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우의 한 컷 만화/[진보정당 STORY]'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5.10.14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100. 통합진보당의 내파(內破)
  2. 2015.10.02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9. 4.11 총선 야권연대 패배
  3. 2015.10.0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8. ‘나는 꼼수다’ 열풍
  4. 2015.09.24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7. 오세훈의 자살골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5. 2015.09.18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6. 진보대통합 추진
  6. 2015.09.15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5. 심상정 당기위에 제소되다
  7. 2015.09.1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4. 야권연대로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
  8. 2015.09.09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3.노무현대통령의 죽음과 [진보의 미래]
  9. 2015.09.08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2. 성깔 있는 칼라TV
  10. 2015.09.0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1. 아! 민주노동당 분당
  11. 2015.08.3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90.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겐 미래가 없다
  12. 2015.08.26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9. 북핵, 민주노동당을 흔들다.
  13. 2015.08.24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8.민주노총에서 금기어가 되어버린 ‘사회연대전략’
  14. 2015.08.18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7. 민주노동당 개방형 국민경선 불발
  15. 2015.08.17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86.‘일심회’ 사건의 불똥이 민주노동당에 옮겨 붙다.
  16. 2015.08.12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5.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17. 2015.08.10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84. 노무현 연정
  18. 2015.07.28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3. 한미FTA 협상 개시
  19. 2015.07.27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2. 스크린쿼터 73일 시대
  20. 2015.07.2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1. ‘늙은 너구리’ 잡은 심상정
  21. 2015.07.17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0. 정파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 민주노동당
  22. 2015.07.15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9. 민주노동당, 당내 독립언론의 성장과 갈등
  23. 2015.07.14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8. 민주노동당, 국가보안법 폐지 ‘올인’
  24. 2015.07.13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7. 당직과 공직은 겸직할 수 없다?
  25. 2015.07.10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6. 의사당의 낯선 손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
  26. 2015.07.09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5. “이 자리에 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27. 2015.07.08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4. 2004년 4월 총선과 탄핵 반대 열풍
  28. 2015.07.06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2. ‘차떼기’와 정치개혁
  29. 2015.07.02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1. “부자에게 세금을!”
  30. 2015.07.01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70. 민주노동당, 노동자, 농민의 정당으로 우뚝 서다

100. 통합진보당의 내파(內破)

      :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중앙위 폭력사태


 








2012년 4.11 총선이 끝나자마자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 시비로 수렁에 빠져들었다. 시민사회의 외부 인사를 영입한 개방형 명부를 제외한 나머지 경쟁 명부 비례대표 순번은 당원 투표로 결정되었다. 다른 정당에 비해 높은 수준의 당내 민주주의를 제도화 한 정당이 통합진보당이었으나 과도한 정파 경쟁과 부실한 선거관리가 화근이었다.


총선 비례후보 부정 경선 시비는 선출과정에서부터 불거졌다. 그러나 선거가 워낙 임박해 있는 상황이어서 진상조사를 선거 이후로 미룬 채 선거를 치렀다. 총선 후 진상조사를 통해 비례후보의 귀책사유나 순번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문제가 드러나면 의원직 사퇴를 포함해 책임진다는 전제하에서 비례후보 선출에 관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자료를 모두 봉인하고 부정투표 논란 진상조사가 끝날 때까지 보관하기로 했다.


그것은 당을 내파시킨 시한폭탄이었다. 선거가 끝난 직후 4월 12일 통합진보당 제27차 공동대표단 회의 결정에 따라 조준호 공동대표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착수했다. 5월 2일 발표된 진상 조사 결론은 ‘총체적 부실/부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성 정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할 것으로 기대했던 진보정당에서 부정경선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통합진보당은 혼란에 빠졌고 국민 여론도 악화되었다. 국회라는 국민의 대의 기관에 파견할 대표가 부실, 부정 경선을 통해 선출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당 내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인 비례 1번 윤금순 당선자는 5월 4일 “비례대표 경선 파문으로 국민 여러분들께 실망과 걱정을 끼쳐 매우 송구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비례대표 당선자로서 함께 책임을 지겠다”고 밝히고 사퇴했다. 이튿날인 5월 5일 통합진보당은 전국 운영위원회를 개최해 부정 경선 파문의 수습책으로 당 지도부와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에게 동반사퇴를 권고하기로 의결했다.

 

러나 비례 2번인 이석기 당선자와 비례 3번 청년 비례대표 김재연 당선자는 사퇴를 거부했고, 이정희 공동대표를 비롯한 이른바 ‘당권파’들은 진상조사 보고서 자체가 부실하다며 엄밀한 재조사를 요구했다. 사퇴를 권고한 전국 운영위원회의 문제의식은 설령 당선자들이 직접 부정경선에 관여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당의 선거관리가 부실했고 일부에서 저질러진 부정에 대해서는 ‘읍참마속’ 방식으로 국민을 향해 정치적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당권파는 비례후보의 귀책사유나 순번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문제였는지 불명확한 채 사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상조사단의 판단은 대리투표와 동일 IP 중복투표 등이 광범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분명한 무효표를 유효표로 처리한 경우, 선관위원이나 참관인이 입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표하는 등의 투개표 관리의 부실만으로도 투표 결과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전국 운영위의 사퇴 권고 전에 스스로 거취를 깨끗하게 결정해 버린 비례 1번 윤순금 당선자의 사퇴는 당권파의 주장을 무색케 했다.


이정희 공동대표를 비롯한 당권파가 진상조사 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파문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당권파는 부정경선에 대한 당의 대국민 사과 문제를 당권을 둘러싼 경쟁구도인양 프레임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당을 희생시키는 또 다른 패권주의적 태도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렇듯 부정 경선에 대한 사후 처리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자 언론은 유례없이 많은 보도를 매일 토해내며 통합진보당을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못하는 정당이라고 비판했고 여론은 통합진보당에 빠르게 등을 돌렸다.


이런 가운데 5월 12일 개최된 중앙위는 당권파에 의한 조직적 의사 방해와 폭력으로 얼룩졌다. 진보정당 초유의 사태였다. 쟁점 논의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정회가 선언되었으나 이튿날 전자회의를 속개해 비례대표 사퇴 결의안을 가결하고 강기갑 원내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대표단은 총사퇴했다. 그러나 당권파는 속개된 전자회의가 무효라고 주장했고, 이석기, 김재연 당선자 또한 사퇴를 거부함으로써 갈등은 지속되었다. 민주노총은 5월 17일 중집에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을 염두에 둔 ‘조건부 지지 철회’ 결정을 내렸다. 통합진보당 혁신의 시금석이 두 의원 제명이라는 뜻이었다.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당기위는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거부한 이석기, 김재연 의원과 비례후보였던 조윤숙, 황선 당원을 제명 결정했고 6월 29일 중앙당기위원회는 제명 결정에 반발한 피제소인들의 이의신청을 기각해 최종적으로 제명 처리했다. 중앙당기위는 “진상조사 과정에 일부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된 비례대표 후보 선거는 정당성과 신뢰성을 잃었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며 이를 근거로 전국운영위와 중앙위가 ‘순위경쟁명부 비례 당선자와 후보자 총사퇴’를 결정한 건 당의 합당한 결정이며 당원이라면 거역할 수 없는 당명”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현직 국회의원은 정당법 제33조에 따라 의원총회를 거쳐 당 소속 국회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제명해야 법적인 의미의 제명이 완료된다. 통합진보당 의원총회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은 셈이었다.


당권파와 혁신파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7월 15일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서 혁신파를 대표하는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강기갑대표는 혁신을 바라는 당심과 민심이 다르지 않다며 중단 없는 혁신을 선언했다. 강기갑 대표는 당원 총투표에 자신의 거취를 맡기겠다던 두 의원이 대승적으로 결단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두 의원은 자신들에 대한 사퇴 요구가 부당한 공격이라며 요지부동이었다. 설득과 호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실탄은 딱 한 발, 의원 총회에서 두 의원을 제명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7월 26일 개최된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김제남 의원이 기권하면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이 부결되었다. 이로써 통합진보당 자력에 의한 혁신은 물 건너 가버렸다.


8월 14일 민주노총도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장장 10시간의 격론 끝에 그간의 배타적 지지를 완전히 거두어 들였다. 통합진보당 진성당원 7만5000여 명 가운데 3만5000여 명이 민주노총 조합원이었으니 민주노총의 지지 철회는 통합진보당 최대의 지지기반을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이어서 농어민, 빈민의 지지 철회가 이어지며 통합진보당의 조직 기반은 허물어졌으며 민주당 또한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파기했다. 연말 대선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통합진보당의 이 같은 장기 파행은 야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새누리당에게 좋은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물과 소금까지 끊는 단식을 통해 마지막 호소를 하던 강기갑대표도 9월 10일 “이제 지푸라기 같은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끊어져 버리고 분당이라는 산사태가 덮쳐오는 이 순간, 쓰라린 분열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진보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임을 잘 안다”고 밝히며 혁신모임의 신당 창당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고 자신은 통합진보당 탈당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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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4.11 총선 야권연대 패배

    :통합진보당은 17대 민주노동당보다 낮은 10.3% 득표

 

 

 

 

 

 

 

2012년 4.11 총선은 새누리당을 과반 의석에서 밀어내고 야권이 정국 주도권을 쥐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와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는 2012년 3월 10일 선거연대에 합의했다.

 

그러나 야권연대는 불완전한 이었다. 선거연대 논의에서 빠진 진보신당이 독자 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사단은 경남에서 났다. 창원을에서 손석형이 명분 없이 도의원을 중도 사퇴하고 통합진보당 후보로 총선 출마를 강행하면서 진보신당과의 경남지역 선거연대 논의가 꼬였다. 진보정당의 대중적 기반인 노동세력도 분열했다. 이런 갈등은 창원갑 문성현 후보, 거제 김한주 진보신당 후보 등 경남 전역에, 심지어 울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통합진보당 내부에서는 여전히 특정 정파의 패권적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며 당원 사기를 떨어뜨리고, 노동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일들이 속출했다. 일례로 울산에서는 북구의 터주 조승수 현역 지역구 의원을 남구로 날려버리고 그 자리에 김창현 전 동구청장을 꽂는가 하면 동구에서는 이은주 도의원이 중도 사퇴해 총선후보로 출마하면서 비호감으로 낙인찍혔다. 당 내 이른바 ‘울산연합세력’의 패권적 행태에 노동현장은 싸늘하게 식었다. 결국 진보정치 1번지라는 울산과 창원에서 진보정당 후보들은 공멸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비례후보 경선 과정의 부정 의혹과 이정희대표의 관악을 여론조사 조작 문자 파동, 성남중원 성추행 의혹 후보 교체 등 패권정파의 과도한 욕심이 빚어낸 악재들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율은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통합진보당은 지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13% 득표율에도 못 미치는 10.3%로 주저앉았다. 야권연대로 얻은 지역구 7석이 그나마 체면을 세워 주었으나 총 13석에 그쳐 원내교섭단체라는 야심찬 목표도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통합당도 127석에 그쳐 통합진보당을 포함해 야권 의석을 다 합쳐도 140석에 불과했다. 반면 152석을 얻은 새누리당은 과반 의석을 고수했다. 이후 자유선진당까지 흡수해 의석수는 157석으로 늘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던 반MB의 거센 파도를 붉은 색의 ‘새누리당’으로 갈아입은 박근혜 대표체제가 성공적으로 물리친 것이다. 지방선거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승승장구해 오던 야권연대는 꺾였다.

 

야권의 패배는 변신에 성공한 새누리당의 승리라는 측면보다 야권연대 말고는 보여준 게 없는 야권의 패배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사실 10.26 보궐선거도 엄밀히 말하면 박원순의 승리였지 민주당은 외면당한 선거였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시민사회세력을 수혈해 민주통합당으로 덩치만 부풀렸지 야권을 지지하는 유권자를 사로잡을만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천 과정의 불투명성, 후보 자질 시비 등 구태를 반복함으로써 야권 지지자들을 등 돌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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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나는 꼼수다’ 열풍
    : “쫄지마! 시바”

  

 

2011년 안철수 ‘현상’과 함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은 ‘나꼼수 현상’이었다. 스마트폰 대량 보급을 통해 모바일 생태계가 만들어지면서 정보 소비와 유통 방식도 달라졌다. 수동적인 정보 수용자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생산했다. ‘소셜 미디어시대의 새로운 저널리즘’으로서 팟캐스트가 대안 미디어로 각광을 받았고, 이 중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라는 팟캐스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졸라’와 ‘쫄지마 시바’를 연발하며 금기와 성역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비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가카(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이라고 비틀어 표방한 ‘나꼼수’ 열풍은 놀라운 것이었다.

 

여기에는 공중파에 대한 불신이 큰 역할을 했다. 이명박 정권에 의해 KBS, MBC, YTN 경영진이 장악되었고, 공정방송을 지키려던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났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아이템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손석희, 정관용, 김제동, 김미화, 윤도현 같이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는 쫓겨났다. 권력이 말길을 막은 것이다. ‘나꼼수’는 국민 2천만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SNS시대에 생겨난 새로운 말길이었다. 나꼼수 청취자들은 ‘기존 언론이 전하지 않는 부분을 보도하기 때문’에 나꼼수를 듣는다고 대답했다. 2011년 12월 1일, MBN이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59세 이하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언론에 대한 신뢰도> 측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꼼수의 신뢰도는 40%로, 조중동 17.2%를 두 배 이상 앞섰다. 나꼼수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선관위 디도스 공격’으로 알려있던 걸 파고들어 여당 소행이라는 걸 밝혀낸 것 뿐 만 아니라 이명박의 내곡동 사저 의혹을 처음 터뜨리는 등 특종 제조기로서 저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되자 나꼼수가 터뜨린 특종을 제도 언론이 받아서 보도하는 현상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대안 미디어가 기성 미디어를 이끄는 상황이었다. 나꼼수의 참다운 미덕은 강한 오락성을 가진 본격적인 정치토론 방송이라는 점이었다. 정치는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갖고 참여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나꼼수의 역할은 비할 바 없이 컸다.


나꼼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양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2011년 12월 29일 서울에서 열린 나꼼수 콘서트는 ‘폭로 저널리즘’으로 공격받았다. 이명박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는 ‘에리카 김’의 녹취록 공개와 혼외자녀를 암시하는 ‘눈 찢어진 아이’에 관한 언급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근거도 불명확한 ‘그 아이’가 입을 인권 침해 요소를 걸러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꼼수 스스로 주류문화에 도전하는 B급 문화임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주류문화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면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민주통합당이 나꼼수 효과를 이용해 나꼼수 프로듀서 김용민을 정봉주 전 의원의 지역구인 노원을구에 전략 공천한 것은 오히려 민주통합당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어버렸다. 보수진영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김용민의 과거 막말 전력을 폭로하면서 공격했다.

 

그간 나꼼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보수진영이 문화적 탈권위시대로 진입이 지체되어 있던 한국 정치의 허위의식을 십분 활용하면서 융단폭격을 퍼부어댔다. 나꼼수는 온라인에서 강력한 매니아층을 결집시키긴 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정치적 보수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꼼수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라기보다 나꼼수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야당 정치의 무능과 무기력의 문제였다. 나꼼수는 2012년 12월 19일 대선을 하루 앞두고 “미래를 위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투표해 달라. 아는 이들 모두에게 이번만은 투표해 달라고 하라”는 마지막 방송을 내보내고 막을 내렸다. 나꼼수의 영향은 그 후로도 정치 시사 팟캐스트가 만개하는 토양을 제공했으며 역설적으로는 보수적 종합편성채널까지 나꼼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보수적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시사프로그램을 양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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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오세훈의 자살골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 안철수 현상, 한국 정치 태풍의 눈으로 성장하다

 

 

 

 

 

이명박 정권 4년간의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시민들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투표로 심판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747’ 선거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불, 7대 경제 강국)으로 권력을 거머쥔 이명박 정권이 지난 4년 간 한 일은 한마디로 서민 주머니를 털어 부자 곳간을 채워준 것이었다. 게다가 4대강 사업 등 각종 토건사업에 혈세를 쏟아 부어 국고를 탕진했다. 부족한 세수는 부가세나 유류세를 올리는 수법처럼 서민 증세로 메웠다. 부자는 감세, 서민은 증세였다.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연말이면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때처럼 세금 징수액을 할당해 자영업자들을 쥐어짰다. 심지어 반려동물 치료에까지 부가세를 매기는 등 꼼꼼히 수탈해갔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의 위력을 확인한 야권도 전열을 정비하고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1년 10월 26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야권이 기세를 올리는 신호탄이었다.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복지 포퓰리즘’이라며 맹공을 퍼붓고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거는 만용을 부렸다가 패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간에서 야권이 결집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이는 안철수였다. ‘청춘콘서트’로 전국을 돌며 바람을 일으키던 안철수가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후보로 떠올랐다. 더불어 ‘참여연대’와 ‘희망제작소’ 등을 통해 시민운동의 리더로 이름을 떨치던 박원순도 출사표를 던졌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인 ‘V3’를 무료로 배포하며 공익적 가치를 추구해온 안철수가 가진 힘은 막강했다. 그러나 그가 드러내 보인 정치관은 고대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인 정치’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기성 정치인들의 ‘갈등의 정치’는 백신을 통해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었고, 기술관료 전문가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솔루션’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안철수의 정치관에는 반(反)정치의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대안을 두고 경쟁하지 않았던 기성 정치세력이 안철수의 전문가 정치를 비판할 힘은 별로 없었다. 안철수는 심지어 박원순에게 후보 자리를 ‘쿨하게’ 양보함으로써 자리를 탐하기보다 대의에 복무하는 감동 정치까지 연출했다. 기성 정치세력은 모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의 후광까지 업게 된 박원순의 지지율은 크게 뛰어올라 한나라당 나경원 시장후보를 앞섰다. 그러나 제 1 야당이라는 민주당이 서울시장에 후보도 출마시키지 않고 찌그러져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무소속 전문가 정치에 눌려 정당정치가 숨죽이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박영선 의원, 민주노동당에서는 최규엽을 후보로 내세워 박원순과 범야권 단일화 경선을 치렀다. 시민들은 제 1 야당 후보를 젖히고 시민후보를 선택했다. 시민후보로 범야권 단일후보가 된 박원순은 강남3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압도해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10.26보선은 안철수 현상의 자장 안에서 치러진 선거였으며 반MB와 반정치의 거세 바람 앞에 야당을 포함한 기성정치가 맥을 못 춘 사건이었다. 비록 제 1 야당이라 하더라도 매력적인 대안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한 쉽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폭발하기 시작한 안철수 현상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안철수는 꿈을 잃어버린 청년들과 소통하며 진영을 넘어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는 지도자의 강림으로 받아들여졌다. 87년 체제의 낡은 대립구도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안철수 현상으로 분출했다. 박근혜 대세론도 꺾일 정도였으며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걸지 않으면 안되었다. 2012년 대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슬로건이 채택되는 배경이 그것이다. 안철수라는 개인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대표할 정도의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지각 밑에 꿈틀대는 마그마 같은 거대한 사회적 잠재의식이 안철수라는 화산을 통해 분출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 때 그것은 진보정당의 것이었다. 부유세를 주장하고 나온 민주노동당이 대표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구호를 들고 나왔을 때 대중들은 진보정당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 거기에 호응했다. 그러나 진보정당은 종파적 삽질로 스스로 분화구를 막았고, 종북 딱지가 붙으며 이내 닫혀버렸다.

 

다른 한편 안철수 현상은 기성정치에 대한 부정, 정당정치의 부정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의 짙은 그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에 있다. 그리고 현대적 정치는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 계급, 계층의 요구를 대표하는 조직화된 정당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소위 ‘인민주권’은 민주주의의 확장으로부터 나오고 민주주의의 확장은 정당 정치의 활성화로부터 나오는 이다. 그러나 보수만 과대 대표된 한국정당체제는 이런 대중의 요구를 봉쇄하거나 왜곡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안철수현상은 이런 정치를 바꾸자는 것이긴 했지만 소외된 사회세력을 대표하는 강한 정당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문제의식 보다는 공공선을 지향하는 ‘전문가’ 정치를 지향했다. 안철수는 이후 의원 정수 축소나 기초단체 정당공천 배제와 같은 반정치적 담론을 퍼뜨리는 진원지가 되어 정치 축소에서 이익을 얻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본의 아니게 복무하게 되는 역설이 빚어졌다. 그럼에도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현상’은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으로 그 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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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진보대통합 추진

: 멀고도 험난했던 진보대통합 정당 건설의 길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야권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노사모를 이끌었던 문성근씨는 백만민란’이름으로 야권의 대통합을 추진했고,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진보의 대합창’이라는 아래로부터 진보 대통합 운동이 추진되었다. 야권연대로는 각 정당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다가오는 2012년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1 대 1로 맞붙으려면 진보, 개혁 정당들이 ‘빅텐트’를 쳐서 하나의 연합 정당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취지로 ‘백만민란’운동이 추진되었으며 촛불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정당들이 선거를 위해 연대할 수는 있어도 하나의 당으로 모여야 한다는 주장은 진보정당들로서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빅텐트’는 진보정당의 독자적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결국 제 1 야당인 민주당이 주도하는 정당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수혈론으로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만민란’과 달리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야전사령탑으로 활약했던 참여연대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은 흩어진 진보정당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선결과제로 보고 아래로부터 진보대통합을 위해 ‘진보의 대합창’ 운동을 제안했다. 민주노총 또한 진보통합을 위한 10만 조합원 선언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지방선거 직전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대표들은 ‘진보대통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진보신당은 노회찬 전 대표를 새로운 진보정당건설을 위한 추진위원장으로 임명해 통합 협상에 나섰고 민주노동당은 강기갑의원을 진보정치대통합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선임해 통합 협상에 나섰다. 2011년 1월 20일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1차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공식 논의를 시작해 그해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가 통합을 선언하기 까지 거의 1년이 걸린 통합 작업은 숱한 곡절을 겪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는 통합진보정당이 ‘도로 민노당’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것은 통합 수임기구가 민주노동당 분당의 원인이 되었던 ‘패권문제’와 ‘북한에 대한 독자성’을 명확히 합의문에 박아 넣어야 한다는 요구로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측도 패권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충분히 표명했으며 북핵 문제 등에 대한 표현에서도 진보신당측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식으로 문서를 정리했다. 2011년 6월 1일 밤샘 회의 끝에 연석회의 최종합의문이 통과됐다. 연석회의 내에 뜨거운 쟁점이었던 북한 관련 항목은 “6.15 정신에 따라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북의 권력 승계 문제는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견해를 존중한다”는 문구로 합의됐다.


그런데 6월 7일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참여당이 연석회의 합의문에 찬성하면 진보대통합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힌 반면,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참여당의 과거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성찰을 강조했다. 당시 진중권씨 등의 지식인들은 국민참여당과 함께 하는 것이 진보의 외연을 확장하고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드러났던 패권을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길이라며 환영하는 입장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국민참여당이 과거 노무현정권에 몸 담은 이들이 주도하는 정당이므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명확한 반성적 성찰 없이 함께 하는 건 곤란하다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 국민참여당은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 노동유연화 정책 등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 진보신당이 요구했던 반성적 성찰을 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원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참여당의 이같은 반성에 대해 75.6%가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국민참여당까지 포함하는 통합에 72%가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당원 1015명 대상 전화면접 여론조사 결과) 그러나 진보신당 내부에서는 여전히 부정적 기류가 가시지 않았으며 대의원대회에서 통합진보정당에 대한 찬성의견이 54.14%에 그쳐 가결 정족수인 2/3를 넘지 못하고 부결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통합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라는 조직을 별도로 구성해 진보대통합의 동력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2011년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가 통합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1년 12월 5일 통합정당 수임기관 합동회의에서 당명을 '통합진보당'으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 각 당 대표인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이 공동대표, 강기갑이 원내대표를 맡기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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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심상정 당기위에 제소되다
   : 독자노선과 연합노선의 갈등 표면화 하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의 실패는 ‘연합노선’과 ‘독자노선’ 사이의 동요로부터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지방선거 판은 촛불민심이 이미 결정지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권 단일후보로 한나라당을 낙선시켜야 한다는 것. 이런 구조 안에서 진보신당이라는 행위자의 활동반경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반MB연대’를 기조로 일관되게 ‘연합노선’을 취했던 민주노동당이 기초단체장 3명을 포함, 광역·기초의원 136명을 당선시켜 큰 성과를 거둔데 반해 선거 후반에 ‘5+4’ 야권연대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독자노선’으로 기울었던 진보신당은 명분과 실리 모두를 잃고 패배했다.


진보신당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지방선거 평가를 준비했다. 선거 직후 6월 19일 전국위원회에서는 '지방선거 평가와 진단을 위한 토론문'과 '지방선거에서의 해당행위에 관한 특별결의문(안)' 안건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그러나 평가와 진단보다는 당의 ‘독자 완주’ 방침을 어기고 야권연대에 응해 사퇴한 이들을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과 없이 터져 나오며 차분한 복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징계결의안은 부결되었으나 일부 당원들이 심상정을 경기도당 당기위 제소했고 당기위는 1심에서 1년간 당권 정지를 선고했다. 당기위는 심상정후보의 사퇴 ‘절차’의 적절성만을 두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상정의 후보 사퇴는 ‘정치적 행위’로서 당기위 제소 같은 ‘사법적 심판’으로 좁혀 놓아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심상정은 이의신청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결단과 문제제기가 당의 지방선거 선거방침과 향후 당의 진로에 대한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이 문제에 대해 전당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 당이 변화해야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보적이지만 정치적이지 못하면 정당으로서 성공하기 어렵고, 국민들로부터 힘을 얻지 못하면 우리 당은 민중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능동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밖으로부터 변화를 강제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길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의 소신에 따른 정치적 행위가 당원들의 활발한 토론 속에 엄중하고 진취적으로 평가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징계 근거로 제시된 당론위배 결정으로 인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당적 논의가 위축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심상정의 이의신청은 ‘연합노선’과 ‘독자노선’에 관한 토론의 계기였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 독자적 진보정당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전술로서 연합정치를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후 진보신당은 진보대통합 논의 과정에서 ‘연합정치’를 수용하는 다수 당원들의 여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상정은 중앙당 당기위 2심에서 ‘경고’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이미 복권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상정은 진보정당이 ‘진보적이지만 정치적이지 못하면 정당으로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때 정치적이란 말은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 결과물을 성과 있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막스베버가 말한 ‘신념 윤리’를 바탕으로 하되 ‘책임 윤리’를 자각한 정치인의 자질이었다. 심상정 뿐만 아니라 부산시장후보로서 야권연대를 끝까지 성사시키고 사퇴한 김석준의 경우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유권자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대중이 원하는 것과 당의 미래를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딴지일보’의 김어준은 심상정의 사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난 그때(심상정이 경기도지사 후보직을 사퇴한 때)가 바로 대중정치인 심상정이 탄생한 첫 순간이라고 생각해.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에게 결여된 게 바로 그거거든. 조직의 논리와 정서에 매몰되어 정작 조직 바깥 대중이 원하는 것과는 광년 단위로 멀어져갈 때, 그래서 조직의 요구와 대중의 필요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을 때, 조직의 이념이나 정파의 노선보다 대중의 마음을 우선으로 읽어낼 줄 아는 정서적 통찰력, 그 감성과 직관의 대중적 소통 능력, 그리고 그걸 스스로 결정하는, 단독자로서의 정치적 에고, 그런 게 절대 부족하다고... (진보 진영은) 스스로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적 소명을 조직과 조직의 합의로부터 할당받아서는 자발적 권력의지가 거세된 조직원으로 활동한다고... 심상정의 사퇴를 사망이 아니라 탄생이라고 한 건... 25년 노동운동 끝에 조직의 조합원이 아니라 정치적 단독자를 선언한 최초의 순간이었으니까[닥치고 정치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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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야권연대로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
   : 전략의 승리와 전략의 패배





2010년 지방선거는 진보양당체제 하에서 진보정당 대표선수를 가리는 최초의 진검승부처였다. 진보신당민주노동당을 ‘진보하지 않는 진보’로 규정하고 민주노동당을 넘어 대표 진보정당으로 나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 또한 내부 혁신을 통해 민생정당의 면모를 강화했다. 광우병 촛불집회를 거치며 이정희와 강기갑이라는 대중적 진보정치인을 키워낸 것이 민주노동당의 저력이었다.


노회찬, 심상정 같은 국민적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보유하고 있는 진보신당은 광역단체장 선거를 중심에 두고 정당 득표율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었고, 권영길, 이정희, 강기갑 등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있던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와 기초의회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는 전략이었다.


이명박정권에 대한 심판 선거로 치러진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최초로 본격적인 야권연대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5+4’라는 야권연대 테이블에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4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야권 단일후보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다. 그에 반해 진보신당은 기초 보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비중을 두고 있었으므로 광역단체 어느 한 곳도 보장되지 않는 야권연대 협상은 일종의 계륵 같은 것이었다.


진보신당의 노회찬이나 심상정 등은 광역단체장 후보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정당 지지율이 떠받쳐주지 않는 조건에서 후보만으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야권연대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야권 단일후보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제 1야당인 민주당은 그럴 의사도, 정치적 조정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의 ‘진보연대’를 통해 우선 진보후보 단일화라는 사전 과정을 거쳐서 진보진영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던 노력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초를 중심으로 판을 짜던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진보연대 보다 더 큰 야권연대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굳이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득표력 있는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부담스러웠던 민주당은 민주노동당을 지렛대로 진보신당 후보를 야권연대 틀 안에서 누르고자 했다. 진보신당과 진보 대표 정당을 두고 겨루는 입장에서 선거 이후 ‘누가 진보대통합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봤을 때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파괴력이 커지는 건 민주노동당에 달가운 게 아니었다.


진보신당으로서는 보병전보다 고공전에 유리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광역단체장 후보 방송토론회 등으로 진보신당 인지도와 지지도를 끌어올리면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민주노동당을 넘어서는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야권연대’라는 격랑 앞에서 후보 사퇴 압력에 시달릴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주관적 전략에 불과했다. 심상정이 후보 수락 이전에 기초단체장(고양시장) 후보로 나서는 문제까지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광역단체장 중심 후보 전략을 추진하던 중앙당 방침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심상정은 경기지사 후보로 나섰다. 부산에서는 김석준, 울산에서는 노옥희, 대구에서는 조명래, 광주 윤난실, 전북 염경석 등이 광역단체장후보로 나섰다. 노회찬 대표는 서울시장후보로 출마해 최전선에 섰다.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은 광역의원 24명, 기초단체장 3명, 기초의원 115명을 당선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22명에 불과했다. 기초 중심의 민주노동당 전략은 성공했고, 풀뿌리 기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 중심의 광역단체장 후보 전략을 구사했던 진보신당은 실패했다. ‘5+4’ 협상에서 우왕좌왕하던 진보신당은 결국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오며 독자완주라는 독배를 들었다. 그러나 일부의 선택은 달랐다. 경기지사 후보 심상정과 부산시장 후보 김석준은 이명박정권을 심판하는 야권연대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심과 민심이 서로 상충할 때 정치적 리더는 모종의 결단을 요구받는다. 심상정은 후보를 사퇴했고, 김석준은 민주당 김정길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끝까지 추진했다. 심상정과 김석준은 민심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고 당원들을 설득했지만 진보신당 지방선거 전선은 당 전략의 실패로 말미암아 선거 막판으로 가면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졌다.


야권연대의 요구는 한나라당과 야권의 1 대 1 구도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정후보의 개인기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급속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후보단일화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간 쌓아온 국민적 지지를 일거에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5+4’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거부한 정당으로 비판을 받았고, 초박빙 접전 끝에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한명숙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자 두 후보의 표차(2만6000표)보다 많은 14만 표를 얻은 노회찬 후보에게는 한나라당에 어부지리를 준 장본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물론 한국 정치에 진보세력의 씨앗을 뿌리려던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없지 않았으나 대중정치인으로서 노회찬은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중도에서 후보를 사퇴한 심상정후보는 또 다른 방향에서 비난을 받았다. 심상정후보는 독자 완주의 당론을 어겼다는 이유로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처지는 한 마디로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대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진보신당은 이후 진보대통합 논의로 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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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노무현대통령의 죽음과 [진보의 미래]
   : 노무현이 멈춘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진보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사저 근처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며 심경을 밝혔다.

 

당시 이명박정권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한 불통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며 권위주의 통치 행태로 역주행하고 있었음에 반해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2.0’과 같은 웹사이트를 개설하며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에게 노 전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에 대해 “사실상 사이버 정치 복귀 선언이자 사이버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것(이명규의원)”이라며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며 경계했다. 이 같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경계심이 검찰로 하여금 노 전 대통령 측근들과 가족, 그리고 노무현 당사자까지 ‘정관계 로비 수사’라는 이름으로 먼지떨이 식 수사를 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나 지낸 사람이 자살한 사건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동료시민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500만 시민이 빈소를 찾았다. 동료시민들의 정서는 슬픔과 분노였다. 광우병 촛불시위로 ‘명박산성’을 넘어보고자 했으나 결국 불통의 역주행에 가로막힌 울분이 있었고 민주주의의 복원을 희원하던 노무현마저 기어이 잡아먹어버렸다는 원한에 사무친 울분이 겹쳐졌다. 다시 시민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추도하는 촛불을 밝혔다.

 

그러나 촛불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였다. 그러나 기존의 보수적 양당체제만으로는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정권을 반대하지만 그 대안으로 정치 자영업자 집단과 다를 바 없는 제 1야당인 민주당이 대안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결국 노무현의 말처럼 세상을 바꾸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며 그것은 좋은 정당, 강한 정당을 통해 이룰 수밖에 없었다.

 

진보신당 노회찬대표“노무현이 멈춘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하며 노무현 추모 열기가 단순히 폐족이 된 ‘친노’의 복권이나 다시 ‘민주 대 반민주’의 퇴행적인 대립구도로 되돌아가는 걸 경계했다. 노무현 사후에 그의 유고인 [진보의 미래]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보수의 시대’에 진보주의 정부로서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진보주의를 펼치려던 구상들을 회고하면서 참여정부의 한계를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232쪽)”라고 고백하며 비정규직 확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오류를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좌충우돌에 대한 변명을 모두 수긍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동문제에 대한 노무현의 고백은 그의 추종자들이 노무현 이후의 좌표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노무현이 멈춘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려한 이들은 이후 ‘국민참여당’을 만들었고, 이후 기존의 진보정당들과 진보대통합에 합류해 동료시민들과 눈높이에서 소통하는 강한 진보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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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성깔 있는 칼라TV
    :광우병 촛불시위를 ‘시위2.0’으로 만든 주역

 

 

 

진보신당 부산시당 당원들이 ‘대운하 까발리야’라는 네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타고 새재를 넘으려 하고 있던 2008년 5월 2일 100일 이상 지속되었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의 촛불이 막 켜지고 있었다. 첫 집회 참석자 60%는 여고생이었으며 집회 형식도 여느 집회와 달랐다. 사전에 준비된 연사가 있지도 않았으며 주로 참석자들의 ‘자유발언’으로 생기를 더했다.

 

5월 2일 첫 집회 이후 약 두 달 간은 매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촛불시위가 이렇게 완강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슈의 파괴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마치 축제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된 새로운 집회시위의 형식 때문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이렇게 개방적인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거기에 더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진보신당의 ‘칼라TV’라는 매체가 빛을 발했다. 독립 미디어운동을 하던 조PD(조대희씨) 등 일부 진보신당 당원들과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진보논객 진중권교수는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집회 시위 현장을 누비며 ‘아프리카TV’라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시위 현장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시민들도 ‘아프리카TV’의 채팅 창을 통해 촛불시위에 동참했고, 마치 온라인 게임의 유저처럼 ‘칼라TV’ 리포터 진중권에게 어디 어디로 가서 현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양상은 쌍방향 소통의 ‘웹 2.0’을 빗대 ‘시위 2.0’이라 명명되기도 했다. ‘칼라TV’진중권교수 외에도 미디어몹 ‘헤딩라인뉴스’의 코믹한 뉴스 진행자로 유명한 이명선 리포터가 참여했으며 정태인을 비롯해 진보신당의 대표 정치인 노회찬, 심상정 등을 출연시켜 촛불시위의 생중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현장 교육까지 겸했다.


‘칼라TV’의 이런 맹활약 덕분에 ‘위키피디아’칼라TV를 검색하면 “칼라TV에는 이런 뜻이 있다. 1. 칼라TV  2. 진보신당연대회의가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이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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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아! 민주노동당 분당





2007년 대선 직후 12월 29일 개최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지도부는 대선 패배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그에 앞서 문성현대표는 심상정 의원을 따로 불러 비대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심의원은 문대표에게 “우리 당은 걸핏하면 지도부 총사퇴로 모든 걸 덮으려 하는데 진정으로 책임지시려면 왜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되었는지 공개적으로 발언하세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부터 밝히세요. 임기가 며칠 남지도 않은 지도부가 서둘러 사퇴하는 걸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그건 책임지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겁니다” [당당한 아름다움 192쪽]며 ‘독배’가 될지도 모르는 제안에 대해 부담스런 심경을 여과없이 밝혔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개최 직전 12월 27일  [조선일보]에서는 “친북세력과 결별해야 민노당에 미래 있어”라는 제목의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튿날 민주노동당원인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이 진보매체인 [레디앙]에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인 자주파 또는 주체파는 한국적 분단현실의 산물이긴 하나, 그들이 당권을 잡고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책임은 지지 않고,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공부와 학습도 하지 않는 종북 주체일 뿐이다... 이들을 허덕이면서 안고 가는 것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당 창당이 더 낫다”며 신당 창당을 주장했다.


당의 일각은 벌써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2008년 1월 8일, 경기도 구리의 지역위원회 전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부산 지역 당원 52명이, 이어 광주·여수 등서도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1월 27일에는 조승수를 비롯해 선도 탈당한 홍세화, 김혜경 전 대표, 김석준 부산시당 위원장등이 참가한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이 닻을 올렸다. 민주노동당 분당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심상정 비대위 대표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는 대다수는 비대위의 혁신이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비대위가 당을 혁신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예단하고 미리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성급하다”며 선도 탈당 세력을 설득하는 한편 2월 3일 당대회에 “당의 민주주의를 훼손했던 패권주의를 척결하고 편향적 친북정당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혁신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며 “제 2창당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혁신안을 마련해 미래를 책임지는 진보정당으로 나가겠다”며 강도 높은 혁신 의지를 밝혔다.


1월 27일 공개된 당대회 안건에는 세칭 ‘일심회’ 사건의 최기영, 이정훈 당원 제명안과 미군의 완전한 철군과 북핵폐기를 연계시킨 대선공약 폐기 뿐만 아니라 총선 비례대표를 사실상 전략공천으로 채움으로써 정파 패권의 전쟁터가 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겼다.


그러나 이미 평등파 당대의원 일부가 선도 탈당한 상태에서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자주파는 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전의를 불태우며 정면으로 충돌할 기세였다. 한편 당대회가 깨어지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자주파 일부에서는 최기영, 이정훈 제명건에 대해 “당기위에 회부해 절차대로 진행하면 될 일을 비대위에 제출하는 무리수를 뒀다. 당대회 안건으로 올라오면 소명 기회조차 부여하지 못한다. 이건 절차상에 중대한 하자가 있을뿐더러 당 내분을 더욱 확산시킬 수도 있다. 평가의 문제와 인신에 대한 처리 문제는 별개”라며 제명안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대위로서는 일심회 사건에 대한 당 차원의 정치적 의사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드러내는 것을 회피할 수도 없었으며 당기위 뒤로 숨을 수도 없는 핵심 현안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선도 탈당한 이들을 다시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보다 강력한 혁신의 메시지를 던져야 했다.


심상정 대표도 배수진을 쳤다. “이번 당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된다면, 비대위 불신임으로 간주해 사퇴하겠다”며 “그 핵심은 일심회 사건 관련자 제명처리 부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운명의 날, 2008년 2월 3일 당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 위원장“오늘 당대회가 우리가 믿음직한 진보정당으로 다시 설 수 있느냐를 가를 역사적 분기점”이라며 두 당원의 제명 방침을 담은 ‘제 2창당을 위한 평가혁신안 승인의 건’과 18대 총선 전략명부 추천을 담은 안건에 대해 “수정안 제출 없이 찬반토론만으로 원안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오후 3시50분에 시작된 최기영,이정훈 두 당원 제명 안건은 정종권 집행위원장이 “북한 및 북한과 연계된 인물에게 전달할 것을 목적으로 당내 동향과 당직자 신상과 성향을 분석한 자료를 유출한 것은 당헌,당규의 당의 기밀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안건 제안 이유를 설명하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자주파 대의원들은 “당사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당원의 양심을 믿어야지 시대악법인 국가보안법 판결문을 믿을 것이냐”는 등 질문공세를 두시간 가까이 이어가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제명안을 삭제하자는 수정동의안이 제출되었고 862명 투표에 553명이 찬성해 64.1%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비대위 혁신안의 핵심이 거부된 것이다. 자주파 대의원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수정안 통과가 선포되자 심상정 대표, 노회찬의원, 비대위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퇴장했다.


2월 4일 경향신문 사설은 “우리가 보기에 비대위 혁신안은 민노당의 현 상황에서 당의 양대 정파인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을 최소화하고 당을 되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 관련자 2명을 제명하는 등의 조처를 취함으로써 자주파의 친북 편향에 대해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한편 ‘무조건 탈당’을 선도하는 평등파에도 경고를 보냄으로써 양쪽을 다 같이 아우르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내 다수파이자 그동안 당을 주도해온 자주파는 비대위의 혁신안을 ‘국가보안법에 대한 굴복’으로 보고 부결시켰으며, 평등파 역시 당을 살리고자 마련한 대회에서 탈당을 감행하기도 했다”며 심상정 비대위 혁신안 부결을 아쉬워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도 결국 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7일 탈당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에서 심의원은 “현재 민주노동당의 틀로는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드는데 한계에 달했음을 고통스럽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을 희망으로 만들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2월 24일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연대회의’를 공식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을 떠나 진보신당에 참가한 당원은 대략 2만,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8년 만에 분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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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겐 미래가 없다 
    :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참패

 

 

 

 

2007년 대선은 노무현정권 심판 선거였다.


민주정부 10년 집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갈수록 고달파졌다. 서민들의 입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말이 쉽게 튀어나왔다. 기대를 배반하는 정치, 열망과 실망의 지겨운 싸이클이었다. 노무현은 권력을 쥐고서도 기득권층의 반발을 달래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고백해야 했다. 분양원가 공개는 스스로 나서서 반대했다. 시장권력, 관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 등 사회 권력들이 기승했다. 거시경제 지표를 관리해야 하는 국정 책임자의 중압 때문일까? ‘기업이 투자를 해야 일자리가 는다’는 시장의 협박에 밀렸다. 정치권력은 무기력했다. 비정규직은 갈수록 늘어났다. 시장권력에 맞설 노동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은 양극화에 속수무책이었다.

 

노무현 집권 후반기에 불만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잘못된 일은 모두 노무현 탓, 노무현 때리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보수언론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공격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라고 각을 세웠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노무현은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푸념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민주노동당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노무현정권을 진보로 치부하던 국민들은 진보세력 전체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억울했다. 원내교섭단체에서 배제되어 국정운영에 개입할 수 없었던 소수정당이 왜 정치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느냐?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의 대립 때문에 교착된 정치를 민주노동당에 묻는 건 분명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정당으로서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가 없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둔 민주노동당도 이미 기성 정당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으며 일약 3당으로 도약해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지난 3년간 대국민 정치활동을 평가받아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 때 20%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들으며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원내교섭단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성정치의 장벽 탓도 있었겠지만 민주노동당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한 석만 있어도 정치가 바뀔 것이라던 호언장담은 10석을 가지고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원내 정당이지만 원외의 재야 운동권과 무엇이 다른 지 원내 진보정당으로서의 효능감을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내 입성 이후 3년간 민주노동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탁월한 대중정치인을 배출해냈으며 이런 저력에 힘입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당 지지율 12%를 지켜냈다.

 

민주노동당에겐 2007년 대선이 반전의 기회였다. 일심회 사건, 북핵의 자위력 인정 발언 등으로 고립의 늪에 빠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을 구출할 수 있는 구명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배출해 낸 새로운 대중 정치인을 전면에 내세워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내 후보 경선과정에서 권영길후보가 자주파와 손잡으면서 변화된 당의 모습을 기대하던 민심은 정파 선거의 벽에 부딪혔다. 결선에서 혁신을 내세운 심상정후보는 통합을 내세운 권영길 후보에게 패했다. 52 대 48, 이 수치는 지난 당 대표 선거에서 문성현과 조승수가 얻은 표와 겹친다. 그때도 52 대 48이었다. 흔쾌하지 못한 결과였다.

 

5년 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고 묻던 권영길은 여전히 참신했다. 그러나 2007년은 달랐다. 이미 생물학적 나이도 70대로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마지막 선거였다. 경선 때부터 따라붙었던 대선 3수생이라는 꼬리표가 권영길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식상하다’는 것이었다.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들고 나왔지만 자주파라는 패권정파의 등에 업혀 민생문제와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코리아연방’과 같은 선거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오히려 당내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후보로 선출된 9월 이후 한 달간 선대위도 꾸리지 못하고 허송했다. 고질적인 정파 대립 구도로 당력 결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도 그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당 혁신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 전통적인 민주노동당 지지층은 문국현 후보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10% 득표를 목표로 내세웠다.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이명박후보가 고공 지지율을 보이면서 민주노동당 사표론이 먹혀들 여지도 적었던 선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정했다.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게 가차 없는 회초리를 들이댔다. 권영길후보는 문국현후보에게도 뒤지는 5위를 기록했고, 선거기간 중의 지지율인 5% 선조차 무너진 3.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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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북핵, 민주노동당을 흔들다.
    : 비핵화 강령이냐? 핵자위권 인정이냐? 내분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대한민국 지질자원 연구원이 감지한 리히터 규모 3.58의 지진파가 민주노동당을 흔들어 놓았다. 지진파의 진앙은 북한 함경북도 화대군이었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 지진파를 일으킨 1차 핵실험에 대해 “강위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갈망해온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커다란 고무와 기쁨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이다”라고 열에 들떠 고창했다. 민주노동당북한의 핵실험 발표 직후 의원대표단과 당대표, 최고위원이 참석하는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격론을 거친 끝에 “민주노동당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지지하고 평화군축 강령을 가진 정당”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것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강한 충격과 유감을 표명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덧붙여 “북의 핵실험 강행의 과정에서 미국이 취해온 대북 고립·압박 정책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주요 원인”이라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긴장과 대결국면을 조성한 일차적 책임은 미국의 적대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이 밝힌 “핵실험은 조선반도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최고위 논의에서 포함됐는데 김선동 사무총장이 대변인 발표에서는 삭제를 요구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북한 핵실험에 대한 주요 당직자들의 엇갈린 발언들은 당을 일대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용대 정책위 의장이 <민중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북미간 정치군사적 대결 국면인데 북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할 수 있느냐”며 “핵이 자위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강령에 반하는 ‘핵 자위권’ 인정 문제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10월 15일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특별 결의문’ 채택을 둘러싸고 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북핵 '반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측과 자위권 측면에서 북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측이 나뉘었다. 그러나 이즈음 민주노동당의 의결기구는 숙의가 배제된 다수파 의 다수결이 횡행했다. 최고위원회가 올린 ‘북핵 실험 유감’을 북핵 실험 ‘반대’로 바꿔야 한다는 소수파인 평등파의 수정안은 간단히 부결되었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자주파 측에서는 오히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북미 사이의 긴장과 대결이 북의 핵실험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로 수정안을 제출했다. 최고위원인 김선동 사무총장과 이용대 정책위 의장도 원안을 제출한 최고 지도부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수정안에 찬성표를 던져 가결시켰다. 자주파의 수정안은 미국 책임론만 강조되었고 북한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 삭제된 것이었다. 결국 평등파를 주축으로 한 중앙위원들이 반발하면서 퇴장했고 자주파의 수정안은 공식 채택되지 못했다. 중앙위가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하자 노회찬 의원은 이틀 후인 17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자위를 위해 개발했기 때문에 용인해야 한다고 한다면 일본의 핵 개발도 용인해야 하고 우리가 전술핵 배치에 반대했던 이유도 부정해야 한다”며 “북한 핵실험에 대해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달 31일 북한 조선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당 지도부가 방북하는 문제를 놓고도 당내에 찬반이 엇갈렸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방북은 그 정치적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다. 당연히 민주노동당과 남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공식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방북은 하되 문성현 대표가 ‘개인적’ 차원에서 북한 핵실험에 반대 뜻을 표하는 것으로 어정쩡하게 절충되었다. 다수파인 자주파는 북한의 2005년 미사일 발사에 대한 반핵 결의안도 무산시켰고, 북핵 실험 유감 표명조차 틀어막았으며, 대표단의 방북을 한가한 나들이로 만들어버렸다. 당 내에서는 다수파고 큰 소리를 내지만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국민들에게 납득할만한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불투명한 당의 이미지만 키워간 것이다. 북핵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지속적인 대북 포용 정책으로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현실 정치의 문법은 아직 민주노동당의 운동권 자주파에게는 요원한 것이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이 같은 혼선으로 당내의 반목과 불신은 더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이에 김종철 전 서울시장후보는 "북핵에 대해 단일한 슬로건으로 갈 수 없다면 미국을 규탄하는 쪽과 동아시아 핵무장을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서라도 진보진영이 의제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차라리 따로 따로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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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민주노총에서 금기어가 되어버린 ‘사회연대전략’
    : 노동운동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한 제안이 ‘정규직 책임론’을 강화한다고?

 

 

 

정규직 노동자가 나서서 연금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국민연금 보험료지원사업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에 의해 2006년 11월 10일 공식 제안되었다. 권 대표는 국회 본회의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사업장 가입자의 국민연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해 이것을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역 가입자들의 연금보험료를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 민주노동당은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양극화에 대한 대안으로 부유세를 비롯 사회복지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일방적인 주장과 요구에 그칠 뿐 양극화 추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이에 국가나 자본, 고소득층에 대한 일면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 스스로가 사회 연대적 실천방안을 스스로 찾아 나설 때 주장의 정당성과 진정성이 담보될 수 있다고 보고 정규직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서 논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권 대표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사업은 우리 노동운동에서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정규직 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이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비타협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어 사회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이 울산에서 참패한 가장 큰 이유가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 때문이었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말로만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냄으로써 당을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시선을 바꾸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민주노총의 고립이 곧 민주노동당의 고립이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사회연대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분석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 2천4백만명 중 공적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은 약 1천30여만명. 이를 방치할 경우 현재 빈곤이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월급 160만원 노동자가 매월 1,800원의 연금 보험료를 지원해 고소득층과 자본, 국가의 참여를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함으로써 연금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제도를 설계한 오건호 민주노동당 정책전문위원“민주노동당은 진정한 사회연대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이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노동자의 연대철학에 의거해 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기존의 ‘일면적 요구’에서 ‘참여를 기초로 한 요구’활동이 필요하고 이는 산별노조 시대와도 조응하는 활동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조형일 IT연맹 정책실장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불신에 대한 고민 속에서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라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타협과 양보, 참여는 노조에 금기단어였다. 민노당의 제안은 우리 운동의 전환과 관련해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김태현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은 "민주노총 정책담당자 회의에서 1차적으로 논의를 한 결과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고, 고윤남 사무금융연맹 정책기획국장도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한다. 처음 논의보다 현실화가 가능하도록 보완이 많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후보로 나선 모든 진영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할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함으로써 풀자는 취지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연대전략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자칫 ‘정규직 책임론’을 강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이들이 경계한 부분이었다. 연맹급 정책담당자들조차 "취지는 좋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식의 반신반의 상태였다. 갈 길이 멀어보였다.

 

민주노동당은 2006년 10월부터 노동조합과 당 지역위원회를 방문해 사업설명회를 추진했고 12월 21일에는 사회연대연금노동조합 대의원대회에서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 지지 결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운동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석행 민주노총 신임위원장이 문성현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민주노동당의 연금개혁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조직의 수장이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장벽에 부딪혔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전략’이 마치 ‘정규직 책임론’의 다른 이름인양 금기어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반발을 무릅쓰고 산하 단위노조에서 설명회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정치력이 민주노총 위원장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이 고심 끝에 내놓은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은 큰 기대를 모았으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공방을 넘어서지 못한 채 캐비넷 속에서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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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민주노동당 개방형 국민경선 불발
    :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민주노동당의 유일한 브랜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채택한 개방형 국민경선제도의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대선기획단장인 김선동 사무총장은 2006년 9월 29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대선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토론을 전개하기로 했다”며 완전 개방형 경선제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대선후보 선출방식에 관한 논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에서도 논의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상현 기관지 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직면한 어려움을 타개하고 일거에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원 이외의 후원자, 지지자, 연고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후보 선출 과정에 50만 이상의 일반 국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경선 과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선거인단 모집을 통해 50만 이상의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써 대선 승리의 조직적 토대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의 신임 이석행 위원장은 조직된 대중 백만이 참여하는 개방형 경선으로 진보진영이 쾌거를 이룩하자는 선거 공약을 진작에 내걸었다. 이렇듯 논의의 핵심은 개방형 국민경선제를 채택할 것인가 여부였다. 2007년 3월 11일 당대회에서 진성당원에 의한 직접 선출이라는 당헌 개정 여부로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개방형 국민경선제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파간 대결과 일심회 사건 등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어 있는 조건에서 50만을 참여시키겠다는 포부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국민 경선의 자발적 열기가 전혀 감지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집되는 선거인단 또한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정파 조직에 의해 ‘조직’된 선거인단이라면 대선후보 선출과정은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대중 단체에 조직을 갖고 있는 이들 간 세 과시의 각축장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 등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당이 자신의 정강 정책을 구현할 수 있는 공직 후보를 선출해 유권자에게 심판을 받는 것이 정당 조직 원리인데 공직 후보 선출을 비 정당원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정당 정치의 부정에 다름 아니라는 논리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토론을 거치며 당대회에 상정된 ‘개방형 후보 경선안’은 63.14%의 찬성에 그쳐 2/3를 넘기지 못함으로써 부결되었다. 그러나 당권을 쥐고 있던 측에서는 개방형 경선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중경선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를 관철시키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중앙위에서 승인을 얻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결국 민주노동당이 자랑하는 진성당원에 의한 후보 선출이 고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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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일심회’ 사건의 불똥이 민주노동당에 옮겨 붙다.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체제 하의 공안세력에게 종종 먹잇감을 제공했다.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이 주시하는 ‘공당’으로서 남북관계와 관련된 정치활동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해야 했다. 진보-개혁진영으로부터 악법으로 비판받고 있는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실정법인 이상 당직자가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은 민주노동당이 애써 쌓아온 긍정적 이미지를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입성하기 전에 발생한 2003년 8월의 세칭 ‘강태운 고문 간첩사건’은 민주노동당의 국가보안법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공안부에서는 강태운고문이 일본에 거주하는 공작원 박춘근에게 포섭되어 민주노동당 관련 자료와 국내정세 분석 자료를 전달하고, 중국의 북한 대외연락부 부과장 김문수 등 북한 공작원들과 접선을 계속해왔다며 강고문을 국가보안법 상 간첩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강태운씨를 ‘통일운동가’로 예우해 고문에 위촉했을 뿐 당내 일에 관여하지 않은 인사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구언론들은 민주노동당의 해명을 무시하고 강고문이 민주노동당의 정강 정책에도 깊숙이 개입한 듯 소설을 써댔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강고문의 활동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고문직 해촉과 당적 박탈 등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위반사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불의의 율법이다. 따라서 합법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국가보안법체제를 상수로 놓고 당을 규율하지 않으면 당이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내 입성 이후 2006년 10월에 발생한 소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민주노동당의 뒤통수를 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검찰은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 이정훈, 개인사업가 장민호(마이클 장), 모 학원장 손정목,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 등을 체포했다. 보수 언론은 6.15선언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민주노동당의 연루 사실을 부풀렸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건은 연루된 이가 마이클 장 등 4인에 불과했고, 강령과 규율을 별도로 정하지도 않았고, 조직을 결성한 것도 아니었으며, 구성원 서로가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는 점에서 ‘이적단체를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심회’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북한 공작원에 제공했다는 국가 기밀이라는 것조차 민주노동당 사업계획이나 ‘자민통 서울모임’ 내부 회의자료 정도여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유죄 증거물조차 “국가 안보를 위협할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등 사실상 ‘태산명동에 서일필’식으로 전형적인 부풀리기 수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민주노동당의 당직자가 344명의 당직자 성향분석 자료를 작성해 소위 ‘본사(북측)’에 넘긴 사실이나 “김정일 장군께 충성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는 따위의 맹세문을 보내는 등 친북 일탈행위는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 내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전에 당직자 신상정보 유출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진보운동의 일탈행위”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자주파 인사들은 “당을 음해하려는 검찰의 공작”이라고 일축하고 국민이 납득할만한 공식 브리핑이나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2003년 강고문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공식적 대응이 이렇게 모호해지면서 세칭 ‘일심회’사건의 불똥은 민주노동당 전체로 옮겨 붙었다. 보수세력은 연일 민주노동당을 ‘친북당’, ‘간첩당’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심상정의원은 “당이 진상조사를 통해 깨끗이 해명하고 일탈행위엔 국민적 눈높이에 맞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도부에 촉구했으나 ‘책임 있는 조치’는 굼뜨게 유보되었다.

당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의 핵심은 ‘일심회’사건은 공안세력이 부풀린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문제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작품’의 재료를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당 내부의 취약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심회’ 사건에 수세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진보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박노자교수 조차 “민족해방파(NL)에 대한 제 솔직한 의견을 묻는다면 한국 진보운동이 앓고 있는 ‘소아병적 질환’이라고 답하겠다.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고 싶어도 거기에 주사파가 너무 많아 주저한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며 “운동담론이나 당 차원에서도 북한의 국가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무슨 ‘민족해방 이념’ 쯤으로 착각하는 분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 리스크를 짊어지고 다니는 정당이었다. 결국 자주파가 “동지를 버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국민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북한 추종 노선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비판하는 측의 분당 압력도 점차 커져갔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비합법 운동을 해왔던 이들이 제도권 대중정당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각종 제도적 제약을 감안하고 이른바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체제 안에서 일하며 민주주의의 힘으로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진보적인 대중정당 노선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민주노동당의 키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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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 “또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해도 내 행동은 똑 같을 것”

 

 

 

2005년 8월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삼성으로부터 떡값(뇌물)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7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노 의원은 1998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이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모금한 이른바 ‘세풍 사건’ 때도 현대와 대우, SK는 모두 돈을 낸 것으로 드러났는데 유독 삼성만 빠진 것은 검찰이 삼성 봐주기 수사를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삼성X파일에서 보듯 삼성의 상습적인 뇌물 공여에 길들여진 검찰에 의한 공모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이 공개한 명단은 김상희 법무부차관에서부터 홍석조 광주 고검장까지 검찰 수뇌부가 망라된 명단이었고 X파일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검찰 ‘쥬니어’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돈을 살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노 의원에 의해 명단이 공개된 전·현직 고위 검찰 간부들은 골리앗에게 돌을 던진 다윗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안강민 서울지검장을 앞세워 노 의원을 고소했다. 노 의원은 “나를 기소하려면 그렇게 하라. 나의 행동이 공익에 반한다면, 국민이 알 필요도 없는 내용을 공개하고 사리를 추구했다면 스스로 면책특권을 포기할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것이다. 옳다면 해야 한다. 다시 또 이런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의 행동은 똑 같을 수밖에 없다”며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주도한 5개월간의 수사는 삼성과 떡검의 면죄부 주기로 끝이 났다. 뇌물을 주라고 지시한 이건희 회장은 출국정지도 되지 않았고, 소환조사도 받지 않았다. 서면조사에서 이건희가 한 답변은 “개인 돈 일부를 구조본에 맡겼고 알아서 쓰라고 시켰기에 본인은 잘 모른다”는 것이 전부였다. 검찰은 명백한 자료를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이회장이 돈을 준 사실이 없다는 말만 인정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논리로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7명의 검찰 고위간부들은 어떤 법적 심판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노 의원을 고소한 안강민 전 대검중수부장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한부환 서울고검 차장은 삼성비자금 수사를 맡고 특별감찰본부장을 하기도 했다. 삼성 장학생이 삼성 비자금 수사를 맡고, 검찰 내부 감찰본부장을 맡고 있으니 감찰이 공정하게 될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은 언론중재위원까지 맡았다. 역으로 삼성 X파일을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와 떡검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 등이 삼성공화국 황제의 코털을 건드리고 그 호위무사들의 비위를 캤다고 거꾸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삼성X파일은 1997년 100억이 넘는 대선 자금을 여야 정치권에 전달하는 범죄 모의 장면이 담겨 있으며 검찰에게 명절과 연말 정기적으로 떡값을 나눠주는 장면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작년에는 3천만 원 했는데 올해는 2천만 원 하자”는 식의 얘기들이다. 이 범죄 모의 테이프가 밝혀진 것은 2005년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범죄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작년에 2천 했는데 올해는 얼마를 하자”는 얘기가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삼성으로부터 상습적으로 뇌물을 건네받은 검찰 주니어들이 그 후 시니어가 되어 있을 텐데 이들에게 최소한 2004년 연말까지 ‘떡값’이 건네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97년 뇌물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한 것은 애초에 수사 의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수사 검사였던 황교안 스스로가 ‘부당거래’의 한통속이라는 의미다. 황교안 차장은 법무부 장관을 거쳐 2015년 8월 현재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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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노무현 연정
    : 민주노동당은 소연정도 부담스러워

 

 

 

 

핵 반대 열풍으로 원내 1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의 말대로 ‘길 가다 지갑을 주운 것’이었는지 실력 이상으로 얻은 의석수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까먹어버렸다. 2004년 총선 1년이 지난 2005년 4.30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성적표는 6:0 완패, 의석수는 146석으로 줄었다. 이로써 열린우리당의 원내 과반의석 시대는 1년 만에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6월 24일 당-정-청 수뇌부 인사 11인 모임에서 ‘연립정부’ 이야기를 꺼냈다. 법안 처리도 어려워지고, 윤광웅 국방장관에 대한 해임결의안을 막아낼 힘도 없으니 ‘비상사태’라는 말까지 하면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노무현대통령은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끝장내는 정치개혁을 자신의 신념으로 가져온 정치인이고 그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중대선거구제도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혹은 민주노동당이 주장해 온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으로 바뀌어야 하며 기존의 지역구도에 의존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로는 정치개혁이 요원하다는 게 노무현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노무현의 진심은 개헌보다 어려운 선거법을 바꿀 수 있다면 권력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원내에서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이 무너진 이후에 나온 ‘대연정’ 제안은 제안 받은 당사자인 한나라당에 의해 “연정 발언은 여소야대에서 절대 밀릴 수 없다는 오기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선거법 하나 바꾸기 위해 대통령의 권력까지 내놓겠다는 건 헌법파괴적 생각”이며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주는 권력은 안 받겠다”는 공식선언(8.1 박근혜 당대표 기자회견)으로 간단히 무시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이라크 파병에 이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자해 정치에 가까웠다. 실제로 성사시키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접촉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성의를 다하는 것이라기보다 상대의 의중이나 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안함으로써 평지풍파만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들조차 “민생현안이 산더미인데 대연정 제안이 뭐냐?”며 뜬금없다고 받아들였고, 노무현식 돌출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은 8월 10일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공식 포기하는 대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과의 소연정 추진 가능성을 언급했다. ‘선거제도 개혁’과의 빅딜로 제안된 대연정 제안이 거부된 상황에서 소연정을 추진한다는 건 여소야대라는 원내 환경을 역전시키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려웠다.

 

소연정에 대해 유시민 의원은 “소연정을 해서 다수파를 확보하면 국회운영은 다소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 정치발전에는 합당한 대안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당내에서는 연정을 한번 생각하는 자체가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아직까지 덜 여문 당이어서 소연정은 자기의 운명을 거는 식으로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게 “가령 장관을 준다면 좋아할 것 같지만, 오히려 민주노동당에서는 폭탄이어서 부담된다”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대신 “안정적인 과반수 의석 확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 연합이 오히려 쉬운 방법”이라며 한발을 빼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입성해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근 지 1년밖에 안 된 아직 ‘덜 여문’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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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한미FTA 협상 개시
   : 민주노동당은 주권을 건 도박에 단호히 반대







2007년 초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가 만든 TV광고를 보면 대륙을 경영하던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웅혼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광고가 시작된다. “개척자 광개토대왕처럼, 해상왕 장보고처럼(물살을 가르는 배와 효과음이 보태진다) 우리 민족에겐 뜨거운 도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시장을 향한 우리의 끝없는 도전(기마부대가 미국 지도 위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새로운 기회입니다.(개척자 광개토대왕이 탄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처리된다. 마무리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세계와 경쟁합니다.”


노무현 행정부는 제조업에서는 중국에 추격을 당하고 있고 서비스업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에 열세인 ‘넛 크래커’ 상황으로 진단했다. 이에 금융서비스를 비롯한 생산자 서비스 분야의 강자인 미국과 FTA를 체결해 동북아 금융허브의 위치를 선점하자는 유혹에 빠져들어갔다. 노무현 행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은 ‘넛 크래커’론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뭐로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제조업을 경시하는 금융허브 논리는 실물경제와 유리된 거품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얼마 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증명되었다.


애초 한국 정부의 FTA 추진 로드맵에는 미국과의 FTA 체결은 중장기 과제로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인 전 대통령 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서 FTA 정책 결정과정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던 2005년 5월까지도 한국 정부에게 “미국은 맨 마지막” 체결 대상국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미국이 2006년에 들어서는 갑자기 한국의 최우선 FTA 협상국으로 부상했다. 2006년 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뜬금없이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2월 3일 한국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로버트 포트먼(Robert Portman)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함께 워싱턴의 미 의회 의사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한미FTA가 광개토대왕처럼 이른바 ‘경제영토’를 확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을 팔아넘기는 일인지 논란이 뜨거웠다. 정태인은 한미FTA의 전격 추진 배경에는 집권 3년차를 맞는 노무현 정권이 개혁 성과를 서둘려 내려는 조급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개혁이 당사자들의 거부로 실패하고, 대연정 제안이 한나라당의 거부로 실패하자 한미FTA라는 외부 충격에 의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자의 시선으로 봐도 그것은 위험천만한 문제였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받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이 지난 IMF식 개혁의 경험이었다. 한미FTA는 한편으로는 미국에 서비스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금융과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구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에 경제동맹까지 더해져 한미일 남방 3각동맹을 강화하는 구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북중러의 북방 3각동맹을 자극해 냉전으로 회귀할 가능성마저 점쳐지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미FTA가 무역수지 적자, 금융투기화와 종속,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질적 저하, 농업 말살,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 위기, 대미 군사안보 종속의 항구화 등 경제적으로나 군사안보적으로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 중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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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스크린쿼터 강화와 한국 영화 내부의 다양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 찾아야”






2006년 6월 멀티플렉스 스크린은 <다빈치코드>와 <미션임파서블3>가 장악했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찬사를 받은 국산영화 <가족의 탄생>은 관객 20만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헐리우드 쓰나미에 휩쓸려 가버렸다. <가족의 탄생>을 보러 간 관객은 다빈치와 미션들이 채우고 있는 멀티플렉스 스크린 앞에서 편식을 강요당해야 했다. 오전 8시 20분과 밤 12시에 단 두 회 상영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볼 수는 없었으니까.


2006년 7월부터 스크린쿼터 73일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8월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괴물’같은 저력을 발휘했다. 최단기간 1천만 관객을 돌파한 <괴물>은 스크린쿼터 73일 시대의 슬픈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괴물은 국내 영화 스크린의 40%를 독식하며 다른 국산 영화의 종다양성을 부지불식간에 파괴했다.


2007년 3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1등에서 5등까지 모두 외화가 차지했다. “스케일에 압도된다”는 괴벨스의 나치 홍보물 같은 헐리우드 영화 <300>이 1등을 차지했다. 한미FTA 4대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가 반 토막 난 후 1년 동안 한국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은 헐리우드에 완전히 역전당했다. 7 대 3에서 3 대 7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006년 1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인다고 공식 발표했다. 헐리우드처럼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자되는 블록버스터 자본에 비해 대자본 형성이 안 되어 있던 한국의 영화산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민주화 이후 검열 제한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동료시민들의 공감을 얻는 좋은 작품을 양산했다. 관객층이 두터워지면서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도 찍을 수 있는 자본이 형성되고 있었고 1천만 관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낸 작품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헐리우드 자본력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강점은 한국 사람만이 공유하는 문화적 코드에 있었으며 문화다양성을 보호하는 스크린쿼터 장치에 의해 꽃피울 수 있었다. 스크린쿼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의 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1967년부터 시행된, 스크린쿼터에 의한 한국 영화의 의무 상영일수는 1년의 2/5인 146일이었다.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한미FTA의 선결조건으로 알려졌다. 한미FTA 체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미약한데다 스크린쿼터마저 헐리우드 자본의 제물로 갖다 바치겠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다. 안성기, 최민식 등을 비롯한 유명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섰고, 민주노동당 또한 “최소한의 제한일수조차 반감하여 초국적 문화자본에 내다바치는 정부는 과연 누구의 정부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노동당은 더 나아가 상업영화 일색인 영상문화로부터 국내 영상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헐리우드 말고도 다양한 국적의 영화가 상영되도록 하위 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또한 스타시스템과 상업영화가 독식하는 영화판도 비주류 감독, 기획진, 배우, 스텝들 등 다양한 영화인들의 기회와 권리를 보장되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스크린쿼터 강화와 한국 영화 내부의 다양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발표하기 직전에 통과된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에도 부합하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무엇엔가 쫓기듯 서둘려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발표했고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 축소를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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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늙은 너구리’ 잡은 심상정
    :국회초년병 심상정, 이헌재 굴복시키며 재경위 군계일학으로 떠오르다

 

 

 

 

 

 

 

 

 

금속노조에서 잔뼈가 굵은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의원은 국회 상임위 중 재경위를 선택했다. 노동전문가인 심상정으로서는 국가 살림 전체를 들여다보는 재경위가 다소 버거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당시 상황을 취재한 <프레시안>의 기사는 심상정 의원의 활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004년 10월 12일 국정감사에서 심상정 의원은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을 불러 앉혀서 “파생상품시장을 통한 정부의 외환개입으로 1조8천억원 대의 대규모 손실이 난 것으로 추정된다”며 “정부나 중앙은행은 파생상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무엇 때문에 개입했냐”고 따졌다. 심 의원은 “투기를 막으려고 투기에 나선 것이냐”고 질타한 뒤, 다음 재경부 감사일 이전까지 외평기금 종목별 이자 지급 상세내역을 제출토록 요구했다.

 

심 의원의 추궁이 계속되자 이 부총리는 “정상적 외환거래로는 환투기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일시적으로 한 것”이라고 파생상품을 통한 시장개입 사실을 시인했다. 금융계에서는 “국회의원 초년병인 심 의원이 백전노장인 이헌재 부총리를 초토화시켰다” “재경위 의원들 가운데 단연 군계일학”이라고 놀라워했다.

 

심 의원은 국정감사에 앞서 재경부로부터 받은 2004년 1~8월의 외평기금 이자지급액과 외평기금 발행잔액 자료를 꼼꼼히 분석했다. 외평기금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는데 이자지급액은 이미 2003년 지급액의 두 배나 급증한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심 의원은 1조8천억 원이 정부가 환율 방어를 위해 핫머니들의 투기판인 파생금융상품 시장에 겁 없이 뛰어들어 발생한 손실이라는 사실을 간파, 재경부를 몰아침으로써 마침내 이헌재 부총리로부터 백기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심 의원의 이 같은 활약은 능구렁이 관료들에게 호통만 치던 기존의 국정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특히 재경부 ‘모피아’의 실세로부터 백기 항복을 받은 심상정의 활약은 일약 심상정을 ‘정책국감’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간 재경부는 공개적으로 부인해 왔으나 심상정 의원의 외통수 추궁으로 환율조작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파생금융상품에 뛰어들어 2조에 가까운 천문학적 손실을 끼친 국제 금융투기세력의 호구라는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심상정과 재경부 모피아의 길고 긴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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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정파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 민주노동당






2005년 10월 울산북구 국회의원 재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혜경 대표를 비롯한 전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원회(임시대표 권영길) 체제로 운영되던 민주노동당은 2006년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문성현, 조승수, 주대환 세 후보가 경합하는 당대표 선거를 치렀다. 김혜경 대표까지는 정파 간의 합의추대였으나 2006년 당대표 선거는 창당 이후 최초로 자주파와 평등파 간의 정면승부였다. 2차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월 10일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문성현 후보가 평등파가 민 조승수 후보를 누르고 새 대표로 당선되었다.


사실 당대표 선거는 여러모로 개운치 않았다. <프레시안>에서는 선거 자체가 당이 처한 ‘위기’ 돌파의 계기가 되지 못했고, 선거 결과도 특정 정파 일색으로 채워짐으로써 쇄신의 동력을 애당초 상실했다는 평가가 주종”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 여러 언론에서 지적했듯이 당내 선거는 국민들이 볼 때도 진보정당으로서 감동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혼탁 선거’라는 씻기 힘든 흉을 남겼다. 일례가 조승수 후보에 대한 마타도어다. “조승수 후보가 당 대표가 되면 국고보조금도 못 받고, 선거에도 당 후보가 아니라 무소속 후보로 나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조승수 후보가 대법원에서 선거법으로 의원직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흑색선전으로 당심은 상처를 입었다. 문성현 체제는 이전과는 달리 통합형 리더십 구축에 실패, ‘반쪽의 대표’로 출범했다.


최장집 교수가 분석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운동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심화로 나아간 노동운동과 반미 통일운동으로 급진화한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민주노동당 창당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심화를 주요한 운동실천으로 수용한 측에서 선택한 조직전략이었다. 그에 비해 전국연합과 같은 세력은 여전히 민족통일이라는 강령적 과제에 복무하는 ‘민주대연합’이라는 정치노선을 고수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해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와 같은 정치노선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을 걷겠다는 민주노동당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당이 결정적 국면에서 심각한 갈등 요소를 안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던 이들도 “민주노동당이 뭔가 보여주는 게 없다"고 실망하고 있었다. 사실 '삼성 X파일'로 노회찬 의원이 반짝 뜬 것 말고는 동료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정치활동은 별로 없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었다. ‘황우석 열풍’이 불 때 생명윤리, 연구윤리, 의료산업화 반대 등의 논리로 대응했고, 사학법 개정에서는 보다 더 급진적인 사학법 개정을 촉구했다. 많은 쟁점에 개입했고, 또 진보정당다운 입장을 취했다. 노무현 정부의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인정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스크린쿼터 축소 등의 현안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뭔가 보여주는 게 없다“고 하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을 어떤 당으로 규정하건 지난 총선에서 서구의 복지국가 선도정당 정도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었고, 또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국민들은 기존의 보수 양당 체제에서 틈을 비집고 나서서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서민복지를 실현하겠다”는 진보정당의 활약에 기대를 건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진보정당 고유의 정치활동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민주노동당은 자신만의 ‘정치담론’을 능동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고 2004년 총선 때 제기했던 무상의료, 무상교육 아젠다마저도 사장시키고 있었다. 그 바람에 참여연대에서 조세개혁 전문가로 활동했던 윤종훈 회계사를 떠나보내야 했듯이, 민심이 실망하고 지지를 거두는 걸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2006년 2월 1일 MBC 여론조사에서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총선 당시보다 반 토막난 6.2%를 나타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등락에 묶여 동반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여당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은 한나라당으로 쏠리고 이른바 ‘개혁정권’의 실패 책임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같이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주계열의 활동가들 일부가 당으로 옮겨 오면서 무리하게 당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벌였고 이 때문에 당이 심한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건 쉽지 않다. 신임 문성현 대표는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통합과 혁신으로 뚫겠다”며 자신을 지지해 준 자민통(자주파) 그룹도 나를 놓아 주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리고 부유세 등 양극화 해소 대책과 지방선거 대응에 대선 예비주자로 꼽히는 권영길, 노회찬 의원을 전면 배치해 대중적 관심을 높이고 서울시장 후보도 김종철 전 최고위원, 박용진 대변인, 정종권 서울시당 위원장 등 30대의 젊은 후보들을 경쟁시키겠다는 등의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지방선거 돌파라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06년 2월 2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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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민주노동당, 당내 독립언론의 성장과 갈등
    : 주간 ‘진보정치’, 월간 ‘이론과 실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치’라는 주간지와 ‘이론과 실천’이라는 월간 기관지를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특히 ‘진보정치’는 민주노동당이 창당하기 전부터 준비를 해 독립된 편집권을 갖고 독자재정으로 운영되는 기관지로서 민주노동당 당원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를 응원하는 지지자들까지 시선에 넣는 대중적 진보언론을 지향했다.


‘진보정치’ 창간을 주도한 이광호 편집장은 당 창당 이전부터 기관지를 준비해온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과 향후 진보정당과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기관지가 가장 중요한 몫을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래로부터 시작한 셈이죠.”라고 설명했다. (<미디어오늘> 2000.6.29). 그리고 당의 기관지이지만 독립된 편집권을 갖는 ‘진보정치’의 위상에 대해서는 “어찌 보면 기관지는 내부언론이지만 당의 입장, 방침만을 알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로서의 장치이거든요. 이러한 취지가 훼손된다면 언제라도 거부하거나 미련 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당의 공식입장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일방통행식 당보와는 분명히 차별된 독립 진보언론임을 명확히 했다.


2000년 3월 24일 창간된 ‘진보정치’의 뒤를 이어 2001년 7월 27일 월간 ‘이론과 실천’도 창간되었다. 최영민 편집장은 “<진보정치>가 대중적 정치신문이라고 한다면 <이론과 실천>은 보다 선진적인 당원과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운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상대적으로 심층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매일노동뉴스> 2001.7.31.)


‘진보정치’의 초대 기관지위원장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금수 이사장, 편집위원장은 이광호 전 민주노총 편집실장이 맡았고 주간 24면으로 발행되었다. ‘이론과 실천’은 장상환, 황광우 등 당 내 이론가와 활동가 15인을 편집위원으로 구성하고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 등 해외 이론가들이 해외자문위원으로 참여하도록 진용을 구성했다. 민주노동당이 원외 정당이던 권영길 초대 당대표 시절에는 비록 박봉이지만 기자들과 현장 통신원, 그리고 편집진은 당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도 가감 없이 반영하는 등 독립 진보언론으로서 기관지를 열과 성을 다해 만들었다.


종이 신문과 기관지 말고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의 인터넷 매체인 ‘판갈이.net’도 변화하는 매체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서 있는 ‘진보누리’와 같은 논객들 중심의 매체도 좌파 인터넷 매체로는 꽤나 독자층을 갖고 있었지만, ‘노사모’ 계열이 주도하는 ‘서프라이즈’와 같은 매체 파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진보정치’와 연동해서 뉴스까지 제공하는 ‘판갈이넷’은 급속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기관지위원회에서는 인터넷 매체 창간과 기관지 발전 방향을 두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6월 2기 당 대표체제가 출범하였다. 새롭게 선임된 정성희 기관지위원장이 ‘이론과 실천’의 최영민 편집장을 해촉하면서 기관지를 둘러싼 논란이 가시화됐다. 인터넷매체 창간과 기관지 발전방향을 두고 기관지위원회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면서 기관지를 둘러싼 갈등은 본격화됐다. 정성희 기관지위원장은 ‘진보정치’가 편향된 정파적 입장에서 기관지를 제작한다고 지적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문제 삼아 이미 인쇄를 마친 ‘진보정치’의 배포 중단 사태까지 일어나는 등 기관지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져갔다. 뜻있는 여러사람들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기관지위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기관지 창간을 주도한 이광호 편집장이 2005년 1월 말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4명의 기자 중 3명이 동반 사퇴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당 안팎의 편집기획위원들도 줄줄이 그만뒀다. 만평을 연재하던 만평가 이창우(필자)도 ‘진보정치’에 연재하던 만평 송고를 중단하는 등 독립언론으로서의 기관지 위상을 침해하는 일련의 공격에 대해 항의가 잇따랐다.


‘진보정치’ 이광호 편집장은 앞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미련 없이 떠났다. ‘진보정치’와 ‘이론과 실천’의 초대 편집장들은 모두 떠났다. 인터넷 매체 ‘판갈이넷’도 꺾였다. "이견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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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민주노동당, 국가보안법 폐지 ‘올인’


   ‘열린우리당 2중대론’ 본격 대두

 

 

 

 

 

 

 

2004년 17대 총선에서 원내 과반인 152석을 석권한 열린우리당 당의장 정동영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사립학교법, 신문법, 과거사법 등 4대 개혁입법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그해 8월 27일 국가보안법의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 그러나 이틀 후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인 제7조의 고무 찬양, 이적표현물 소지 및 반포 등과 같은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조항조차 합헌이라고 판시하면서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보안법의 존폐는 2004년 하반기 정치권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2004년 겨울 국회의사당 앞은 56년간의 국가보안법 체제를 반드시 끝장내자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대규모 농성단이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4대 개혁 입법 중 국가보안법 폐지의 건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무리로 삭발을 하면서 응원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원내 과반수에 민주노동당이 10석을 갖고 있으므로 열린우리당이 당론만 통일시킨다면 얼마든지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열린우리당 내 폐지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내부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정동영 당의장이 통일부장관으로 입각한 이후 당의장을 맡은 이부영 의장을 비롯한 김원기 국회의장과 임채정, 문희상, 유인태, 정세균 의원 등 중진의원들은 열린우리당 내 50, 60명의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정을 감안해 한나라당과의 타협을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은 ‘국가보안법 수호’에 명운을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회 표결로 가더라도 열린우리당의 이탈표를 단속하지 못하면 국가보안법 폐지가 통과될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 의장은 국가보안법의 전면 폐지가 쉽지 않다고 보고 국회 안에서 농성을 하던 유시민, 임종인, 이광철, 정청래 등 10여명의 강경폐지론자들을 설득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독소조항 일부 개정’으로 방향을 전환하려고 했다. 한나라당의 양해는 사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시민 의원 등은 전면 폐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의총에서 이부영 당의장을 “배신자”라고 지목하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사퇴의사를 밝히고 자리를 떴다. 이부영 의장은 이 상황을 회고하며 “열린우리당은 정국주도권을 잃었고, 남북 화해 협력의 동력도 상실하는 계기였다”고 썼다.

 

그 후 국가보안법은 철갑을 두르고 의연히 유지되었다. 찬양, 고무, 동조, 통신, 회합 등을 불법시하는 국가보안법 7조만 개정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사범의 90%는 사라질 것이라는 게 ‘민가협’의 조사 결과다. 7조 개정이 사실상 국가보안법을 사문화시킬 수 있는 길이었는데 전면폐지에 ‘올인(all in)’하는 강경 입장을 조율하지 못하면서 국가보안법 체제는 의연히 유지되고 있는 이다. 대결 정치가 빚은 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양당 간 힘겨루기 양상이 되면서 차근차근 풀어야 할 오해마저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즉 국가보안법 폐지론의 입장에서는 이참에 국가보안법이 완전히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져야 할 악법이지 부분적인 개정은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입장인 반면, 국가보안법 수호론의 입장에서는 한 획도 고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이런 극한의 갈등은 무익한 것이었다. 정치의 공간을 운동이 장악함으로써 아무런 생산적 타협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모의 상태에서는, 상대를 절멸시키지 않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의 대치국면에서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당론인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열린우리당이 전면폐지론자들과의 연대와 엄동의 추위 속에서 농성하는 300인의 농성 대열에 사무총장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이 삭발농성으로 참가해 시민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싸우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을 실질적으로 사문화시키는 절충안을 고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존폐 문제를 둘러싼 ‘정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민들도 피로감을 드러냈다. 민생문제를 외면하고 정쟁만 일삼는다는 비판이 점점 고조되어갔다. 김윤철 민주노동당 상임정책위원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당구도로 진행되는 현 국가보안법 논쟁에서, 민주노동당을 배제하는 데는 양당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존재감이 전혀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2중대’ 소리마저 듣는 상황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정기국회를 대비해 열심히 준비해 온 민생 관련 법안들도 빛을 못보고 있었다. 김 위원은 “국가보안법 및 과거사 관련법이 매우 중요한 건 분명하지만, 사회경제 사안에서 차별성이 없는 거대 보수정당들이 주도하는 현 국회는 정치경쟁이 주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민노당이 사회경제 이슈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가로막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어났다. 열린우리당과의 관계에서 민주노동당은 독자적인 포지션을 가져야 하는데 열린우리당이 주도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나 과거사 청산, 언론개혁, 사립학교법 개정 같은 자유주의적 과제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40대의 여당 지지율은 20%대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현실적 문제로 고민하는 교육, 주거, 노후, 출산, 비정규직 문제 등 절박한 민생문제를 외면하고 정쟁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독자적 포지션은 이들이 고민하는 민생의제에 보다 더 깊이 천착해야 했던 것이다.

 

장상환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은 “열린우리당이 주력하고 있는 문제들에 비해서 민생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물론 국가보안법은 물론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일반 민중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표현의 제약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껴서 사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무력화된 상태라고 보아도 좋다. 여기에 지나치게 무게를 싣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듯 과거에 중심을 두었던 이슈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틀을 고집하면서 이슈를 선정하고 정치행동의 방향을 잡아서는 안 된다."며 당의 전략적 행동 수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운동정당’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한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이런 조언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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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당직과 공직은 겸직할 수 없다?
    : 민주노동당, 제도권에 등장하자마자 당을 대표하는 리더를 배제하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문화를 혁신하는 리더였다.


우선 진성당원제가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이나 새천년민주당 등 기성 정당들은 당비를 내지 않는 페이퍼당원 수백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기가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여당과 야당에 동시에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철저히 당비를 내는 자에 한해 당원의 자격을 부여했고, 이런 진성당원이 2004년 17대 총선을 치를 당시 5만 명에 이르렀다. 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당원시스템은 정당운영의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개혁국민정당도 그 뒤를 이었고, 나중에는 열린우리당도 진성당원제를 모방하려 했었다. 진성당원제는 자연스럽게 공직후보에 대한 공천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후보자는 당원들이 직접 선거를 해서 선출하며 선출된 후보에 대해 당원들이 책임을 지는 구조였던 것이다.


진성당원제 말고도 민주노동당만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는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의 취지는 당이 이른바 ‘의회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막자는 것이었다. 당의 대중적 토대인 대중운동과 튼튼히 결합되어 비제도권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투입하는 방식으로 의회 연단을 활용해야 한다는, 변혁적 원칙이 강조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며 대중투쟁과 굳건히 결합해 온 민주노동당의 ‘검증된’ 의원단조차 의회 내의 제도적 틀에 갇혀 변질될 수 있다는 의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오직 시스템과 제도만이 국회의원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대표적인 리더십들이 대거 의회로 진출한 상황에서 이들이 당을 대표할 수 없게 만든 겸직 금지제도는 애초의 취지와 달리 오히려 당과 원내활동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권영길 대표를 비롯해 노회찬 사무총장 등 당의 국민적 대표선수들의 공백을 ‘듣도 보도 못한’ 정파의 리더들로 대체하는 부정적 후과를 낳았다. 당의 설계자들이 선의로 만든 이 제도는 원내 입성 후 권영길, 노회찬 등이 당을 대표할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곧바로 당내 논란을 불러왔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5월 6일 7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당규를 일부 완화하자는 내용의 수정안을 검토했다. 중앙위에 앞서 실시한 당원 설문조사에서는 57.5%가 “겸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당 중앙위는 당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의 숱한 기대 속에서 원내 입성하고도 당직과 공직을 분리함으로써 원내 활동의 성과를 당의 성장으로 흡수할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박차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직 선거를 이른바 NL과 PD 간의 대결이라는, 국민들이 보기에 낯선 정파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작은 성과에 취해 그것을 서로 빼앗으려는 집안싸움과 같은 모습으로 비춰지면서 국민들의 기대는 급속히 식어버렸다. 한 때 20%대를 육박하던 정당의 지지율도 곤두박질쳤고, 북새통을 이루던 기자들도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최고위원회의 다수파를 차지한 소위 ‘자주파’는 반미자주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유세와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같은 민생노선으로부터 동떨어진 정치적 결정을 독점하고 소수파들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켜나갔다.


3년 후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당규는 폐기되었다. 하지만 원내 입성과 동시에 당을 국민적으로 대표해왔던 리더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당규는 그 아름다운 취지와 달리 이미 당을 자해한 무서운 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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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의사당의 낯선 손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
    :국회의원 특권도 낯설다. 동료시민들의 눈높이로 바꿔라
     민주노동당식 포퓰리즘 정치, 의원특권 폐지운동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월급쟁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당선 직후 토한 일성이었다.
2004년 4월 22일 여의도 의사당은 낯선 손님들을 맞았다. 당선자 등록을 하러 온 심상정 당선자는 의원 금배지와 공직자 재산등록 서류들이 들어있는 검은색 007 의원 서류가방을 보고는 “남성 중심적인 국회”라는 걸 잘 보여주는 것 같다고 첫 느낌을 말했고, “무거워서 가방을 들 수 있겠느냐”는 심 당선자의 질문에 ‘보좌관이 들면 된다’는 사무처 직원의 대답을 듣고는 “우리 보좌관은 가방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며 동료시민으로서의 소박한 견해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점퍼 차림의 단병호 당선자는 “정문에서 의경들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등록하러 왔다’니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눈치더라”면서 “본청 안에 들어가서도 똑같은 눈치였다”며 낯선 손님에 대한 국회의 반응을 전했다. 심 당선자는 “사무처에 들어갔더니 직원들이 모두 기립하더라”면서 “국회의원들이 들어오면 다 일어나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낯설게 느껴지는 국회의원의 특권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의원 전용 출입문이나 전용 엘리베이터와 같은 사소한 특권에서부터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까지 동료시민들의 눈으로 볼 때 의원 특권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불체포 특권과 면책 특권은 ‘방탄국회’와 ‘막가파식 폭로정치’에 악용되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당시 불법 대선자금 수수로 구속된 서청원 한나라당 의원이 석방된 것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더라도 현행범이 아닌 한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통과되면 회기 중에는 바로 석방해야 한다는 불체포 특권의 악용사례였다.

 

민주노동당은 5월 20일 ‘국회특권폐지운동본부’를 설치해 본격적으로 의원특권 폐지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노회찬 사무총장은 “의원 편의 제공이나 불체포.면책 특권 등과 함께 다수 정당이 갖는 특권도 폐지하거나 현격히 줄이자는 것”이라고 했다. 또 민주노동당은 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도 더불어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은 국회의 권력견제 기능을 감안한 의원 보호장치라는 측면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문제였다. 어찌 보면 진보정당의 사상 첫 등원으로 기성 보수정당과 차별화하고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어야 한다는 다급한 사명감에서 추진된 다분히 포퓰리즘적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은 월급도 노동자 평균임금 180만원만 받고 나머지는 당비로 귀속시키기로 했고 의원에게 주어지는 자가용 사용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의 의원 특권 내려놓기 목록에는 고급차 안타기, 관광성 해외여행 금지, 명절 때 비행기 및 열차표 청탁 안하기, 피감기관들의 술 대접 안받기 등 '일상적 특권'도 있었지만, 의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의정활동을 위한 정상적 권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경우 의원들의 주말 지역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워싱턴에 작은 공항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데 이것을 특권으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워낙 커서 정당한 권리조차 특혜처럼 비쳐 의원특권 내려놓기는 스스로 의정활동을 발목 잡는 효과도 있었던 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제살깎기식 특권 내려놓기 경쟁의 진정한 목표는 교섭단체 특권에 관한 문제였다. 원내 교섭단체가 된다는 것은 의사일정 조율뿐만 아니라 의제에 관한 협의와 조율 등을 통해 국정 운영의 주체적인 파트너가 된다는 의미였다. 원내교섭단체는 국회운영의 실질적인 핵심으로 윤리심사(징계)요구, 의사일정 변경동의, 국무위원 출석요구, 의안 수정동의, 긴급현안질문, 본회의 및 위원회에서의 발언시간 및 발언자 수, 상임위 및 특별위 의원선임 등에 있어서도 권한을 갖는다. 노동자 서민의 목소리를 원내에 투영시켜 민주노동당의 정책적 차별성을 분명히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보면, 원내교섭단체가 돼야 하는 것은 등원 다음으로 또 한 번 넘어서야 할 고비였다.

 

그러나 교섭단체 구성요건은 원내 20석을 가진 정당에 한정되어 있어 민주노동당은 국정운영의 주체적 파트너에서 배제된 것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민주노동당이 총선에서 10% 이상의 정당득표율을 얻은 것을 무시하면서 전체 의석수의 10%도 안 되는 20석만을 교섭단체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순”이라며 “교섭단체 제도를 채택한 24개국 가운데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원내 입성조차 거북해 하는 기성 정당의 입장에서는 민주노동당에 그런 마이크를 내 줄 리 만무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도 교섭단체 특권 내려놓기라는 의제를 주구장창 물고 늘어 질 수도 없었다.

 
어쨌든 민주노동당 초보 의원의 원내 입성은 기성의 제도와 관행을 크게 흔들어놓으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특권 내려놓기 경쟁을 불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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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이 자리에 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 민주노동당,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석 획득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비례후보 8명, 지역구 2명, 당 지지율 13.03%를 얻으며 2000년 창당 이래 최초로 원내 진출을 이루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창원을과 울산북구에서 고배를 마셨던 민주노동당은 창원을에서 권영길, 울산 북구에서 조승수를 당당히 당선시킴으로써 설욕했으며, 정당 지지율에 따른 비례후보 당락은 개표 막판까지 가슴을 졸이게 하며 한판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전국 예상득표율이 15%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연출하며 순항하기도 했지만, 정작 출구조사에서는 10% 내외로 나와 비례 7번까지 당선되고 8번 후보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정당 득표율

개표 결과 민주노동당은 10선에 도전하는 자민련의 비례 1번 김종필 후보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고 노회찬 후보를 당선시켰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대한 평가는 약간씩 달랐다. 다수 의견은 “밀물이 들면 배가 같이 뜬다”는 논리로 진보-개혁진영 전체의 지지율이 높아질 때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의 지지율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온건개혁정당과 진보정당 지지율의 등락이 동조화되는 현상은 그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이 논리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샛강이 흐르지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며 온건보수정당과의 차별화와 독자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지지자들을 모아왔다. 17대 총선에서 정당 지지율 13.03%도 사실은 예상득표율보다 낮게 나온 것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을 열린우리당에 빼앗겼다고도 볼 수 있었다. “밀물이 들면 배가 같이 뜬다”는 논리는 수구보수로부터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는 일이 선결과제이므로 진보정당 역시 그에 복무해야 하며 따라서 온건개혁세력에 대한 전선은 후순위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독자적인 진보진영이 풀어야 할 오랜 숙제였다. 87년 대선에서는 독자후보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갈렸고, 1997년 국민승리21 이후부터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진보개혁진영은 중대한 정치적 시기 때마다 논쟁을 거듭해 왔다. 제도적으로는 독자적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선거제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제도가 강제하는 룰 안에서 싸워야 하는 진보정당으로서는 온건보수정당의 들러리나 서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조돈문 교수는 대통령의 진보적 약속이 4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파기되었다고 비판했다. 조교수는 “노동조건 개악을 담은 근로시간 단축법이 통과되자 노동계는 투쟁을 선언했고 재벌들은 갈채를 보냈다. 사용자 대항권을 세운 로드맵이 발표되자 양대 노총은 노 정권을 규탄했으나 재벌들은 환호했다. 재벌들은 노 정권의 친 노동 성향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었다. 노동자들이 기대한 ‘희망’의 정치는 짧은 시행착오와 함께 마감됐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김종철 선대위 대변인도 “현 정부는 세계가 규탄하는 이라크 침략전쟁에 미국의 하위 파트너를 자처했다. 북미 갈등에도 미국 눈치만 보며 한반도 평화를 외면했다.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칠레 FTA를 강행하고 정규직-비정규직 싸움을 부추기며 대통령 자신은 뒤로 숨는 모습을 보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탄핵열풍 속에서 열린우리당에 대한 쏠림현상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이라는 제3의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새로운 대안적 정당에 대한 지지층을 형성해 왔다. 특히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더욱 강한 자장을 만들어냈다. 울산은 21.9%를 얻어 전국 16개 광역시도 기준으로 유일하게 20%대를 넘겼고, 조승수를 당선시킨 울산북구는 35.4%로 전국 최고치를 기록했다.

 

울산 북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밀집지역이거나 노조 활동이 활발한 곳들은 예외 없이 정당득표율이 높았다. 권영길 대표가 당선된 창원을(26.6%)을 비롯해 거제(26.2%), 울산동구(25.2%), 창원갑(22%), 울산남구을(20.8%)이 모두 20%대를 넘겼고, 평택을(17.8%), 인천부평을(17.7%), 군포(16.9%), 광주광산(16.6%), 전남여수을(16.5%), 청주흥덕을(16.4%), 마산을(16.4%), 인천서구강화갑(16.3%), 인천부평갑(16%), 인천남동을(16%)도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청주흥덕갑(15.9%), 인천연수구(15.9%), 구미갑(15.8%), 포항남울릉(15.8%), 인천계양을(15.6%), 천안을(15.5%), 아산(15.3%)도 전국 평균(13%)을 뛰어넘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노동자 '계급투표' 바람이 민주노동당 원내 10석 진출에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확된 셈이다.

 

민주노동당은 이렇듯 독자적 지지기반을 다져나가면서 새로운 수권 대안정당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물론 모든 연대를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며 자신의 독자적 지지기반을 다지고 정치적 지지자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 7월 8일 실릴 예정이었던 ‘74회’ 글과 그림은 선거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중앙선관위의 권고의견을 존중, 동시당직선거 일정이 완료된 후 게재하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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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04년 4월 총선과 탄핵 반대 열풍


   :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 “불판을 바꾸자”







 

2004년 4월 총선은 탄핵 반대 열풍의 한가운데서 치러졌다.


3월 30일이 1차 변론이었고, 4월 2일 2차 변론, 4월 9일 3차 변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성난 시민들의 촛불의 집회가 연일 이어졌다. 탄핵 5인방 박관용 국회의장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 조순형 민주당 대표와 유용태 총무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민주노동당은 탄핵 열풍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선거에 임했다. 최초로 치러지는 1인2표에 의한 총선에서 정당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지상 과제였다. 민주노동당은 방송토론을 십분 활용했고 비례후보 8번 노회찬 사무총장이 방송토론의 스타로 떠올랐다. 3월 20일 KBS 심야토론에서 노회찬은 "50년 동안의 썩은 정치판을 이제 바꿔야 합니다. 50년 동안 삼겹살을 같은 불판 위에서 구워 먹으면 고기가 새까맣게 타버립니다. 이제 바꿀 때가 됐습니다."며 정권교체를 넘어 보수세력 자체를 진보개혁 세력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세력교체론을 내세워 공격적으로 토론에 임했다. 노회찬 특유의 유머코드는 네티즌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노회찬의 말만 따로 모은 ‘노회찬 어록’이 다양한 버전으로 편집되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삼겹살 집에서 “아줌마 불판 바꿔주세요”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노회찬의 이 말을 연상했다.

 

노회찬의 속풀이 유머코드 어록은 이어졌다.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과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핵했다고 주장하면서 방송이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즉 3월 12일에 국회 몸싸움 장면을 14시간이나 방송에서 의도적으로 계속 보여주는 바람에 국민들은 혼돈에 빠졌고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사과할 일을 가지고 탄핵을 하다니, 그렇게 하찮은 일을 가지고 탄핵을 하다니, 제정신입니까?”라고 질타했고 “193명 의원들이 탄핵을 다 잘한 일이라고 주장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그 화면을 TV에서 자주 보여주면 오히려 한나라당, 민주당에 유리한 것 아닙니까?”라고 맞받았으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누가 죽인 게 아니고 알아서 자살한 겁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도 “열린우리당은 길 걷다가 지갑 주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갑을 주웠으면 경찰에 신고해야죠.”라며 탄핵의 반사이익을 얻으며 실력 이상으로 지지율이 치솟고 있음을 짚어내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방송토론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제일 잘한다”, “시원하고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불판을 바꾸자’는 민주노동당의 호소에 반응했다.

 


 * '74'회 글과 그림은 7월 8일 실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거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중앙선관위의 권고의견을 존중해 동시당직선거 일정이 완료된 후 게재하기로 결정, 오늘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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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차떼기’와 정치개혁
     : 민주노동당, ‘오세훈법’으로 지구당 폐지라는 유탄을 맞다.






2003년 12월 26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가 삼성, LG, 현대차 등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집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불법 자금의 규모도 규모지만 대기업과 한나라당 간에 불법 자금을 전달하는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007 가방이나 쇼핑백에 만 원 권을 넣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쪽’ 이회창 후보의 모금은 달랐다. 거액의 돈을 실은 차를 통째로 넘기는 방식,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150억을 탑재한 현금수송차량 키를 전달하는 이른바 ‘턴 키’ 방식의 범죄행각은 마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수사를 지휘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은 823억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쪽은 120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혔고 정치인 30여명, 기업인 20여명을 기소했다.


이런 천문학적인 불법 정치자금이 동원되는 고비용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며 정치개혁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4당 합의에 따라 2003년 11월 13일 박세일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이하 정개협)가 출범했고 국회 정치개혁특위도 이런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오세훈법’이라고 하는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의 개정판이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은 ‘클린 정치’를 표방하며 정치관계법 개정을 집도했다.


그러나 오세훈이라는 집도의는 민주주의 정당정치에 대한 철학 자체가 부재한 돌팔이였다. 국회 정개특위는 “돈은 묶고 입은 풀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 불신’에 기초해 정치 자체를 ‘다운사이징’했다. 돈도 묶고 입도 묶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먹는 하마’로 낙인찍힌 지구당의 전면 폐지였다. 민주노동당과 같이 진성당원제로 운영하고 풀뿌리 주민운동과 깊이 결합하는 방식의 정당에게 지구당 폐지는 대중정당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소액 정치후원금 1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되게 한다거나 46석의 비례대표를 56석으로 늘리는 등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공간을 없애버리고 선거시기에도 합동유세를 배제해버림으로써 정치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해버렸다.


민주노동당은 정개협이 제안한 비례대표의 과감한 확대(100석)와 같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게 만드는 정치개혁에서는 소극적이면서 정치를 원내 정치로만, 명사 정치로만 한정하려는 ‘오세훈식 돌팔이 시술’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차떼기로 인한 정치권 전반의 불신 여론은 정치의 축소에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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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부자에게 세금을!”

    : 민주노동당 ‘부유세’ 캠페인, 종합부동산세 신설로 결실을 맺다.
 




민주노동당은 시민사회와의 밀접 접촉을 통해 희망의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슈퍼 전파자의 역할을 해왔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제기했던 민주노동당의 대표 브랜드인 ‘부유세’도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한뇌연)이 2003년 3월 민주노동당에 부유세 도입 서명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해 옴에 따라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2003년 6월 26일 민주노동당은 한뇌연과 함께 부유세 도입을 통한 장애인 연금법 제정 2백만 서명운동 발대식을 개최했다. 한뇌연 사무국장 최영신은 “장애인 연급 도입을 위한 재정확충 방안을 찾던 중 민주노동당이 지난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부유세를 검토하게 됐다”며 “장애인 연금 도입이 소수 약자를 위해 일하는 민주노동당의 뜻에도 부합된다고 판단해 서명운동에 결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은 전 지구당 조직을 가동해 2004년 총선 전까지 1백만 명 서명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자들에게도 동의를 받으며 부유세와 장애인연금법 제정 문제를 부각시켰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조세체계로는 소득격차의 확대로 인한 양극화를 잡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부유세는 부동산과 같은 보유자산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재산세 중심의 조세체계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유세는 이미 유럽의 OECD 국가들은 지난 70년간 시행해 온 역사가 있고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스리랑카, 파키스탄에서 시행 중이었고, 남미 콜롬비아와 우루과이에서도 시행하고 있었다. 부유세에 대한 동료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민들이 체감하는 것은 경제위기 이후 빈부격차가 더 벌여졌고 개인 소득세와 재산세가 소득재분배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제력이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대한민국의 불평등 정도도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캠페인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그해 9월 종합부동산세 신설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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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민주노동당, 노동자, 농민의 정당으로 우뚝 서다
   : 민주노총, 전농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따라 전국정당의 기초를 마련하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따라 60만 조직을 거느린 민주노총의 인적 물적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성장했다. 배타적 지지란 민주노총의 공식 의결 기구에서 지지하기로 한 정당에 대해서 나머지 정당을 배타하고 지지한다는 뜻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적 선택을 총연맹 최고 의결기구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한다는 뜻으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산하 조직에 연말정산시 세액공제가 가능한 정치후원금을 조직적으로 모금할 것을 의결하고 각급 공직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재정을 충당했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배타적인 지지방침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지지단체’ 몫으로 당의 의결기구에 민주노총 지분을 배정했다.

 

민주노총에 이어 2003년 11월 3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결정했다. 이로써 지역조직이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지역과 공단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 편중돼 있는 민주노동당은 명실상부한 전국정당화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민주노동당에게 농촌지역에 강력한 대중적 지반을 갖추고 있는 전농의 참가는 백만 원군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이렇게 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건설된 강력한 대중조직의 진지 위에 서 있는 정당이었다. 의원 한 명 없는 정당임에도 전국 구석구석에 지구당 조직을 갖추고 다수의 활동가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대중조직과의 밀접한 관련 때문에 가능한 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의 당원 가입 비율은 조합원의 5%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합원에 대한 정치교육과 정치 선전, 그리고 대중적 모금과 같은 다양한 정치활동이 진행되긴 했으나 조합원들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경험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리고 배타적 지지방침에 따른 민주노총과의 밀착관계는 대기업과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을 감싸고도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는 부정적 효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타적 지지를 선언한 대중단체 내부의 정파 구도가 당 내부에 투영되어 당에 과도한 정파 패권을 관철시키려는 요구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 에너지들이 응축되면서 당은 숙의 민주주의에 의한 당론 결정이라기보다 패권 정파에 의한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소수파 의견은 배제되고, 당은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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