기 과제로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인 전 대통령 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서 FTA 정책 결정과정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던 2005년 5월까지도 한국 정부에게 “미국은 맨 마지막” 체결 대상국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미국이 2006년에 들어서는 갑자기 한국의 최우선 FTA 협상국으로 부상했다. 2006년 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뜬금없이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2월 3일 한국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로버트 포트먼(Robert Portman)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함께 워싱턴의 미 의회 의사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한미FTA가 광개토대왕처럼 이른바 ‘경제영토’를 확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을 팔아넘기는 일인지 논란이 뜨거웠다. 정태인은 한미FTA의 전격 추진 배경에는 집권 3년차를 맞는 노무현 정권이 개혁 성과를 서둘려 내려는 조급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개혁이 당사자들의 거부로 실패하고, 대연정 제안이 한나라당의 거부로 실패하자 한미FTA라는 외부 충격에 의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자의 시선으로 봐도 그것은 위험천만한 문제였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받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이 지난 IMF식 개혁의 경험이었다. 한미FTA는 한편으로는 미국에 서비스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금융과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구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에 경제동맹까지 더해져 한미일 남방 3각동맹을 강화하는 구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북중러의 북방 3각동맹을 자극해 냉전으로 회귀할 가능성마저 점쳐지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미FTA가 무역수지 적자, 금융투기화와 종속,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질적 저하, 농업 말살,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 위기, 대미 군사안보 종속의 항구화 등 경제적으로나 군사안보적으로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 중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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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차떼기’와 정치개혁
     : 민주노동당, ‘오세훈법’으로 지구당 폐지라는 유탄을 맞다.






2003년 12월 26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가 삼성, LG, 현대차 등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집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불법 자금의 규모도 규모지만 대기업과 한나라당 간에 불법 자금을 전달하는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007 가방이나 쇼핑백에 만 원 권을 넣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쪽’ 이회창 후보의 모금은 달랐다. 거액의 돈을 실은 차를 통째로 넘기는 방식,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150억을 탑재한 현금수송차량 키를 전달하는 이른바 ‘턴 키’ 방식의 범죄행각은 마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수사를 지휘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은 823억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쪽은 120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혔고 정치인 30여명, 기업인 20여명을 기소했다.


이런 천문학적인 불법 정치자금이 동원되는 고비용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며 정치개혁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4당 합의에 따라 2003년 11월 13일 박세일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이하 정개협)가 출범했고 국회 정치개혁특위도 이런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오세훈법’이라고 하는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의 개정판이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은 ‘클린 정치’를 표방하며 정치관계법 개정을 집도했다.


그러나 오세훈이라는 집도의는 민주주의 정당정치에 대한 철학 자체가 부재한 돌팔이였다. 국회 정개특위는 “돈은 묶고 입은 풀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 불신’에 기초해 정치 자체를 ‘다운사이징’했다. 돈도 묶고 입도 묶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먹는 하마’로 낙인찍힌 지구당의 전면 폐지였다. 민주노동당과 같이 진성당원제로 운영하고 풀뿌리 주민운동과 깊이 결합하는 방식의 정당에게 지구당 폐지는 대중정당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소액 정치후원금 1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되게 한다거나 46석의 비례대표를 56석으로 늘리는 등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공간을 없애버리고 선거시기에도 합동유세를 배제해버림으로써 정치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해버렸다.


민주노동당은 정개협이 제안한 비례대표의 과감한 확대(100석)와 같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게 만드는 정치개혁에서는 소극적이면서 정치를 원내 정치로만, 명사 정치로만 한정하려는 ‘오세훈식 돌팔이 시술’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차떼기로 인한 정치권 전반의 불신 여론은 정치의 축소에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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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 ‘2군 후보’ 선수가 본선 무대에 올라 국민을 놀라게 하다

 

 

 

 

2002년 3회 지방선거에서 일약 3당으로 올라선 민주노동당은 쾌속 항진을 계속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대선후보 방송 토론에 진출했다. 5년 전 국민승리21 대선후보로 나서 2군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별 존재감도 없이 뛰던 권영길 후보가 당당히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이다.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소박한 물음은 권영길 후보가 방송토론에서 선보인 말이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는 것을 권영길 후보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양 쪽에 놓고 권영길 후보는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이며 민주당은 ‘부패 신장개업당’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부유세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가뭄의 단비 같은 공약을 쏟아내며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국민들의 귀에 쏙쏙 들어가게 설명할 수 있었다. 평소 제도 언론에서는 잘 눈에 띄지도 않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방송토론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었다. 동료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선 전 9월 5일 1.7%의 지지율이 선거 직전 12월 15일에는 4.7%로 뛰어올랐다. 양강 구도의 틈바구니에서조차 권영길 후보의 지지율은 쑥쑥 자라고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30만 표로 좌절했던 기억을 깨끗이 씻어내고 100만표 돌파는 무난해 보였다. 그러나 최종 득표는 3.9%인 95만7,148표. 100만 표의 벽을 넘지 못했다.

 

16대 대선 투표 직전에 정몽준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 선언이 있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낙승을 예상하던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유시민은 12월 19일 0시 50분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다. “노무현의 승리를 예상하고 권영길에게 표를 주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거 노무현으로 돌아 설 것입니다. 이 사태로 인해 권 후보 득표율은 여론조사 지지도의 절반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근원이 쓴 <아빠의 현대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주에 사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J씨는 이름난 노동운동가이고, 한때 혁명을 꿈꾸는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12월 18일 밤 10시 정몽준이 노무현과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잠을 설쳤다. 결국 그는 집사람과 함께 투표장에서 노무현을 선택했다. 그리곤 민주노동당에서 재정 마련을 위해 조직한 선거 참관인을 했다. 이 하나의 장면이 2002년 대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뒷날 조사해 보니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서 36.8%가 권영길을, 47.4%가 노무현을 찍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른바 소신투표(선호투표)와 전략투표의 딜레마였다.

 

권영길 선거 캠페인을 하던 이들도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을까 싶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던 많은 장면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진보적인 인사들 내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대선 결선투표제가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1차 투표에서는 소신투표를 하고 결선투표에서는 전략투표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갈등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갈등하고 결국 반목하는 만드는 것은 결국 제도의 불비 때문이다. 원래 제도화란 이런 국민들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두 번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추가로 든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선진국인 프랑스가 왜 그런 비용을 치르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비용을 아낀 결과는 국민들이 원치 않는 정치적 결과를 보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40조에 이르는 자원외교 혈세 탕진 같은 경제적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불비한 제도를 탓할 수 없었다. 권영길 후보는 동요하는 동료시민들에게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르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행복해지는 걸 두려워 말라고 호소했다. 비록 절반의 표를 도둑질 당했지만 100표에 근접한 성공을 거둔 민주노동당은 대선 이후 괄목상대할 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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