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칼럼'에 해당되는 글 79건

  1. 2017.08.22 [칼럼] 4차 산업혁명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고광용 연구위원
  2. 2017.08.03 [영광군민칼럼] 왜 1.2명 전후의 저출산율은 요지부동인가? 고광용 연구위원
  3. 2017.08.03 [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한겨레) 정의당의 새 리더십이 마주한 도전
  4. 2017.07.28 [기자수첩] 내가 머리를 기르는 이유, 서진석 기자
  5. 2017.07.26 [과학기술정책 칼럼] 프로세스의 한계와 주체의 진화, 관료주의의 사회적 비용. 안오성 전문위원
  6. 2017.07.26 [정책자문위원 칼럼(내 생각은/김형모)] 공무원 임금구조 개혁해야, 동아일보
  7. 2017.07.18 [칼럼]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할 만 한가?, 고광용 연구위원
  8. 2017.06.08 [칼럼] 재벌개혁의 적기: 재벌, 부모인 국민들께 효도 할 때, 고광용 연구위원
  9. 2017.05.24 [칼럼(레디앙 공동)] 오래된 적폐, 권력기관의 쌈짓돈 특수활동비, 고광용 연구위원
  10. 2017.05.22 [장석준 칼럼(프레시안)] 홍준표 24%, '지지율 뻥튀기' 불씨가 살아있다, 장석준 부소장(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1. 2017.04.11 [장석준 칼럼(프레시안)] "심상정, 유승민, 홍준표는 대선 완주하라", 장석준 부소장(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2. 2017.03.03 [고광용 칼럼]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 사드배치 對中 한류 국민피해액 약 14조... 당장 중단.취소해야, 고광용 연구위원
  13. 2017.03.03 [장석준 칼럼] 미래정치센터-시사저널 공동 "대기업 노조부터 변해야 한다", 비정규직 정책대안2: '하후상박 연대임금' 스웨덴 모델로 비정규직 임금차별 해소 가능, 장석준 부소장(글로벌정치..
  14. 2017.01.12 [장석준 칼럼] 한국은 이미 세습 귀족 국가, 대안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과 6월 항쟁 30주년의 단상-, 장석준 부소장
  15. 2016.12.29 [장석준 칼럼] 촛불과 포퓰리즘: 포퓰리즘은 나쁜 게아니다, 장석준 부소장
  16. 2016.12.14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칼럼] 국정농단과 낮은 정부신뢰 속 정부의 책무성 회복의 길(정부신뢰 회복의 길), 고광용 연구위원
  17. 2016.12.13 [장석준 칼럼](미래정치센터-프레시안 공동) 탄핵 이후, '촛불'은 무엇을 할 것인가?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은?, 장석준 부소장(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8. 2016.11.29 [장석준 칼럼] (프레시안-미래정치센터 공동 우리가 광장에서 배운 세 가지, 장석준 부소장(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9. 2016.11.25 [장석준 칼럼] 촛불에 필요한 것은 폭발력이 아니라 지구력 (프레시안-미래정치센터 공동)
  20. 2016.11.24 [장석준 칼럼] 이 정국의 변수는 촛불을 든 우리다! (프레시안-미래정치센터 공동)
  21. 2016.11.08 [영광군민신문-미래정치센터 공동 칼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거버넌스 붕괴, 하야가 답
  22. 2016.08.10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칼럼] 법치의 진짜 얼굴은 국민이 아닌, 국가가 법 지키라는 것이다!
  23. 2016.08.02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 칼럼] 왜 노벨 과학상 한 명 배출하지 못할까? 고광용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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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16.05.16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동시게재 칼럼] 우리나라 국민들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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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6.02.03 [미래정치센터 칼럼] 누가 정치엘리트가 되는가?
  28. 2016.01.22 [미래정치센터 칼럼]망하기는 힘든 사회, 대한민국
  29. 2015.12.29 [미래정치센터 칼럼] 무능한 정치한 정치를 넘어서기 위하여
  30. 2015.12.22 [미래정치센터 칼럼] 전세난민, 규제완화, 악화되는 주거환경
연구소 칼럼2017.08.22 17:15

4차 산업혁명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고광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 승인 2017.08.22 16:26 |

 

 

고광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8월 2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핵심정책토의’에서 ‘4차 산업혁명 기반 구축으로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 방안을 보고했다.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3분기 내에 신설하고 기존 성장동력 사업을 검토하여 연말까지 범정부 차원의 ‘4차 산업혁명 종합대책’을 만들기로 했다. 인공지능 시대 일자리 감소 예측이 이어지는 만큼, 새로운 직무분석에 기반한 일자리 변화 예측모델을 개발하여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인공지능·뇌과학 등 기초·원천기술 및 자유공모 예산을 50%까지 확대하여 연구자 중심의 자율적·창의적 연구개발 체계를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4차 산업혁명을 하도 떠들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엄청나게 회자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4차 산업혁명은 2016다보스 포럼에서 처음 제기됐는데 당시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을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이 발달된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기술혁명”이라고 정의했다. 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이 2030년에는 세계 GDP의 15달러를 증가시키는 등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국제 관계까지 전례 없는 수준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을 정보의 유통과 활용경로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사물인터넷 기술로 정보를 수집하고, 빅데이터로 정보를 축적하며, 클라우드 기술로 정보를 분석하고, 최종적으로 인공지능 기술로 예측과 추론, 판단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큰 특징은 초연결사회인 동시에 초지능화 시대로 모든 것이 연결되고 보다 지능적인 사회로 진화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 무엇이 문제일까? 인공지능과 첨단로봇이 발달하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면서 일자리 감소가 예견되고 있다. 자동화 기술이나 컴퓨터 연산기술 향상, 제조 및 광물업 분야는 로봇과 3D 프린팅이 대체하면서 단순반복적 사무행정직이나 저숙련 일자리 등이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즉, 당장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생산직뿐만 아니라 사무관리직 일자리가 필요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머신러닝·딥러닝 기술을 발달로 재무관리자, 의사, 고위간부 등 고숙력 직업 또한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고용정보원은 각 직종별 인공지능과 로봇의 기술적 대체가능성 조사결과, 2025년에 1,800만명 가량(전체 취업자의 70%)이 일자리에 위협을 받을 것이라 보았다.

4차 산업혁명! 큰 문제인 것은 맞다. 정부가 서둘러 대비할 정도로 기술발달에 따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차산업혁명위원회 신설과 기초·원천기술 및 자유공모 예산 확대는 칭찬할만 하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연말 4차 산업혁명 종합대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반영되었으면 한다. 우선, 기술혁신과 규제완화를 통한 신성장동력 창출 및 신산업 전문인력 양성은 과거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허구에 가깝다. 오히려 정부-기업-대학-연구소 등의 공고한 연계를 통한 과학·수학·공학 등 융합교육(STEM)과 스타트업·창업기업들의 실패 및 성공요인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중간지원조직의 신설 및 육성, 전략적인 지원과 지적재산권 보호가 더욱 중요하다. 둘째, 독일과 미국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가치사슬 단계별 체계적 지원체계를 탄탄하게 해야 한다. 셋째, 기초·원천·자율형 연구에 대한 투자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평가의 전문성과 공정성 확보, 차세대 신진연구자들의 중장기 도전적 연구에 대한 폭넓은 지원이다. 넷째,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의 장밋빛 미래 이면에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 및 유전자편집기술의 윤리문제 등 각 영역·부문별 잠재위험에 대한 면밀한 측정과 평가, 규제방안도 함께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보다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연구개발이 경제성장과 연구자 중심의 과거 패러다임에서 국민 삶의 질 향상이라는 궁극적 목표 아래 사회문제 해결형·국민참여형 연구개발로 일대 전환이 요구된다.

고광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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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8.03 13:37

왜 1.2명 전후의 저출산율은 요지부동인가?
- 지난 10년 간 100조원, 2017년 24조원에 이르는 국민혈세는 어디로 -

고 광 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현재의 보육정책은 부모들로 하여금 어린이집에 보낼지 집에서 키울지 선택하게 한다. 어린이집에 보내는 경우, 매월 35만원 정도 보육료가 나오는 데 보육료 결제카드를 발급받아, 매달 어린이집에서 결제한다. 실제 학부모는 보육료를 받는다 하지만, 돈은 그대로 어린이집으로 가기에 사실상 현물(보육)서비스를 무료로 받는 구조다. 반대로 가정양육수당의 경우, 매월 10~20만원의 현금이 부모에게 계좌이체 된다. 직장생활을 하든, 전업주부든 실제 가정양육수당보다 어린이집 현물서비스의 가치비교에서 후자가 크기 때문에 으레 어린이집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저출산 연구용역을 진행하면서, 3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공통적인 응답을 하였다. 첫째, 보육료(보육서비스)든 양육수당이든 현금으로 주길 바라며, 둘째, 어린이집에 보내든 집에서 키우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현금으로 달라고 한다. 셋째, 어린이집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놓고, 어린이집 공급 부족으로 경쟁률이 심해 몇 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지금의 보육복지 구조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같이, 국가가 많은 돈을 보육에 쓴다고 하지만, 점차 보육환경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어린이집이 계속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최근의 한 여성․육아복지 관련 연구자에게 “지금의 육아복지 구조는 어린이집 등 보육서비스 제공기관에 지나치게 유리하다. 실제 2006년부터 10년 간 정부가 투입한 저출산 예산은 100조원이 넘는데 그 중 75조원(3/4) 가량이 어린이집과 보육기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출산율은 2006년 1.25명에서 2016년 1.17명으로 하락했다. 출산학부모에게 직접 현금으로 지급하고, 부모들이 자식 양육방식을 선택하게 하면 좋겠다. 대체로 부모들은 그것을 원한다"고 하니까 그 연구자가 하는 말이 “부모를 어떻게 믿나? 부모가 그것으로 보육 외 비용 등 딴 데 쓸지 어떻게 아냐? 어린이집에서 키워야 제대로 키울 수 있다. 그런 보육지원 정책이 맞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는 사고가 안 터지나? 부모를 왜 못 믿나? 자기 자식을 키우는 일이다. 부모와 어린이집 중 누가 더 자기 자식을 잘 키우는 데 관심이 많은가? 부모는 분유와 기저귀, 보육기관 입소 여부를 부모가 자유롭고 현명하게 선택․구매 할 것이다. 그런데 자녀가 있으세요?“ 그 연구자는 자녀가 없었다. 그냥 추측이었을 뿐이다. 진정 의문이다. 일부의 문제는 나타나겠지만, 부모가 자기 자식의 양육수당을 직접 현금으로 받는 다고 도덕적 해이가 넘쳐날까?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저출산 대응을 위해 지난 10년간 100조원 이상을 쏟아부었고, 2017년 올해는 24.1조원을 투입한다. 그 많은 보육을 위한 정책과 돈은 저출산 문제를 해소하고 있는가? 국가는 아이 낳고 키울 만 한 보육친화적 사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정부가 정책 수립이나 집행 과정에서 공청회나 간담회를 실시하여 이익단체와 정책대상 국민(부모)들의 의사를 경청하고 있긴 한다, 그러나 진정 전자 못지않게 후자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 왜 제도를 설계하면서, 시스템과 이익단체만 보고 정책대상자를 보지 않을까? 복지관료들의 복지기관들에 대한 관리통제권한, 어린이집 등 복지기관들의 정부보조금 두 가지를 포기할 수 없는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혹시 교묘히 결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정부(Government)가 아니라 거버넌스(Governance) 시대다. 엘리트(정부+전문가)들이 좋은 것을 국민들에게 만들어 떠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전문가가 국민들의 의사와 선호를 잘 듣고 피드백하면서 정말 국민들이 느끼기에 원하고 맞는 방향으로 고민하고 바꿔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래야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또한 국(군)민들은 앉아서 기다리거나 방관하고 만 있을 게 아니라 24조원의 저출산 예산뿐만 아니라 400조원에 이르는 정부예산 즉, 우리의 피같은 세금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 지켜보고 감시하면서 지자체와 정부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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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8.03 09:20

 

 

 

 

장 석 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미래정치센터 부소장

 

정의당의 얼굴이 바뀌었다. 이정미 의원이 새 대표가 됐다. 지금껏 진보정당을 이끌어온 분들은 대개 진보정당 바깥에서 경력과 실력을 쌓았다. 반면 이정미 대표는 순전히 진보정당 안에서 커온 인물이다. 물론 이 대표도 노동운동 경력이 있지만,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진보정당을 통해 진보정당과 함께 성장한 첫번째 진보정당 리더십이다. 숱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한국 진보정당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진 셈이다.

하지만 덕담만 할 수는 없는 처지다. 정의당 새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한 지금은 진보정당운동의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엄청난 과제들이 밀려오고 있다. 어떤 과제들인가?

첫째,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길들어온 정치 문법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간 진보정당은 조직 노동을 핵심 기반으로 삼으면서 리버럴(자유주의) 정당 지지층 일부로부터 표를 가져왔다. 조직 노동 내 기반은 당장의 성과가 아니라 추상적 이념을 통해 유지했고, 리버럴 정당 지지층에게는 민주대연합의 왼쪽 날개로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 존립(성장이라기보다는) 모델은 벽에 부딪혔다. 조직 노동은 언젠가부터 사회운동의 진취성을 잃은 채 고립되고 있다. 리버럴 정당과 지지층이 겹치는 현실은 끊임없이 진보정당의 정체성 혼란을 낳는다. 촛불혁명 여파로 개혁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리버럴 정권이 들어선 상황에서 이런 한계는 더욱 절실히 와닿는다.

다른 한편으로 정의당은 촛불항쟁과 조기 대선 와중에 새로운 정치 문법의 가능성도 엿보았다. 기성 양대 정당에서 뚜렷한 대변자를 찾지 못한 젊은 세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소수자들이 진보정당 지지층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지난 20여년간 넘어서지 못한 한계를 돌파할 길이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한데 이들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모으려면, 진보정당의 기존 정치 관행으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는 당장의 성과가 중요하다. 이정미 대표가 국회에서 이랜드 임금 체불 문제를 쟁점화한 사례의 확대, 반복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진보정당은 과거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일상 정치를 펼쳐야 한다. 나날의 성과로 새 지지층을 규합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진보정치의 전형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

둘째, 한국 사회 개혁의 다음 단계를 하루빨리 설계해야 한다. 촛불 민심은 일단 민주당 정부한테 당장의 개혁 책임을 떠맡겼다. 개혁 과제 중 상당 부분이 진보정당이 2000년대 초부터 주장해온 것이어서 진보정당으로서는 존립 근거가 흔들린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이 처음 주장했을 때는 근본 개혁 과제였지만, 지금은 이미 응급처방이 돼버렸다. 한국 사회의 발전과 쇠퇴 속도에 비해 너무 늦게 착수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문재인 정부의 개혁 약속들이 실현되더라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오히려 정부 정책이 성공할수록 곧바로 더 근본적인 다른 개혁 처방들이 필요해지게 될 것이다. 일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이뤄지고 나면, 이제는 정규직-비정규직을 아우르는 노동시간 단축이 이야기돼야 할 것이다. 국공립대학 통합의 가닥이 잡히면, 그다음에는 21세기에 걸맞은 대학 교육 내용과 방식의 혁명이 의제에 올라야 할 것이다. ‘부자 증세-복지 확대’는 마땅히 ‘보편 증세-보편 복지’의 전주곡이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지금부터 이런 ‘다음’ 개혁 과제들을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 개혁이 있다. 정당 정치를 살리고 대의제의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물론 진보정당은 줄기차게 이를 외쳐왔다. 하지만 개헌 일정이 맞물린 앞으로 몇 년간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이다. 선거제도 개혁의 승부를 봐야 할 시기다. 한 세대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진보정당은 단순히 자기 생존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갱신을 위해 정치 개혁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하나같이 어려운 도전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나마 촛불혁명 덕분에 ‘잃어버린 10년’을 끝냈기에 지금 이런 전환의 요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 혹은 ‘좌파’는 본래 ‘전환’을 만드는 세력이고 그렇기에 다른 어느 때보다 ‘전환’기에 존재를 드러낸다. 이름값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원문보기: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5275.html#csidxa2bfae88c14e92ca28e4c8b331ef0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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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7.28 13:44

내가 머리를 기르는 이유

 

큰 주먹을 휘두르며 ‘으리!’를 외치는 사나이, 탈모가 진행 중인 퇴물 헤비메탈을 생각나게 하는 사나이, 특히나 큰 머리만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나이, 바로 김보성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기약 없이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체중감량과 격투기 수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김보성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뉴스를 보니 그는 소아암 환자의 가발제작에 기부할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던 것이었다. 말로만 의리를 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그는 내 인생에 쑥, 들어와 버렸다.

 

                         

무더위가 시작된 작년 7월, 눈을 가릴 듯 말듯 한 머리카락들을 더 이상 자르지 않기로 했다. 숱 많고 굵은 머리카락을 묶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지인들은 땅콩 같은 뇌가 만개할 만한 표현들로 내 장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탈모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기르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고, 친구들은 그 산적 같은 머리를 보고도 애인이 뭐라 안 하냐고 물었고, 친형은 ‘주진우 기자’를 따라서 머리 기르는 거 같은데, ‘현실은 김어준’ 이라는 등의 코멘트를 남겼다.

평가와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들이 SNS를 통해 “미용실 예약해줄게.”라고 말하는가 하면, 엄마는 줄곧 “꼭 사는 것 포기한 애 같아, 너!”라며 머리 자르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꼬마가 내 머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엄마에게 “엄마, 저 아저씨는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기도 했다. 아빠는 어느 날부터 나를 ‘잘생긴 이외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머리를 묶다 본의 아니게 남자들을 쫓아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장발 남성’의 장점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면 안 돼.”같은 ‘성역할 강요’를 겪다보니 소수자성을 피부로 느껴볼 수 있었다. 글과 말로만 배워온 페미니즘 같은 소수자에 관한 학문과 운동을 더 깊게 배울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정상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나, 설득할 기회조차 없는 무수한 행인들의 ‘시선’을 감내해야하는 순간들이 그러했다.

소아암 환자 기부금 모금을 위한 종합격투기 행사에서 ‘파이터 김보성’은 ‘1라운드 TKO패’했다. 동시에 남성으로서 35cm를 기른 3년, 50대의 나이에 격투기를 위해 13kg를 감량한 과정, 6급의 시각장애를 안고서 2분 35초를 버틴 링 위의 사투에서 그는 ‘완승’했다. 나 또한 계획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하지만 30cm를 만들어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머리카락을 기부했고, ‘머리 긴 남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들과 꾸준히 대화하고 설득해나가고 있다.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처럼 소수자 운동도 조금씩 자라는 일일 테다. 매번 큰 노력을 쏟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쑥, 자라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오늘도 머리를 기르게 만든다

*이 글은 인권연대에 동시 게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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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7.26 16:54

프로세스의 한계와 주체의 진화, 관료주의의 사회적 비용

 

 

안 오 성 전문위원

(항우연 책임연구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기반 전문위원)

 

 

1. 중대형 도전적 과제 개발 PM으로 트레이닝 받았던 회상

 

KAIT-50 개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에, 2가지 일을 했었다. A-B-A-End 형식으로.

세부계통중심의 시스템설계통합 -> 착륙장치개발 기술관리 PM -> 시스템설계통합 기반 지상-비행시험 준비와 T/S -> 10회 비행시점 퇴사

B의 일을 할 때, 일생을 바꿀만한 빛을 조우했다. B의 과업을 리드했던 록히드 마틴의 최고 엔지니어 (구루라 할 만한 인물) 한 사람이 세계 굴지의 프랑스 기업을 상대로 매주 그리고, 2 ~3회 전면적 현장기술협상 "전투"에서 번번이 윈윈으로 이끄는 장면은, 한 사람의 기술전문인이 얼마나 큰 가치를 길어 낼 수 있는지를 눈 앞에서 보여주었다.

해당 기업은 번번이 밀리고 그에 따른 비용을 자신들이 치르게 되자, 자신들이 가진 베테랑급 기술협상 전사들을 대거 투입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역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첨예한 기술논리 대결은 한 순간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수개월이 요구되는 해석과 검증의 방향과 기준을 정하고, 이력을 관리하는 디테일과 다른 이슈와 연결짓는 통합성, 그리고 댓가를 감내하는(-을 관계의 일방적 소통이 아닌) 결정이 포함된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건 해 볼만하다 여기고 2년동안 그를 copy 했다. 논리 전개에서 그가 사용한 접속부사까지... 학습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자 매주 진행되던 Teleconference 에서 구루의 도제 방식은 다음 단계로 진화하였다. 100 여개의 기술이슈 리스트를 정리-업데이트하고 회의 사전에 릴리즈하여 협의의 기준점을 선행-선점하는 것 정도는 기본기이다.

그중 우선순위와 전략을 따져서 두어 시간 프랑스와 비디오를 통해 협상하는 자리. 상대는 PM과 기술관리 PM 그리고 변호사와 서기 등 보통 3~5명으로 구성된 "군단"이 들어오고 모든 대화는 회의록으로 남아 하나의 구속력을 가지는 자리.

하나의 이슈를 해결하려 동원한 논리가 다른 이슈에서는 곧이어 역으로 이용당하거나 이용할 때의 쾌감과 긴장이 지배하는 게임의 자리. 회의에 들어오기전 수많은 자료와 기술 기준서를 뒤적이고, 공학적 계산까지 들먹이며 논리축적을 한 뒤에, 설계의 문제와 해결방향을 서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전투하던 자리. 그 자리를 통해 수 백가지의 기술현안들이 일정지연이나 단 한 건의 비용증가 없이 해결되었던 자리.

그 자리를 그는 내게 내어준 뒤에, 상대의 군단에 밀릴 때까지 그 어려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밀려서 어쩌지 못하는 듯 하면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step in 해서 다시 초토화 시켜버리고 미소짓는...

그가 떠나고 1년 정도 홀로 협상을 응대했던듯 하다. 착륙장치 개발은 T-50 개발에서 기체구조를 제외한 하드웨어 시스템중 가장 큰 규모의 "순수개발" 프로젝트였다. 여타 시스템은 기존 제품의 최소변경 혹은 중급변경후 구매와 그에 따른 설계통합이 주된 과업이였던 것과 대조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여유와 유머는 배우지 못했다. 나의 상태가 그걸 담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고로... 하지만 내가 그토록 그를 copy하고자 했던 것은 일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인간다운 면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맘 깊은 곳을 짓누르던 의미에 대한 갈급, 허무주의는 그 때 어떤 길을 찾은 듯했다. 그 의미를 우연한 계기로 오늘 다시 깊이 생각해본다. 주체는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퇴화하는가와 관련하여. 그 때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한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는 상상보다 매우 크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평소의 준비와 공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방향도 중요하지만, 임계치에 이를 수 있는 "세기"도 필요하다. 그 진화의 임계치를 넘어설 세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니 그 방향과 세기에 어떻하면 늦지 않게 이를 것인가? 혹은 그렇게 도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2. 어제 조우한 문제의식과 화두

 

도전적 연구과제의 기획과 리딩에 있어서, MBA의 훈련, 체계공학, PMP 교육 등은 모두 도구일 뿐이다. 이 모든 것를 익힌다 해도 그가 전사로 거듭나지는 않는다.

국가 과학기술연구체제의 진화를 위해 그동안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중심으로 TF가 구성되어 마련한 "성실도전 체제" (기존 성실실패제도와 대조된 개념으로, 사후 약방문식(연구개발 실패에 따른 제제 면제를 위한)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기획단계(전략과 구체적 사업계획을 정렬시키는)-진행단계(중도중단이나 계획변경에 보다 유연한)-결과단계(계획대로 판단이 아닌 과정중심과 가능성 중심 판단, 실패의 자산화 포함)의 전면적 업그레이드를 유인하려는 프로세스와 제도의 개혁 시도)와 관련한 매뉴얼과 훈련-교육시스템 정비가 약 1년 남짓 활동으로 마무리 되었고, 어제는 그 교육 시범운영 결과와, 체제의 질적 업그레이드가 논의되었던 자리였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내 눈에 다시 들어왔다.

"고기 잡아주기 보다 낚시하는 법을.." 이라 하지만, 아무리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해도, 그 보다 비견할 수 없이 더 중요한 것 - "바다에 대한 열망" - 은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 이 모든 지식과 툴을 이용해 국가 중대형 과제, 융합과제에 있어서 세밀한 비전과 전략, 혁신적인 기획과 그것을 구체적인 사업계획으로까지 표현하고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열망은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열망의 문제인데...?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TF 동료들에게 여러차례 던졌다.

프로세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무엇을 자극하고 대안을 성숙시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의 답변은 계속 "교육체계 설계"로 회귀한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주체성의 진화와 분화"의 가치를 놓치고 있는 우리사회를 반영하듯... 교육으로 인간이 진화할 수 있다는 이 가정의 유효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공교롭게도 같은 날 오후에 또 다른 회의, 소속 기관의 All-Hands Meeting 에서도 동일한 화두에 이른다. 향후 중장기 비전과 관련한 회의였으나 허점이 너무 많이 보여 준비한 분들에게 결례를 무릎쓰고 많은 말을 쏟아내고 "지적질" 했지만, "이 모든 아이디어가 무슨 상관?" 일까라는 생각.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이 누구인가? 내가 아는 가장 착한 사람들... 성실한 연구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제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20년전 보았던 것은 빛이었다. 2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훈련해준 리더십의 본. 하지만 리더십만 있다고 진화의 폭풍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관찰자의 인식체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도 관건이므로.

빛을 본다는 건, 행운이면서도 자기 자신이 만드는 인연이기도 하다. 그 행운과 인연이 만들어지는 장소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소통의 환경보다 더 좋은 환경을 상상 할 수 없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본이 있어야 하겠고 그 본을 제대로 바라보고 copy하는 팔로워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시 인간의 문제, 출연연이라는 기관의 문제로 회귀하지 말고 환경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니클라스 루만이 주장하였듯이 성찰과 진화는 주체적 존재만이 가능하다. 그 진화를 자극하는 지각과 능동적 행위(베버, 1968), 그로 인한 자가적 피드백과 자가진화의 선순환은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만 가능(루만, 1991)하다. 따라서 "그래도, 니가 잘하면 되지..." 라는 편리한 책임전가형 대안전에 던져야 할 질문은, "연구자들과 출연연은 과연 주체인가?" 라는 질문.

중대형 과제 잘 따오는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구조. 그리고 그걸 위해 본부의 연구전략을 정렬시켜야 하는 구조. 모양새 좋은 장기연구에 부처와 기관이 영합할 수 밖에 없는 구조. 그게 아니라도 중소형 과제 따와서 소사장으로 일하면 되는 구조를 깨치고, 전략적 기획자요 DARPA PM형 리더로서 성장하는 좋은 경로를 만들고 이러한 중간 Agent를 육성하는데 공을 들여야 "내일의 정책적 대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질적 경로로의 성장을 섬김으로 도와줄 자치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미래부 시킨 일, 상위 부처의 존재감을 위한 여러행사에 동원되는 현재의 부처종속-앵벌이 환경에서는 이런 리더가 만들어질 수도, 리더십이 발휘될 수도 없는 구조이다.

 

3. 출연연과 연구자의 주체적 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회초리?

 

나는 믿지 않는다. 관료주의의 폐부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면서 출연연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특히 그들이 오피니언 리더임을 자처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일인지하만인지상 의식의 발로, 권력에만 고개숙이는 나르시즘 환자, 공공의 판단을 편협한 판단으로 왜곡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또 믿지 않는다. 관료주의에 모든 문제를 전가시키는 사람들을. 그들도 밤잠을 설치고 일하는 이들이고 누구보다 현실적 한계를 맛보는 이들이다. (특히 하위직 5~6급일수록) 누구보다 공공의 가치를 위해 도전했다가 길이 막히고 감사의 전횡과 국회의 무지, 시민사회의 요구에 응급으로 대응해야 하는 부담, 과학기술정책의 허약한 기반위에서 부실한 꿈을 팔고 실적경쟁해야하는 상위자들의 행위기제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4급이상 고위관료 중심으로 뭉친 한선재단은 바로 고위관료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이들 5~6급 하위직 관료에게 전가시키고 개혁의 방향을 I자 경로니,  Y자 경로니 하며 한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믿지 않는다. 리더 몇사람 바꾸면 잘 될 것으로, 사업기획체제나, 과제평가체제, 인사/기관 평가제도, 예산 경로와 배분율, 예비타당성 조사분석 시스템 좀 바꾸면 잘 될 것으로 기대하는 순진한 상상과 개혁 아젠다의 단순화에 집착하는 정책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적폐의 반대급부로 우연히 형성된 기회와 가치요인을. 지적호기심의 대가로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관료주의에 쩌든 출연연은 자율을 위해서라면 어떤 양보도 합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자율의 모양새를 갖춘 온갖 꼼수와 "기-승-전-도로 관료 시다바리"의 전력을 성찰하는 견고하고 입체적인 개혁안이라야 신뢰를 받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토론하고 싶다. 출연연을 고소하는 여러 스피커들과 만나 나의 무지를 깨치고 싶다. 그가 출연연을 희생양 삼아 고소하는 국가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개방된 장에서 토론하고 싶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인식이 현상을 거론함인지 뿌리를 거론함인지. 산학연 연계성 단절에서 출연연이 주체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의 범위가 어디라고 보는지-전세계적 기술수명 단축으로 이 문제는 선진국들도 골머리 싸매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 대기업 및 세계적 기술수준을 선도-혹은 견주어야 하는 출연연의 "공공-선행기술" 연구기능으로서의 본질과 이미 다 검증된 것을 빠르게 사다 쓰길 원하는 국내 대기업들의 추격형 혁신체질의 부조화-충돌 문제를 풀기 위한 그의 거대 전략은 무엇인지?,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해야 하는 기능과 연구자들의 Down Shoot 에 따른 부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전문인들을 육성하고 공급해야 하는 기능과 그럴만한 연구유닛 안정성-자율성을 전연 보장받지 못한 환경의 대립, 그리고 희망을 주는 사례로서 이런 환경이 가능했던 일부 사례에서 혁신적으로 일어난 기술개발-기술이전의 놀라운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된 질좋은 일자리를 젊은 이들에게 성공적으로 제공한 사례를 이해나 하고 있는지. 그 어느 기관장보다 혁신적으로 조직를 개혁한 상향식 조직개편의 시도자이자 과학기술최고 행정기관 장관을 00 명이나 배출한 모기관 원장이 미래부 일개 과장에 의해 "사전보고 없이" 조직개편 했다고 복도에서 꾸중이나 들어야 하는 모욕적 사건을 알고나 있는지. 그 기관장에게 그럴 정도면 타 기관은 어떤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출연연 거버넌스 문제만 아니라 과학기술 정책기관이 가진 모든 성찰과 개혁담론이 관계행정 기관에 사전에 보고되고 스크리닝 되어 정작, 국정에는 행정부가 원하는 목소리만 전달되는 기제를 알고나 있는지.

무엇보다, 이 모든 갑갑함 속에 갇힌 연구조직 현장에서, 창의적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주제를 사회-산업-공공문제 해결과 주도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 연구전략과 이를 추진할 리더십의 성장이 얼마나 제한되었을지 이해하고 있는지.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서 DARPA형 PM 교육 훈련 운운, 산업연계협력 운운이 사치가 아닐런지. 반대로, 그런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 놓으면 00억 3년으로 해결할 과제를 000억 10년 과제로 뻥튀기 하여 부처예산 경쟁에 활용하기 위해, 이런 저런 사전기획사업 만들고 예타를 들먹이며 여러 해 끌고 다니다가 버려버리는 ("저 생각 없는 연구자 놈"이라는 딱지와 함께...) 못된 관료주의가 지금도, 아니 최근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그래서 기어이 대형 사업을 만들게 되면, 부처 산하기관과 지방분원 등등으로 Lion Share를 돌리고, 퇴직 관료의 보직을 강제하며 그 부실의 이면을 출연연을 앞세워 성과 앵벌이시키거나 매도하는 사례가 횡횡함을 알고나 있는지.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강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용하는 두 가지의 "그림자 기제"가 작동함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 "통합 권한"을 가진 강력한 행위자에게 자연스럽게 강화되는 하위기관에 대한 "배제지향형"(루만, 1997, 618~620) 갑질 기제이다. 예를들어, 조금만 말 안들어도 각종 불이익의 화살을 날리는. 그리고, 이로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개인"(루만, 1997) 즉 연구자에게 쏟아지게 된다. 둘째, 통합-통제 권한을 강화한 최상위자의 철학 - 국정운영자 - 이 대개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구조속에서 면피의 구실을 찾게 된다. 그리고 쏟아지는 과학기술정책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행정기관에 돌리고, 행정기관은 다시 출연연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군상의 이면에, 사회체제의 진화적 방향에 대한 철학부재가 존재한다. "기능중심 체제분화와 분화에 따른 복잡도를 줄이고 분화주체의 자율을 지원하기 위한 구심력(공동의 가치 믿음 비전 형성에 관한 상위자의 소통역량과 정책적 리더십, 분화되고 세밀한 제도) 형성(루만, 1997) 에 있음을 이해하는 행정전문가가 잘 보이지 않거나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다. 관료 눈밖에 나니. 공부 부족한 경세인들은 행정관료가 다 짜주는 판 위에서 안온한 엘리트 의식에 잠들어 있다. 시민들은 답답하여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에 의존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우리 사회체제의 문제해결 역량은 후퇴하는 이 악순환의 군상..

끝으로 그 모든 나르시즘 스피커들의 장기적 안목 없는 지적질과 파편적 개혁안으로 만신창이가 될 뿐 아니라 점점 "Infantilize" 되는 국가 주변기관 (출연연 포함)과 국가간의 신뢰형성 상실의 문제를 심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국회의원의 영웅적이면서도, 영웅적일수록 피상적인 국정감사 이슈폭탄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유아적인지. 이 모든 구조적 적폐로 인해 우리 시민사회와 미래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손실의 크기, 싱크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름하고 위기 의식을 감지하고 있는지... 이 모든 의문의 끝에서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지고 싶다. 출연연 때리기로 귀착된 그들의 파편적 개혁 아이디어들이 실행되었을 때에, 이 모든 구조적 문제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을지?

관료적 합리성과 관료주의적 성과주의를 위해 자율성을 억압한 대가, 사회적 비용이 지대하다. 실질적으로 부처에 종속된 연구자, 출연연, 정책연구자 및 관련 기관, 연구회...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르는 가장 큰 비용은 어떤 성과 창출을 위한 "기회비용"의 손실도, 낮은 경제적 파급효과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진화하는 연구자"의 가치, 전문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진화한 그들만이 채우고, 예방하고, 창출할 수 있었을 그 "미지의 가치"들일 것이다. (폰 브라운의 아폴로 계획의 허점을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바꾸어낸 휴볼트가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모든 자율적 사유와 성찰은 딱 관료들이 허락하는 선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상은 불경죄로 통제당한다. 관료의 통제를 벗어난 학계의 저명인사들은 전략적 기획의 강조, 질적 평가의 강조에서 맴돈다. 이미 수십년 거론되었어도 아무 진전이 없었던 레토릭이다. 현재와 같은 강력한 중앙통제 속에서는 지방도, 각종 기관도, 그리고 이들에 속한 리더십도 딱 관료들 수준까지만 성장이 가능하다. 관료가, 아니 관료주의가 이 사회의 모델이요 기준이요 한계가 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이런 사회인가?

연구자와 출연연은 보호하고 성장시켜야 할 국가자산이다. 까대고 회초리 든다고 진화하지 않는다. 회초리는 충분한 교감과 신뢰 위에 마지막으로 들어야 한다. 운이 좋으면 회초리 들지 않아도 대개는 그 과정에서 해결될 것이다.

 

2017.07.26.

 

- 글재주 한계로 자기자랑이 지나치게 들어있다. 실상, 주변에 누가 안되면 다행인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는다 -

 

* 그림설명: 1960년 NASA 리더와 전설적 인물 폰브라운의 권위에 대항하여 기존의 아폴로 계획의 문제점과 자신의 대안을 설명하고 있는 John C. Hubolt. 역사가들은 휴볼트의 아이디어와 설득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달탐사 계획은 실패하거나 상당한 비용과 일정이 허송되었으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미국의 성공은 John C. Hubolt라는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한 성실한 전문인이 국가 초대형 사업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소신을 갖고 표현할수 있는 정책광장의 존재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 등의 환경을 소유한 미국사회의 진화된 체계가 자연스럽게 취한 사회적 편익이었다. 이러한 환경의 구조적 개혁, 민주적 리더십은 광대한 사회적 편익을 양산하는 울타리이다. 과학기술의 진화는 사회의 민주성과 비례한다. (https://history.nasa.gov/SP-4308/ch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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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7.26 14:01

[내 생각은/김형모] 공무원 임금구조 개혁해야

2018년도 최저임금이 16.4% 인상됐다. 시급으로는 7530원, 월급으로는 157만3770원이다. 정부는 영세상공인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은 근로 빈곤층이 많고 임금 격차가 심각한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에서 꼭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단기간에 이뤄진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부작용도 막아야 한다.

정부가 간과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공무원 임금이다. 2017년 공무원 호봉표상 9급 1∼3호봉과 8급 1호봉의 경우 기본급이 2018년 최저임금인 157만3770원 미만이다. 공무원은 지속적으로 임금이 올랐는데 최저임금 인상으로 더 큰 폭의 공무원 임금 인상이 예상된다. 참고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공무원 평균 기준 월소득은 447만 원에서 510만 원으로 63만 원, 14.1%가 올랐다.

하위 호봉 급여를 올리면 당연히 그 상위 호봉 기본급도 연쇄적으로 인상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민간에 비해 월등히 높은 공무원의 고임금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공무원 임금도 대폭 올릴 수밖에 없다면 이 기회에 고질적인 공무원 임금체계 문제, 즉 과도한 연공서열식 호봉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길 희망한다. 즉, 호봉 구간 자체를 축소하는 개혁이다.

일반직 6급은 32호봉까지 있고 교원은 40호봉까지 있는데, 5∼10개년 계획을 수립해 매년 1∼2호봉씩 줄여 최대 20∼25호봉 정도로 바꾼다거나 하는 식의 임금체계 개선 말이다. 만약 2018년에 교사 최대 호봉을 40호봉에서 38호봉으로 줄인다면 기존 38호봉 이상인 교사는 퇴직 시까지 자기 호봉이 유지되고, 38호봉 이하 교사는 38호봉에서 호봉 인상이 멈추는 방식이다.

당분간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상공인 지원 예산에 정부 자체의 인건비 부담 폭증까지 이중고가 예상된다. 더군다나 문재인 정부는 임기 중 17만4000명이나 되는 신규 공무원 채용을 약속하지 않았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공공부문의 구시대적 연공서열의 호봉제 개선과 하후상박 임금 개혁의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김형모 ‘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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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7.18 16:44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할 만 한가?

 

 

고광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6월 29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제16회 국가과학기술심의회에서 ‘2018년도 정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했다. 2018년도 총 R&D 예산은 14조 5,920억원이며, 2017년에 비해 약 1850억원(1.3%)이 증가했다. 주로 예산이 증가한 항목은 4차 산업혁명 대응(0.31조원), 기초연구·기반조성(0.3조원), R&D기반 일자리(0.15조원) 분야 예산이 크게 증가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25.6%나 증가한 4차 산업혁명 대응 예산이다. 정부는 이 분야를 기초과학, 핵심기술, 기반기술, 융합기술, 법·제도 등 5대 영역으로 나누고 총 1.5조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과학기술 분야 측근들이 후보시절부터 강조했던 부분이 상당히 반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R&D 예산안에 4차 산업혁명 대응과 일자리 창출, 기초·원천연구 강화 등을 제1 가치로 두었다. 그러나 사실 박근혜 정부부터 4차 산업혁명 대응 및 신성장동력·일자리 창출, 기초·원천연구 확대 예산은 지속적으로 크게 늘려왔던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박근혜 정부 R&D 투자방향과 별 차이가 없으며 어떤 R&D 혁신을 하려는 지 드러나지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대비도 주로 유망기술개발 지원과 규제완화에 집중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자율주행기술은 대규모 자본력이 요구되기에 대기업이 집중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기술지원 대상이 중소기업 보다 대기업과 국책연구원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불확실한 변화에 이은 어떤 분야가 신성장 산업 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성장 동력 창출이라는 이유로 또 다시 대기업에 대한 특혜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OECD와 World Bank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체 R&D는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고 대기업 중심인 반면, 중소기업 R&D는 대단히 미미하다고 지적한다. 4차 산업혁명 관련 유망기술 개발과 그에 따른 미래 부가가치의 정의로운 배분을 위해 대규모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과 우수아이디어·특허기술력을 지닌 중소기업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에 맞게 지적재산권 보호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핵심·기반·융합기술 등 기술발달 단계별 지원은 좋으나 그에 따른 각 영역에서 잠재위험에 대한 측정과 평가, 규제 연구도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데 빠져있다. 미국 백악관 ‘4차 산업혁명 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자율주행기술·인공지능, 자동화에 대한 기술지원뿐만 아니라 위험평가 및 관련 규제에도 집중하고 있다. 또한, 공학·수학·과학 등의 창의·융합교육(STEM)에도 집중하고 있다. 인공지능·자율주행 기술의 경우 일자리 감소, 바이오 분야 유전자편집기술의 잠재위협에 대한 체계적 대응 및 규제 마련이 요구된다. 동시에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수학·공학·뇌과학 등의 융합·학제적 접근, 창의교육이 필요하다.

OECD에 따르면, ‘15년 GDP대비 기초연구 비중은 한국이 0.7%로 세계최고 수준이며, 정부 R&D 예산의 40%를 이미 넘어섰다. OECD·World Bank·서울대 국양 교수 모두 한국의 기초연구는 활성화 되어 있지만 기초연구 경쟁력이 현저히 낮으며 오히려 연구를 저해하는 요소가 많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평가(인력·과정·결과)의 신뢰성·공정성·전문성 등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동시에 실패가능성이 높지만 중장기 도전적 연구, 연구자주도 자율형 연구에 대한 폭넓은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고광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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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7.06.08 09:50

재벌개혁의 적기: 재벌, 부모인 국민들께 효도 할 때!
- 재벌의 기원과 성장 검토 -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80%대 국정지지율, 김상조 교수가 비교적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에, 아마도 곧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로 채택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김상조 교수는 재벌개혁의 전도사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국가경제의 흥망을 재벌, 대규모 기업집단이라고 하는 주요 기업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주지된 사실이다. 모든 정부는 재벌과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한 다양한 경제정책을 활용함으로써 국가경제를 드라이브하곤 하였다. 재벌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컸는가를 보려면 재벌기업의 기원 및 성장, 정부와 재벌 간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장면 정부 시기는 한국재벌의 태동기로 분류되며 산업혁명을 위한 원초적 자본축적 기간에 해당된다. 특별히 대기업이라는 게 있지 않고 형성되는 과정이었고 재벌정책이랄 게 없었다. 정부는 크게 귀속재산 불하, 수입무역 허가권, 원조자금과 물자 배분, 은행대출의 특혜 등을 통해 기업들의 성장을 적극 도왔다. 기업성장 및 재벌의 형성은 경제 원리보다 정치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재벌의 특징은 기업형성 원천이 귀속재산 불하나 해외원조, 은행대출 특혜 등 정부 특혜에서 주로 비롯되었다. 정부의 선택적인 독점권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신흥기업들은 관료에게 뇌물을 주는 등 부정부패가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정경유착의 시작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9년 22억 9500만 달러의 해외 차관을 들여와 그 중 10대 재벌에게 배분한 액수는 5억 200만 달러로 전체 차관의 약 22%에 해당하는 외자를 재벌에 투자했다. 은행융자 특혜와 더불어 재벌에 부여된 막대한 차관지원은 그들의 성장과 자본축적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위주 성장일로로 재벌들은 양적·질적 발전을 꽤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재벌 성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시장에서 독·과점적 구조에서 이윤추구를 할 수 있었기에 빠른 자본축적이 가능했다. 둘째, 은행 및 외자차입의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자본증식이 가능했다. 특히 정부로부터 집중적인 금융지원의 대상이 된 산업은 정유, 화학비료, 화학섬유, 시멘트산업과 섬유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다. 셋째 집중적인 수출촉진책에 따라 각종 세제, 관세, 은행융자 측면에서 특혜를 제공했다. 이러한 정부와 신흥재벌 간에 정부 특혜와 대기업 뇌물은 부패로 이어져 정경유착의 강한 고리를 만들었다.
전두환 정부는 재벌들의 비판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권창출의 정당성 부재와 국민들의 낮은 지지 속에 재벌에 대한 핵심적인 규제 7가지를 규정한 공정거래법의 제정을 강력히 추진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대규모기업집단 지정, 지주회사 설립 및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및 부당내부거래 행위규제 실시 등을 하였다. 지난 박정희 정부 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재벌정책이 없거나 대부분 특혜로 일관되어 왔으나 전두환 정부는 비교적 외형을 갖춘 재벌규제 정책이 실시됐지만, 실제 추진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실시하기보다 제한적인 수준에서 그쳤다.

이후 노태우 정부부터는 전두환 정부에서 최초 설계했던 재벌규제 장치가 정착되고 강화되었다. 김영삼 정부이후 금융실명제 도입 등 규제정책이 등장하고 김대중 정부에 가서는 강력한 재벌 구조조정 및 체질개선을 하면서, 정부와 재벌 관계가 수직적 협력관계에서 규제자로써의 수직적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반면 노무현 정부로 가면서 살아남은 재벌들의 글로벌 기업으로 빠른 성장과 함께 막대한 자본력과 유능한 인력은 정부 통제수준을 넘어섰고 결국 수평적 관계로 변모하는 전기를 맞이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에 대한 규제적 입장에서 접근했기에 수평적 대립관계에 놓였으나 재벌규제 정책은 실효를 보이지 못해 정권 말에 결국 규제를 푸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위기 극복 방안으로 규제개혁,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지주회사 규제완화, 법인세 인하 등 적극적 규제완화를 통한 경제회복을 도모하면서 정부와 재벌은 수평적 협력관계로 전환되었다.

재벌형성의 기원과 성장, 정부와 재벌 간의 관계를 돌이켜 볼 때, 재벌, 대규모 기업집단은 정부를 통해 성장했고, 그 정부는 결국 국민들의 세금과 저축, 노동을 바탕으로 기업지원 정책을 해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국민이 키워준 재벌이고 대기업들이다. 국민이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신흥기업들을 탄생시키고, 각종 금융특혜와 독과점 시장 제공 및 일감몰아주기, 규제완화를 통해 유아기에 젖을 먹이고, 청소년기에는 밥과 영양제를 주어 무럭무럭 자라게 해주었다. 노태우 정부 이후에는 규제를 통해 올바르게 크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성인이 되고 이만큼 잘 살게 되었어도 계속해서 법인세율도 깎아주고, 고용 확대 및 정규직 전환, R&D 투자 시 대폭적인 세제혜택도 주고 있다.

이제는 재벌이 대기업이 되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국가경제의 대들보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장시간 노동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하청·재하청 기업과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골목상권까지 침투하고 있다. 천문학적으로 창출된 이익을 사내에 유보시켜 신규 인력채용이나 R&D 투자, 기술혁신에 적극적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모 대기업은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위해 일감 몰아주기, 전환사채 발행, 편법 증여뿐만 아니라 계열기업 간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방해하고, 주식가치를 하락시키기도 했다.

재벌 대기업들을 국민들이 열심히 50여년 넘게 건실하게 키워났으니, 부모인 국민들께 이제 효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재벌 대기업은 사내유보금 중 현금성 자산은 바로 풀고, 비현금성 자산은 팔아서라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노동시간 단축 및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청년실업 해소에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할 때다. 하청·재하청을 만들어 본청에 발생된 추가이익은 하청기업과 재하청 기업에 나누고, 하청기업 노동자들의 인건비를 본청의 80% 이상으로 올려서 중소기업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한다. 중소상공인들의 삶의 터전을 뺏는 골목상권 침해는 자제 해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상속·증여세 탈루, 법인세 감세 주장 또한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

김상조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입각할 가능성이 높은 이 때가 재벌개혁의 적기다. 대기업 사내유보금 투자를 통한 청년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 해소, 대·중소기업, 본청·하청기업 간 초과이익공유제 실현,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재벌의 편법적 상속·증여세 탈루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추징, 각종 대기업 세금감면 혜택 축소 및 법인세율 인상 등 제대로 된 재벌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볼 만 한 시기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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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7.05.24 17:12

오래된 적폐, 권력기관의 쌈짓돈 특수활동

사전적·사후적 통제장치 마련 국회 감시 및 견제해야
    2017년 05월 23일 10:42 오전

검찰 실세들의 ‘돈봉투’ : 특수활동비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의 부적절한 ‘돈봉투’ 만찬이 도마에 올랐다.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최순실게이트 수사 참여 간부 검사 6명과 만찬을 하는 도중 안 국장이 간부 검사들에게 70만원에서 1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넸고, 이 지검장도 ‘답례’로 법무부 과장 2명에게 100만원식을 전달한 것이다.

검찰과 법무부의 돈봉투 만찬 파문은 약 290억원에 이르는 법무부 특수활동비 문제로 번지고 있다. 그 돈봉투가 바로 특수활동비로지금껏 비밀유지 수사 목적의 지출에 한정한다는 특수활동비 규정과 맞지 않게, 소위 ‘격려금’ 즉, 검찰 실세들의 쌈짓돈으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적폐, 특수활동비 규모 약 8,900억원: 필요하지만 무엇이 문제인가?

특수활동비는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수사, 이에 준한 국정수행활동 등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로, 주로 정보제공자에 대한 사례금, 정보활동비, 정보원 관리비 등에 주로 쓰인다. 따라서 법적으로 편성단계에서 세부내역 없이 총액으로 편성되어 집행 후에도 그 세부내역이 공개되지 않는 예산이다. 그렇다보니 영수증 없이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을 부풀리거나 사적인 용도로 써도 확인되지 않기에 오래된 적폐의 대상이었다.

이미 2015년 8월 임시국회에서 국정원의 불법 민간인 사찰 등의 의혹이 제기되면서 약 4,700억 원에 달하는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논란이 된 바 있다. 특수활동비는 국정원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의심되는 미래부, 국민권익위 등을 포함한 약 19개 부처에 걸쳐 정식 예산으로 배정되어 있다. 2016년 기준 19개 부처 및 기관에 약 8,900억원이 특수활동비 예산으로 편성됐으며, 이중 국정원이 약 4,860억 원으로 가장 많고, 국방부 1,783억원, 경찰청 1,298억원, 문제의 법무부는 286억원 청와대 266억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특수활동비는 목적상 그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재정운용의 투명성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실제로 홍준표 경남지사와 신계륜 전 의원이 여당 원내대표, 국회 상임위원장 때 특수활동비를 생활비나 유학자금으로 사용하여 문제가 되었다. 2006년 9월 국회 감사청구에 의해 4개 부처 특수활동비 감사를 실시했는데, 상당 부문 유관기관 간담회 개최, 화환·조화 구입 등 업무추진비 용도로 사용했으며, 구체적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증빙서류가 없어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해외 특수활동비 유사 사례와 교훈: 지출목적 증빙서류와 정보공개 필요

영국에서는 지난 2009년 하원의원들이 지원 비용을 남용하면서 정권교체까지 이루어졌었다. 영국 하원의원들은 250파운드 이하의 비용 청구에 대해서는 영수증이 필요 없다는 규정을 악용하여 기저귀, 유모차, 파이프 수리 등 사적인 용도의 비용을 신청한 것이 밝혀졌다. 집을 7채 갖고 있으면서 주택대출금 지불을 위해 수년간 10만 파운드를 신청한 의원도 있었다.

이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 등 6명의 장관이 사임하였다. 결국, 노동당 100명, 보수당 35명의 현역의원이 201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권은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넘어갔다. 이후, 영국은 독립의회윤리기관(IPSA)이라는 기관을 설립하고 모든 의원의 비용 신청 하나하나를 웹사이트에 일일이 공개하고, 의회도 인터넷을 통해 모든 의원에 지급된 수당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외무성 기밀비 정보공개소송 사건이 있었다. 2001년 4월, 정보공개법이 시행되면서 정보공개시민센터라는 단체가 외무성의 외교기밀비의 지출관련 서류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를 하였다. 외교기밀비는 외교관들이 외국에서 정보수집이나 외교 공작활동을 하면서 식사비나 정보제공 대가로 쓰는 돈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구체적 사유를 밝히지 않은 채 전부 비공개하겠다고 정보공개시민센터에 통보했다.

이에 정보공개시민센터는 외무성의 비공개처분에 대한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기하면서 외교기밀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외교기밀비가 대사관 파티비, 외국에 온 국회의원 접대비 등으로 쓰인 실태가 밝혀지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외교기밀비 예산은 15% 삭감되고, 일부 문서는 부분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2009년 2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순수한 정보 수집 대가 지급은 비공개, 정보수집·외교활동 목적 식사비 지출은 지출일·지출액만 공개, 국회의원 등 접대비 지출은 모임 목적·참석자·개최일·지급일·금액 등을 공개하도록 하였다.

영국과 일본의 사례를 토대로 특수활동비 집행에 따른 정보공개와 지출목적별 증빙서류 제출 기준 마련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특수활동비에 대한 사전적·사후적 통제장치 마련, 국회 감시·견제·공개 필요

아무리 특수활동비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할지라도 용처에 맞게 집행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사전적·사후적 통제장치를 마련하여 국회가 감시 및 견제하고 스스로 공개해야 한다.

우선, 사전적 통제장치로 특정업무 예산 항목 신설 및 증빙서류 요구, 국회 차원의 전면 공개가 요구된다.

첫째, 특수활동비의 범위를 특정업무를 명시하는 예산 항목을 신설 및 적용하고, 예산을 편성토록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처에 할당된 특수활동비 필요성과 세부 지출계획 및 용처를 명확히 제시하고 지출목적별로 최소한의 증빙서류(영수증)를 요구해야 한다. 결국, 국회가 특수활동비를 평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다음 해 특수활동비의 배정 부처 및 규모를 재조정할 수 있게 된다.

둘째, 국회에서 쓰는 업무추진비성 특수활동비는 전부 공개해야 한다. 국회의 국회의장단, 상임위원장, 원내대표가 쓰는 업무추진비 성격(유관기관 간담회, 화환·조화 구입, 식사비)의 특수활동비는 지출서류(목적)와 영수증을 첨부하도록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을 공개하는 것처럼 국회 홈페이지에 공개토록 해야 한다.

다음은 사후적 통제 장치로 결산제도 도입과 정보공개가 요구된다.

첫째, 특수활동비 사후 결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국회에 세부 집행내역과 증빙서류를 모두 공개하도록 하고, 부적정 집행은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지출목적별 증빙서류 등 국회 제출 기준 마련이 요구된다. 국정원·외교부·경찰청 등에서 지출하는 정보비의 경우 기본적으로 비공개로 하되 지급인원·총액 제출. 정보수집·외교활동 목적 식사비는 지출일·지출액 제출, 기타 부처 간담회·식사비 등 업무추진비 성격은 지출목적, 참석자, 개최/지급일·금액·장소(혹은 영수증)을 국회 제출토록 해야 한다. 만약 지출목적별 제출 기준 미충족 시 모두 위법·부당 지출로 간주하고, 해당 금액 환수 및 예산 삭감이 요구된다.

둘째, 무엇보다 특수활동비 사용내역을 적정 공개시점(5~10년 이후)을 정하여 국민에게도 정보공개 해야 한다. 대법원이 지난 2004년 국회 특수활동비가 비공개 대상 정보가 아니라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국회와 국정원 등은 특수활동비 세부내역 공개를 공공기관 정보공개법 등을 들어 거부하고 있다. 아무리 기밀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국회 제출 기준에 따라 각 부처에서 제출된 증빙서류를 5년 이후에는 모두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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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5.22 16:45

홍준표 24%, '지지율 뻥튀기' 불씨가 살아있다

[장석준 칼럼] 선거제도 바꿔야 '촛불 정신' 산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장석준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를 받아든 시민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게 반갑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심상정 후보의 득표가 예상보다 적었다지만, 그래도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거둔 성적의 2배가 넘었다. 문제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였다. 그는 24.03%를 득표하며 무려 2위를 기록했다.

많은 이들이 이 결과에서 불길한 조짐을 보았다. 내세울 후보도 변변찮던 당이 유권자 네 사람 중 한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 촛불의 열기에 녹아내린 첫 번째 적폐라 생각됐던 새누리당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마땅히 승리의 단맛을 만끽해야 할 때에 다들 입 안에서 서걱대는 모래에 얼굴을 찌푸린 것도 이해할만하다.  

새 정부의 개혁 행보에 대다수 국민이 지지를 보내는 지금도 유일하게 딴 목소리를 내는 집단은 자유한국당이다. 대통령이 시민군과 민주 열사들의 넋을 부를 때 이 당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는 미친 소리를 해댄다. 위헌심판 대상이 돼야 할 이런 당이 제1야당 노릇을 하려 한다니 아직 여름은 멀었건만 열이 뻗쳐오르고, 혹시 내년 지방선거가 이들이 다시 활개 치는 발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25%를 50%로 만드는 마법 중 하나는 깨졌지만  

25%는 확실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치다. 촛불혁명 와중에 대통령 퇴진/탄핵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여론이 20% 안팎이었다. 홍준표 후보는 그 최대치를 자유한국당 지지층으로 복원한 셈이다.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에서는 40% 선도 넘어섰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두려움을 느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저들의 지지율이 20% 대를 보인 사실에서 얼마간은 승리감을 느껴도 좋다. 제6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한국당과 그 전신들이 20% 대 득표율에 머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한국당의 핵심 지지층이 다른 지지층의 결합 없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전에도 범새누리당의 핵심 지지층은 30% 언저리였다. 그러나 이것이 각종 선거에서는 눈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늘 50%에 가깝게 부풀려진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20~30% 대의 지지를 50%에 가까운 선거 결과로 만드는 마법이 작동한 것이다.

탄핵 정국을 거치며 그 마법 중 하나가 촛불에 타버렸다. 그것은 미치광이 극우 이념을 경제적 실용주의로 포장하는 마법이었다. 경제적 실용주의의 자리를 채운 것은 보통 '경제성장' 구호였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동원되기도 했다. 아무튼 범새누리당 세력은 이 마법을 통해 핵심 지지층에 10~20%의 유권자들을 더한 지지연합을 구축하곤 했다. 그러나 이 마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의 철저한 무능이 드러나면서 핵심 지지층 외의 지지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이게 수치로 나타난 게 홍준표 후보의 득표율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법 중 다른 하나는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마법은 바로 승자독식 선거제도다. 어떻게든 30% 넘는 지지연합을 구축한 범새누리당 세력은 한 표라도 더 많이 득표한 후보가 당선된다는 단순다수대표제 원리에 따라 다수의 소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머쥐곤 했다.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단순다수대표제였기 때문에 지지연합의 규모가 다른 당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면 정치판을 독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았다. 두 가지 마법이 함께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지지연합을 확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승자독식 선거제도라고 해도 예전 영광을 반복할 수 없었다. 새누리당 지지연합이 와해되는 바람에 더욱 폭이 넓어진 다당 구도가 다시 자유한국당의 과거 회귀 노력을 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으로 나눠 살펴보면, 옛 마법의 불씨가 시뻘겋게 살아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구, 경북의 결과를 보자. 이들 지역에서도 촛불혁명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일단 이 두 거점 지역에서도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그러나 각 당의 득표율을 일렬로 세워놓으면, 여전히 자유한국당이 압도적인 1위다. 이것이 소선거구제와 결합하면, 다시금 압승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이미 대선 전에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내년 광역의회 선거부터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당장 내년 지방선거가 문제다. 특히 광역의회 선거가 위험하다. 사실 유권자들의 관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대의기구가 광역의회다. 대중의 눈길은 온통 국회에 쏠려 있고, 그나마 지역 정치에 관심 있는 이들이 이름이나마 아는 것은 자기 동네 기초의원 정도다. 반면 자신을 대변하는 광역의원이 누구인지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국회와 기초의회 사이에서 뭘 하는지 잘 알 수 없는 곳이 광역의회다.  

그렇다고 광역의회가 없애도 좋은 유명무실한 기구인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새 정부의 초기 추진 과제 중 하나가 개헌인데, 개헌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로 흔히 이야기되는 게 분권화다. 중앙정부 권한 중 많은 부분을 지방정부로 이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름 아닌 광역의회가 경제 기획이나 복지정책의 상당 부분을 심의, 결정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관심의 사각지대에 계속 남겨둬도 좋을 기구가 결코 아니다.

더구나 홍준표 사례를 보라. 그가 어떻게 자유한국당 회생의 깃발이 됐는가? 경남 도지사로 독재를 자행한 결과였다. 그가 도지사로 있으면서 무상급식을 가로막고 공공의료기관을 없애도 누구 하나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 경남 도의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경남 도의회는 총 53석 중 48석이 자유한국당 아니면 바른정당이다. 두 당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몇 석 제외하고 다 새누리당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 의석 분포도 새누리당으로 당선됐던 한 명이 국민의당으로 옮기고 몇 차례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나 무소속 의원이 당선된 결과다. 지방선거 직후에는 더 처참했다. 

도의회가 사실상 새누리당 1당 독재다보니 홍준표에게는 무서울 게 없었다. 경남은 한 동안 홍준표와 새누리당의 권력 실험장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배양된 홍준표의 기고만장함이 결국 전국 무대에서 자유한국당 부활의 동력이 됐다.  

그렇다고 경남이 본래 새누리당의 독무대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지방선거만 해도 광역의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와 접전을 펼친 범민주당이나 진보정당 후보들이 많았다. 경남 창원은 진보정당 후보(당시 노동당, 현재는 정의당)로는 유일하게 지역구에서 광역의원으로 당선된 여영국 의원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역시 선거제도다. 광역의회는 각급 대의기구 중 승자독식 논리가 가장 굳건하게 똬리 튼 곳이다. 기초의회는 중선거구제이지만, 광역의회는 한 지역구에서 한 명의 대표자만 뽑는 소선거구제다. 광역의회에 비례대표 의석이 있기는 하지만, 국회와 달리 전체 의석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범새누리당 권력을 지탱하던 마법 중 하나가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엄연히 살아 있다.  

이 제도대로라면, 자유한국당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충분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경남에서는 더 이상 힘들지 모른다. 도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는데도 득표율이 37.24%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 경북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곳들에서도 자유한국당 득표율은 예전만 못하지만(40% 대), 도의원 선거를 다시 싹쓸이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자유한국당은 1년 안에 당세를 지금보다 크게 신장시키지 못하더라도 대구, 경북에서 계속 독재를 이어갈 수 있다. 부산, 경남에서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이를 기반으로 제2, 제3의 홍준표를 키워서 때만 되면 다시 중원을 향해 말을 달릴 수 있다. 승자독식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새누리당 잔존 세력이 20% 대 핵심 지지층을 넘어서는 권력 지분을 넘보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이야말로 새누리당 부활에 맞설 전략  

그렇기에 선거제도 개혁이야말로 새누리당 부활에 맞설 최적의 전략이다. 현행 소선거구-정당명부비례대표 병립제를 독일식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 의석을 정확하게 각 정당이 받은 득표율만큼 나누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정당에 그 지지율만큼의 권력만 허하자. 여기에는 물론 자유한국당도 포함된다. 이들 역시 지지받는 만큼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단, 소선거구제 덕분에 경제적 실리의 외피를 두른 채 어울리지 않는 권력을 누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광주항쟁이 북한군 작품이라 믿는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 딱 그만큼만 힘을 허락받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성장 가능성도 그만큼의 영향력 안으로만 제한될 것이다.

현 국회 임기가 3년이나 남았으므로 선거제도 개혁에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선거제도 개혁이 시급하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도 대체로 개헌 일정에 맞춰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너무 태평한 태도다. 적폐 청산이 빈말이 아니라면, 당장 내년 지방선거부터 새로운 제도에 따라 실시돼야 한다. 특히 광역의회선거를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치러야 한다. 마치 2002년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 정당투표를 처음 경험하고서 2년 뒤 총선에도 도입한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에서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경험한 뒤에 다음 총선을 이 방식에 따라 치러야 한다.  

혹시나 서울 등은 현행 방식대로 하는 게 민주당에 더 이롭다며 광역의회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새정치민주연합은 제6대 지방선거의 서울시의회 정당투표에서 45.38%를 얻었지만, 의석은 70% 넘게 차지했다.

그러나 촛불혁명은 이런 정파적 이해와 지역적 시야를 넘어서길 요구한다. 어느 곳의 촛불 시민이든 기울어진 선거제도 때문에 낡은 질서의 요새 안에 갇히길 강요받아선 안 된다. 뒤집을 수 있는 제도 때문에 외로이 포위돼 있다고 느껴선 안 된다.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다. 하루빨리 지방자치단체 선거제도 개혁을 공론화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적폐 청산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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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7.04.11 10:06

"심상정, 유승민, 홍준표는 대선 완주하라"

[장석준 칼럼] '양당 정치' 대 '다당 정치'

 

 

장 석 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촛불혁명을 둘러싼 제도적 맥락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다. 기성 정치에 보다 깊이 발을 담근 사람들일수록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의 정치 제도와 정당정치 관행이 뒤얽힌 더 중요한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양당 구도에 따른 정치(줄여서 '양당 정치'라 하자)냐, 아니면 다당 구도에 따른 정치(줄여서 '다당 정치')냐의 문제다. 이 틀은 이미 과거사가 된 박근혜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진행되는 조기 대선의 여러 양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어쩌면 ‘문재인 대 안철수’라는 표면적 대립 구도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물 밑 쟁점일지도 모른다.



양당 정치의 정점이었던 2012년 대선과 그 산물, 박근혜 정권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는 양당 구도를 강요하는 힘이 마치 중력처럼 작동했다. 이 힘의 토대는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다. 내각책임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인데다 대통령 선거는 결선투표제가 없다. 그래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전형적인 미국식 승자독식 선거다. 국회의원 선거 역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이고, 그나마 있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이런 제도 탓에 모든 관심이 1, 2위 정당으로 쏠리는 게 당연시돼왔다.

정당들은 이 제도에 적응해왔다. 아니, '적응'이라고만 하면 정확하지 않다. 민주화 초기에 이런 제도를 앞장서서 선택한 것은 주요 정당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 대중정치가인데다 열렬한 지역 지지 기반을 지녔던 김영삼, 김대중에게는 이런 제도 조합이 유리해보였고, 실제로 이를 통해 대권을 쥐었다.  

이후 한국 정치에서 여당이나 집권 유망한 제1야당이려면, 카리스마를 지녔거나 아니면 지닌 것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정치인을 갖춰야 했다. 이게 김대중 정부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이고, 지금에 와서는 한낱 소극으로 느껴지지만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전성기를 구가한 비결이다.  

흔히 차기 대권 주자로 불리는 이런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정당들은 통상적인 보수-진보 구분을 넘어서는 포괄 정당, 잡식 정당이었다. 차기 집권을 위해 상하, 전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자원을 빨아들였다. 양대 정당 중 어느 쪽이든 고위 관료, 재계 출신이 재야운동가와 공존했다. 둘 다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복지도 힘주어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이념이나 정책은 쟁점에서 늘 뒤로 밀려났다. 주요 정당 간에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진보정당이 성장하기 힘들었던 데는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이런 실용주의 정치 지형 탓도 컸다.

정치제도와 이를 둘러싼 정당들의 적응 전략이 맞물리며 양당 정치의 틀이 짜였다. 그렇다고 양당 구도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또 아니었다. 다당 구도가 등장하기 무척 힘든 제도 여건에도 불구하고 양당 구도를 흩뜨리는 힘 또한 계속 작동했다. 매번 대선에는 상당한 득표를 하거나 의미 있는 위상을 점한 3위(혹은 4위까지도) 후보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런 대선 구도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 정당 부상으로 이어졌다. 양당 정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시민사회 내 흐름이 분명히 존재한 것이다.  

이 점에서 양당 정치의 최고 정점은 2012년 대선이었다. 이 대선에서 처음으로 어떠한 의미 있는 제3후보도 없이 양강 후보가 접전을 펼쳤다. 87년 헌법과 선거제도가 수립되고 25년이나 지난 뒤에야 양당 정치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 최초로 50%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부정선거 효과는 일단 논의로 한다면)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 사람이 박근혜였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양당 정치의 모순 폭발 과정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블록(bloc)'으로 존재한다. 계급도 있고 세대도 있고 정체성 집단도 있지만, 이를 가로지르거나 아우르는 블록이야말로 권력에 영향을 끼치는 실체다. 정치를 배제한 일체의 환원론(계급 환원론이든 세대 혹은 지역 환원론이든)이 설명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런 까닭에 대중정당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블록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 데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은 항상 대중정당이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51%의 지지를 모았다는 것은 한 번의 기록 경신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51%의 대중 블록이 등장했다는 의미다. 편의상 이를 ‘박근혜 블록’이라 불러보자.

박근혜 블록에는 한국의 양당 정치 경향에 나타나는 모든 특징이 집약돼 있었다. 박근혜 블록은 참으로 다양한 집단들을 하나로 이었다. 그러지 않고야 51%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잡다한 집단들 사이의 이음매 구실을 한 것은 아버지 박정희의 카리스마를 빌린 박근혜였다. 지금이야 카리스마적 정치인은커녕 정치'인'인지도 의심받지만, 아무튼 새누리당은 그가 그런 인물인 듯 내세우는 데 성공했다. 인물 정치의 끝판은 이렇게 인물로 남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는 사기극이었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실용주의 정치의 끝판 또한 보여주었다. 야권 결집을 막고 자기 지지층을 확산하기 위해 야권의 핵심 담론을 날름 삼키는 곡예를 벌였다.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 덕분에 야권 핵심 지지자가 박근혜 후보 쪽으로 넘어오지는 않았어도 박근혜 핵심 지지층하고 거리가 먼 수도권 자가 소유자들이 별 고민 없이 박근혜 지지를 선택하는 데는 분명 큰 도움이 됐다.  

마지막은 승자독식 정치제도의 끝판이었다. 사실 노무현 정부 실패 이후 한국 정치는 전에 없던 다당 구도를 보였다. 그러나 2012년 대선은 이를 전에 없던 양강 구도의 절정으로 반전시켰다. 박근혜는 한 표라도 더 많은 자가 승리하는 승자독식 선거 논리를 '51 대 49'라는 거의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비율로 구현해냈다.  

실은 야권이 맞장구를 쳐주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2008년 촛불 시위 이후 범민주당 세력과 시민사회 내 그 지지자들은 다당 구도를 어떻게든 양당 구도로 되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20년만에 민주대연합 담론이 다시 유행했고, 범민주당의 정권 탈환에 장애가 될 만한 잔가지들은 모두 정리됐다. 가장 이질적인 방해 요소인 진보정당들마저 순치시킨 뒤에 다시 안철수 현상이 등장했지만, 이마저도 막판에 결국 정리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양강 대결 구도가 구축됐다.  

이 모든 양당 정치화 노력의 결말은 무엇이었던가? 패배한 49%는 철저히 무시됐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 '경제 민주화' 공약 폐기는 박근혜 블록에 큰 균열을 내지는 않았다. 이것들은 51%한테는 박근혜 지지의 정당성을 높여주는 의제였지 지지 여부를 좌우하는 의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블록 바깥의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집권 첫 해부터 49%의 '좌절'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촛불혁명이 타오를 수 없었다. 박근혜 블록의 와해가 필요했다. 세월호의 비극, 메르스 사태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 확인되자 완만한 속도나마 와해가 시작됐다. 그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이 파도는 해일이 됐다. 49%의 '좌절'에 더해 51% 중 상당수의 '실망(더 나아가 환멸)'이 더해지면서 촛불혁명의 대열이 완성됐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게 있다. 난공불락 같던 박근혜 블록이 결정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양당 정치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의 반대편이 영향력을 늘려 박근혜 블록의 가장자리를 허물어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당 정치의 물꼬를 트려는 힘이 박근혜 정부를 둘러싼 좌절/실망과 결합하면서 박근혜 블록의 상당 부분을 중심(지금도 박사모-탄기국으로 남아 있는)으로부터 떼어냈다.

첫 번째 계기는 국민의당의 등장, 즉 양당 구도의 야당 쪽 분화였다. 이 당은 박근혜 블록 이탈층을 정치적으로 실체화하는 도구가 됐다. 덕분에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하면서 촛불혁명의 무대 배경이 완성됐다. 안철수나 국민의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 계기는 새누리당의 분당, 즉 양당 구도의 여당 쪽 분화였다. 촛불혁명의 강력한 힘이 새누리당을 관통해 바른정당과 자유민주당이 경쟁하는 정치 지형을 낳았다. 이 지형 위에서 박근혜의 탄핵, 파면, 구속이 실현됐고, 정권 교체가 기성사실이 돼버린 조기 대선 구도도 짜여졌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란 2012년 대선으로 정점을 찍었던 양당 정치의 모순이 폭발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당 정치화 경향은 대중의 쓸모 있는 정치적 무기가 되어주었다. 촛불혁명에는, 의식했든 못했든, 다당 정치화 경향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문재인 대 안철수'보다 중요한 쟁점 – 양당 정치 회귀인가, 전면적 다당 정치인가

물론 지금 진행 중인 조기 대선의 양상은 또 다르다. 다시 양당 정치 회귀 경향이 나타난다. 역사적 관성도 관성이려니와 제도의 강한 규정력 때문이다.

5인의 주요 후보가 경쟁하는 양상 자체는 다당 정치의 모습이다. 그러나 1, 2위를 다투는 두 후보 진영에서는 양당 정치로 돌아가려는 힘이 작동한다. 문재인 지지자들 일부와 언론은 심상정 후보가 중도 사퇴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한다. 다당 정치화의 틈을 연 안철수 후보 진영에서조차 '반문 연대'라는 익숙한 프레임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 정치는 양당 정치와 다당 정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조기 대선과 이후의 정치적 각축에서 핵심 쟁점은 양당 정치 회귀인가 아니면 전면적인 다당 정치인가 이다. 어쩌면 이것이 문재인과 안철수 중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느냐보다 우리의 미래에 더 중요한 쟁점일지도 모른다.  

양당 구도와 다당 구도의 선택은 선악의 판단과는 관계없다. 둘 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다만 한국 사회는 이미 복잡하게 발전한 사회임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그 동안 양당 정치로 해결하지 못한 모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더욱 복잡해졌다. 이런 사회에는 이제 다당 정치의 처방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물론 이론상으로는 양당 정치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협상과 합의는 불가능하지 않다. 굳이 다수 정당이 분립해서 경쟁, 협상하지 않아도 거대 대중정당 안에서 분파들 사이의 경쟁과 타협을 통해 사회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경선이 한 사례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서로 이질적인 안희정, 문재인, 이재명 진영이 경합해서 만들어낸 결론인 문재인 후보는 안희정 지지층과 이재명 지지층이 바라는 바의 종합을 구현한다(?).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이게 공론에 불과함을 경험해왔다. 가령 잡식성 양대 정당은 늘 아파트 담보 대출을 끼고 있는 중산층과 무주택 서민, 청년층을 동시에 대변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집단 모두 이익을 얻는 정책이 추진됐던가? 아니다. 언제나 좀 더 영향력 있는 계층의 입장이 당론이 됐다. 두 거대 정당에서 모두 결론이 이러하니 제도 정치에서 무주택자와 같은 진짜 약자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었다. 이들 계층에게는 대의제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니 인물 정치가 과도하게 부각되기도 한다(이른바 '빠'의 정치). 얽힌 매듭을 풀라고 하니 칼로 댕강 잘라버렸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그간 양당 정치의 부조리 때문에 꼬일 대로 꼬인 모순들을 일거에 타파할 영웅을 대망한다. 대선 때마다 그렇다. 그러나 그런 영웅은 없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도 그런 영웅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21세기에 기적을 대망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런 점들을 따져 보면, 아무래도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처방은 다당 정치의 강화다. 이념과 정책의 차이, 계급-계층 대표성을 분명히 하는 여러 정당들이 분립하면서 시민사회 안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협상, 합의해야 한다. 이러는 편이 거대 정당 내부의 분파 투쟁이나 막후교섭보다는 훨씬 더 '투명하고' '지속적으로' 이해관계들을 협의, 조정하는 방식이다. 다당 정치의 강화는 꼬인 실타래를 (끊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풀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심상정, 유승민, 홍준표는 끝까지 분투하라  

나는 이번 대선이 다당 정치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길 바란다. 누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든 말이다. 그래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양강 접전의 틈바구니에서도 힘든 싸움을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도 그러길 바란다.

이들이 완주한다고 해서 곧바로 바람직한 다당 구도가 자리 잡는 것은 아니다. 기존 양당 구도가 무너졌다는 점만 제외하면 지금 국회는 촛불혁명 이후의 민심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져 있다. 20대 국회는 다당 정치에 맞는 선거제도(가령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스스로 임기를 단축해 새 국회 선거를 앞당기는 것이 역사적 사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국회가 마지막까지 촛불혁명에 부응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일단은 다당 정치 시대를 더욱더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굳혀야 한다. 그러니 심상정, 유승민, 홍준표 후보는 분투하라. 어김없이 '단일화'를 훈수 두는 구태의연한 언론보다 당신들은 훨씬 더 멀리 앞에서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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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7.03.03 13:15

사드배치 對中 한류 국민피해액 약 14조...당장 중단·취소해야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박근혜 정부의 사드배치로 인한 중국의 무역보복이 한중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지난 2일, 롯데그룹이 국방부와 사드 부지 제공 계약을 체결한 이후, 한·중·일·영문의 롯데 면세점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이 중국발 해킹 디도스 공격을 받아 3시간 동안 임시 폐쇄되었다. 그 피해액은 최대 수억원 수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중국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사드배치 결정 이후 지난 9월부터 지금껏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 관광을 중단시키고, 방송·콘텐츠 한류 수출 규제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따른 국민경제 피해액이 상상 이상으로 큰 상황이다.

우선, 최근까지 붐이 일었던 한국관광 중단 보복이다. 중국정부가 각 성의 일선 여행사에 유커(방한 중국관광객) 20% 감축, 저가단체 관광 판촉 중지, 한국 현지쇼핑 일1회 제한, 위반시 30만 위안(약5천만원) 벌금부과 지침을 하달한 것이다. 또한, 한국관광공사의 2016년 월별 중국관광객 및 관광지출액 통계를 바탕으로 2017년 유커 20% 감소에 따른 관광피해액(추정)은 약 4조 3,159억원 수준이었다. 2017년 추정피해액은 사드배치를 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2016년 총 수입액의 20%로 하였다.

둘째, 대중국 한류 문화관광 수출 규제, 일명 한한령 보복이다. CSF 중국전문가 포럼에 따르면, 한한령은 한국 문화 신규기업 투자 금지, 한국연예인, 관중 1만명 이상 공연 금지, 사전제작 합의 드라마 제외 한국드라마 방영 금지, 한국연예인 중국드라마 출연 금지 등이다. 외대 김승년 교수가 한중사회과학연구에 발표한 대중국 문화컨텐츠 수출액 및 소비재·관광 수출액 규모를 바탕으로 중국 한한령에 따른 국민경제 피해액을 추산한 결과, 약 8.9조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한령 규제가 작년 10월부터 시작했고, 중국의 보복조치가 상당히 노골화되고 있기에 최소피해액을 대중 한류 총 수출액(17.7조원)의 절반 수준으로 잡은 것이다. 이 연구가 2014년 기준이므로 2017년 국민피해액은 최소 10조원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중 한류 콘텐츠 수출이 전체 문화산업 수출의 1/3 이상을 차지하므로 직접적인 대중 방송·콘텐츠 산업(한류) 종사자들의 국민경제 피해뿐만 아니라 연관된 항공사, 유통업체 연쇄 피해, 장기 중국 진출 방송연예·컨텐츠 시장 피해까지 가늠키는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사드배치로 인한 총 국민피해액은 유커 감축 등 관광피해와 한한령 등 수출피해를 감안하면, 약 14.3조원이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서울시 2017년 예산(약 29.7조원)의 절반 수준임과 동시에 고교·대학 무상교육을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액수다. 이러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대배치를 강행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을 받아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고, 국방·외교 문제까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의 사드 배치·유지비용 1.5조원은 미국이 부담하지만, 이를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분담 인상 요구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고, 확장억제력 실행력 담보를 위한 각종 전투기·폭격기 출동에 따른 추가비용 요구 가능성도 높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도입과정의 절차적 문제와 더불어 도입 이후의 북한방어 실효성과 막대한 방위비분담 인상 및 추가 유지비용, 가시화되는 대중국 한류 국민경제 피해액 14조원을 고려할 때, 사드배치는 당장 중단 및 취소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우면 권한대행 체제에서 강행하기보다 다음 정부로 미루는 지혜가 필요하다.

 

영광군민신문 칼럼 링크: http://m.ygweekly.com/news/articleView.html?idxno=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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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7.03.03 13:06

“대기업 노조부터 변해야 한다”

[비정규직 정책대안②] ‘하후상박(下厚上薄) 연대임금’ 스웨덴 모델로 비정규직 임금차별 해소 가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3.03(금) 08:53:37 | 1428호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미래정치센터 부소장)

 

대선 주자들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사용사유 제한’과 같은 노동계 요구를 보수정당 대선후보들조차 내세우는 상황이다. 남은 것은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의 문제다. 시사저널은 ‘비정규직 문제’ 기획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현실적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견해를 담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를 해소할 방안은 없을까. 고민해볼 수 있는 대안은 연대임금제도다. 스웨덴 모델이 선례(先例)다. 스웨덴은 1980년대까지 연대임금제도를 실시해 노동시장 내부의 소득 격차를 현격히 줄였다.

스웨덴 연대임금제도에서 협상 주체는 노총과 경총이었다. 기업별·산업별 협상이 아니라 제조업 전체를 놓고 협상을 했다. 또한 기업 규모를 따지지 않고 공통 임금인상률을 정했다. 덕분에 중소기업에서는 이 제도가 없었을 때보다 더 빠르게 임금이 인상됐다. 반면 대기업에서는 임금 인상이 억제됐다.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줄어들었다.

연대임금은 특별한 게 아니다. 노동조합이 고임금 조합원의 임금 인상을 양보하는 대신 저임금 조합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협상안을 제시해 관철하면 된다. 달리 말하면, 하후상박(下厚上薄) 임금인상 방식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노사 양측의 양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 연합뉴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노사 양측의 양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 연합뉴스

지금 한국에서 이런 제도를 실시할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스웨덴처럼 제조업 전체를 대상으로 교섭할 필요까지도 없다. 산업별 교섭만 이뤄져도 좋다. 가령 현대기아자동차까지 포함된 금속산업 사용자단체와 금속노동조합이 교섭하는 것이다.

물론 노동계에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업별 노동조합들이 산업별 노동조합(산별노조)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산업별 단체협상(산별교섭)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가령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지부이면서도 단체협상은 여전히 별도로 한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기만 하고, 산업별 연대임금제도는 공허한 이상으로 치부된다. 노동계 안팎에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사회복지세 통해 증세․복지 확대 선순환 이뤄야

무작정 대기업 노동조합의 변화를 기다릴 수는 없다. 비록 과도적인 처방일지라도 지금 당장 저임금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경감할 방안이 필요하다. 그런 방안 중 하나가 강상구 정의당 대선예비후보가 제시한 ‘비정규직 차별해소 임금제도’다. 강 후보는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을 정규직 협약임금의 130% 이상으로 정하는 방안을 공약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단체협상으로 정한 임금보다 시간당 최소 30% 더 많은 임금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있다. 호주에서는 비정규직의 시간당 최저임금에 25%의 가중치를 부여한다. 즉, 비정규직은 정규직 최저임금의 125%를 최저임금으로 받는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노동시간이 짧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그나마 임금 총합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근접하려는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인 셈이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조합은 이런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의 법제화에 힘을 보태야 한다.

상대적 고임금을 고수하는 대기업 노동자들도 할 말은 있다. 언제 1997년 같은 대량 해고 위협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조선업 노동자들은 벌써 벼랑 끝에 놓여 있다. 한국이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도 아니니 현재의 임금수준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잔업과 특근에 쏟아 붓는다.

때문에 복지 확대와 이를 위한 증세(增稅)를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복지가 확대되고 교육과 주거비용이 줄어들면 노동자 가계가 지금처럼 임금에 목매달 이유도 줄어든다. 복지가 늘려면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있어야 한다. 한데 증세만큼 인기 없는 정책도 없다. 역시 악순환이다.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나서서 이 악순환을 깨야 한다. 소득세를 인상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소득세를 인상하면 1% 재벌이나 부유층뿐만 아니라 고임금 노동자도 세금이 늘어난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 만큼 소득세를 더 많이 내야 한다. 그래도 고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이게 임금 인상 자제론보다 훨씬 받아들일만한 주장일 것이다.

증세는 고임금 노동자 입장에서도 일방적 양보나 희생은 아니다. 세금 증가는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복지 증가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정부가 돈을 다른 데 쓸까봐 걱정된다면 ‘사회복지세’ 도입을 요구하면 된다. 사회복지세는 근로소득세에 부가해 걷은 추가 세수를 오직 복지 지출에만 쓰는 목적세다. 사회복지세를 통해 증세-복지 확대의 선순환을 경험하게 되면 복지증세 지지 여론도 높아질 것이다.

비정규직을 위한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의 법제화나 복지증세운동은 현재 노동계가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해 떠안아야 할 최소한의 임무다. 이조차도 안 한다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는 연대임금제도는 불가능하다. 사회연대를 위해 노동계가 전향적 입장을 제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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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7.01.12 14:22

한국은 이미 세습 귀족 국가, 대안은?

[장석준 칼럼] 러시아 혁명 100주년과 6월 항쟁 30주년의 단상

 

장 석 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촛불 시민 혁명의 미래를 놓고 말들이 많다. 박근혜 퇴진 이후에는 박근혜 체제 해체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정책 쟁점들이 부각되면 촛불 시민들 사이에서 차이와 대립이 불거질 테니 대통령 퇴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나는 이 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자의 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현 상황을 냉정히 짚는 쪽은 사실 후자다.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촛불 집회의 기본 성격은 대통령 퇴진 운동이다. 진보든 보수든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든 사드에 찬성이든 반대든 박근혜 퇴진에만 동의하면 다 모이는 게 토요일 촛불 집회다. 그래서 수백만이 모일 수도 있었고, 12월 9일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과 함께 일단락된다고 봐야 맞다. 대통령 퇴진 운동이니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나면 더 할 일이 없다. 그 이후에도 재벌 개혁이나 복지 확대를 요구하며 촛불 시위를 이어가자는 것은 실은 대통령 퇴진 운동과는 별개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자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박근혜 탄핵 성사만으로 광장이 닫혀선 안 된다고 믿는다. 촛불 항쟁의 실체는 대통령 퇴진 운동이 맞지만, 이 운동은 박근혜 퇴진만으로 승리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대통령 퇴진 운동과는 별개더라도 그 여진을 이어갈 또 다른 운동들이 없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승리는 패배의 지연에 불과했다고 재평가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민주공화국이 세습 귀족 국가로 퇴행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

대통령 퇴진 운동이 이토록 거대한 물결을 이룬 것은 위기 의식 때문이다. 그것은 6월 항쟁 이후 30년만에 민주공화국이 세습 귀족 국가로 퇴행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이다. 단순히 개인 독재가 문제가 아니다. 이 점에서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와는 다르다. 저마다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들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은 세습 귀족들의 지배가 이미 시작됐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선 전 세계에 '한국판 라스푸틴'으로 악명을 떨친 최순실을 보자. 최순실은 어떤 선거도 거치지 않은 채 막강한 권력의 주인이 됐다. 박근혜라는 허수아비가 선거에서 지지를 받을수록 비선 실세 최순실의 권력이 커졌다. 시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헌법 제1조 제2항은 처참하게 우롱됐다. 밀실에서 민주공화국 원칙을 뒤집는 반역이 자행되고 있었다.

최순실이 어떻게 그런 막후 실세가 됐는지는 한 장의 가계도로 설명된다. 최태민으로 시작해 최순득, 최순실로 이어지고 다시 장시호, 정유라가 등장하는 계보 안에 모든 의문의 답이 있다. 비록 시작이 사이비 종교와 막장 드라마라 할지라도, 이것은 틀림없는 귀족 가계도다. 박 씨 세습 권력과 한 몸이 된 최 씨 세습 권력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 시민 혁명에 기름을 끼얹은 최 씨 가문 3대 상속자 정유라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세습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학, 기업, 정당, 관료기구, 언론 등 민주공화국의 온갖 제도들이 다 정유라의 특권을 만들고 뒷받침하는 도구로 동원됐다. 최순실-정유라 모녀는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지구화 시대에 적응한 한국 귀족의 풍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정유라는 손수 SNS에 발언을 남겨서 이런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의식 세계를 투명하게 공개했다.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즉, 신흥 귀족들에게 세습은 '특권'이 아니라 어엿한 '능력'이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던 공화정은 이렇게 쉽게 귀족정으로 역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최 씨 일가의 존재와 행태가 폭로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대한민국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우리는 이미 귀족과 귀족 지망생들에게 겹겹이 포위된 신세였다. 김기춘과 우병우는 비선출직 고위 관료들이 어떻게 권한을 남용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수많은 '김기춘'과 '우병우'들의 자제는 지금 이 시간도 귀족학교와 해외 유학, 두터운 연줄망을 통해 선대의 사업을 이을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다른 시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이미 한 교육부 관료의 "민중은 개, 돼지" 발언으로 드러났다.

재벌이 새삼 비판받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재벌이 세습 권력임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는 인식마저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전체가 세습권력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중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재벌 문제도 이전과는 다른 색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삼성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3세들은 이제 '예외적' 귀족이 아니라 귀족정 전체의 몸통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때도 그랬지만 현 국면에서도 이러한 귀족 집단의 더 없이 훌륭한 상징이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게 한때는 대의제를 발판으로 권력을 구축하는 데 최대 자산이었지만, 이제 각성된 시민들의 눈 앞에서 이 자산은 최대의 허물로 반전됐다. 추문의 정점이 박 씨 가문 2세라는 사실은 시민들의 대적이 바로 세습 귀족 권력임을 생생히 증명해준다. 박 씨 가문 2세가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거대한 귀족 권력이 드디어 장막을 벗고 우리 앞에 서 있다.  

대통령 퇴진 운동의 연료는 이러한 귀족 권력에 대한 분노다. 어느새 세습 귀족 국가로 뒷걸음질 치는 민주공화국을 되찾겠다는 결의다. 촛불 시민 혁명 와중에 유난히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들(단두대!)이 환기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21세기 한국 시민들의 과제는 18세기 프랑스 시민들의 과제와 너무도 닮았다.  

전진하지 못하는 민주공화국은 반드시 퇴행한다  

6월 항쟁 30년만에 어찌 이렇게까지 됐냐고 다들 한탄한다. 이 땅의 척박한 풍토를 탓하는 자조의 목소리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박정희마냥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수성만 물고 늘어질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즘 나라 밖 상황도 우리와 썩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퇴행의 뚜렷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각국의 토양을 떠나 민주공화국 자체의 본성에 있는 것 같다.  

지난 세기 초에 유럽 여러 나라가 민주국가의 외양을 처음 갖출 때부터 상황은 모순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기도 한데,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유럽 국가들이 보통 선거 제도를 서둘러 도입한 데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이 컸다.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고 황급히 민주국가의 외피를 두른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회경제 현실은 갓 등장한 대의민주제와 화합하지 못했다. 새로 유권자가 된 대중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이 시기 자본가와 엘리트들은 이런 요구에 인색했다. 특히 1929년 전 세계가 대공황의 수렁에 빠져든 뒤에는 더욱 그랬다. 민주국가라는 정치 형식과 자본가 독재라는 사회경제 현실 사이의 모순이었다.  

사실 미국과 스웨덴 정도를 제외하면 민주국가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이 모순을 진정시킨 나라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권위주의와 파시즘이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지배 엘리트의 쿠데타를 통해서든 대중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든 민주국가를 포기하는 쪽이 다수였다. 보통 선거 제도가 확산되고 나서 불과 10여 년만의 일이었다. 이 정도로 자본주의에서 민주공화국의 유지란 쉽지 않은 과제였다.  

두 번째 세계 전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본주의 중심부에 한해서나마 대의민주제가 안정됐다. 파시즘이 패배하고 중심부 자본이 사회 개혁을 일정하게 수용하면서 사회국가(=복지국가)가 등장한 덕분이었다. 사회국가에서는 대중이 대의제를 통해 요구하는 바를 정부가 완전고용과 보편복지를 통해 보장해주었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는 동시에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민주공화국은 반드시 그 진화형인 사회국가를 실현해야만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의제를 통해 대중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어야만 대의제 자체가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민주공화국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불행히도 인류가 이 진실을 깨닫는 데는 한 차례의 위기와 격변만으로는 부족했다. 사회국가의 골격이 갖춰진 지 아직 30여 년이 채 안 된 1970년대에 이번에는 사회국가가 시험에 직면했다. 자본주의의 장기 호황 덕분에 전 지구적 지배력을 갖춘 자본 세력과 민주주의의 안정기 동안 대항력을 갈고 닦은 노동 세력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언젠가는 서로 대결해서 승자를 가릴 수밖에 없는 긴장이었다.  

이 상황에서 자본이 내세운 대안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사회국가 이전의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반면 노동 진영 일각은 기존 사회국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을 아예 사회의 일부로 되돌리자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제는 '탈자본' 사회국가로 나아가야만 사회국가의 성과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 노동당 좌파는 국영지주회사가 주요 대기업의 지배 주주가 되는 방안을, 스웨덴 노동운동은 임금노동자기금을 통해 노동자가 기업을 경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동 쪽 대안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대신 신자유주의가 일단 역사의 승자로 부상했다(나는 졸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에서 이 대결의 전말을 다룬 바 있다). 나라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사회국가 질서는 심각하게 해체됐다. 대중의 생존은 다시 정치 바깥에서('시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됐고, 대의제는 그와 무관한 빈 껍데기가 됐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현실은 무엇인가? 사회국가가 단지 사회권 보장이 빠진 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갔는가? 아니다. 현실은 그보다 더 퇴행했다. 지구화, 금융화를 발판으로 기존 노동 세력을 제압한 자본가와 엘리트들(1%)은 세계 곳곳에서 과거 귀족마냥 사회의 나머지(99%)와 격리된 채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한국만 세습 귀족 국가로 퇴보 중인 게 아니다. 전 세계 공통 현상이다. 다만 한국의 세습 귀족들이 지나치게 '압축' 성장을 꾀하다 자승자박의 사고를 낸 것뿐이다.  

20세기 역사를 통해 이렇게 두 차례의 대전환(서로 정반대 방향이었던)을 겪으며 진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공화국은 사회국가로 전진해야만 지속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국가 역시 탈자본 사회국가로 전진해야만 지속될 수 있다. 만약 사회국가로 전진하지 못한다면, 민주공화국은 반드시 귀족국가로 퇴행한다. 사회국가가 탈자본 사회국가로 전진하지 못할 경우에도 역사는 걷잡을 수 없이 퇴보한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이야기하며 지배 체제의 나팔수들은 벌써부터 유토피아의 열망을 부관참시하고 나선다. 그러나 20세기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유토피아의 허망함이 아니라 현실의 냉엄함이다. 20세기 역사가 증언한 민주공화국의 전진-퇴행의 변증법을 똑바로 봐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 현실 논리의 한 가운데에 있다.

대통령 퇴진은 귀족국가 저지의 시작일 뿐  

이것이 박근혜가 쫓겨나고 난 뒤에도 촛불 시민 혁명의 제2막이 이어져야 할 이유다. 대통령 퇴진 운동은 박근혜 퇴진으로 끝이지만, 세습 귀족 국가에 맞서 민주공화국을 지킨다는 이 운동의 진정한 목표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통령 퇴진 운동의 횃불을 이어 사회 개혁 운동이 시작돼야 한다. 그래야만 귀족국가를 저지할 수 있다. 박근혜 퇴진은 단지 이 투쟁의 상징적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촛불을 손에서 놓지 말자. 광장을 비우지도 말자. 오히려 더 많은 광장들을 열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불러내자. 역사가 말해준다. 민주주의 정치 사전에서 전진하지 않음의 동의어는 현상 유지가 아니다. 그것은 후퇴다. 퇴행이다. 노예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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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6.12.29 09:26

포퓰리즘은 나쁜 게 아니다

[장석준 칼럼] 촛불과 포퓰리즘

 

 

장석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이맘때면 신문이든 방송이든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해를 전망하느라 바쁘다. 한데 올해 연말은 이게 너무 싱거운 일이 돼버렸다. 2016년 말을 강타한 박근혜-최순실 사건과 대통령 퇴진 운동 때문에 나머지 모든 일들은 빛이 바래 버렸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뉴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벌써 9주째 수십만, 수백만이 토요일 거리를 메우는 이 현상을 뭔가 세계사적 맥락에서 짚어보려는 기사나 분석들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해외의 정치 이변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촛불 시위를 이와 대비시킨다. 2016년 내내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처럼 우울한 일들만 터졌는데 한국의 촛불 시위가 정반대 방향의 가능성을 펼쳐보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우리의 시민혁명과 세계 곳곳의 이변들을 '선'과 '악'이라는 식으로 구분하고 대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둘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면도 적지 않다.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포퓰리즘과 촛불시민혁명의 공통점 - 정치의 대중적 부활

요즘 언론의 국제 면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말 중 하나가 '포퓰리즘'이다. 트럼프 당선이든 이탈리아 국민투표 결과든 기존 틀로 잘 설명이 안 되는 정치 현상에 늘 이 말이 동원된다. 의미와 어감은 부정적이기 일쑤다. 다들 이 말에서 대중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선동정치 정도를 떠올린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 언론이 '포퓰리즘'이라 칭하는 현상 중 가장 커다란 흐름은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우 민족주의다. 트럼프 현상, 브렉시트,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의 극우파 바람(당선은 저지됐지만)에서 유사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 국민투표에서 여론을 주도한 오성운동(M5S) 지도자 베페 그릴로도 열혈 반이민 선동가 중 한 사람이다. 내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가 약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언론이 '포퓰리즘'이라 아우르는 현상에 이런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우 인종주의의 대척점에 선 정치 세력들도 있다. 이들은 외국인에 맞서 '민족'국가를 수호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사회’국가를 되살리려 한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트럼프 바람의 진정한 맞상대였던 버니 샌더스 바람, 하원의원들로부터 불신임당한 제러미 코빈 대표를 다시 선출한 영국 노동당의 풀뿌리 당원들이 이에 해당한다.  

분명 서로 정반대의 흐름이다. 하지만 이들을 포퓰리즘이라 통칭하는 시각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나아가려는 방향이 정반대더라도 현 상태에 대한 태도에서 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의 무엇과 어떻게 결별할지를 놓고 공통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공통점은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주인공인 '대중'에 있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좌파 논객 타리크 알리는 2015년도 저작 <극단적 중도파(The Extreme Centre: A Warning)>에서 2014년에 실시된 스코틀랜드 주민투표에 주목했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이끌던 스코틀랜드민족당(SNP, 중도좌파 성향)은 연합왕국(UK)으로부터 독립할지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55.3 대 44.7로 '독립 반대'가 앞섰다. 일단 '독립 반대' 진영이 승리했지만, 내용상의 승자는 오히려 독립 추진 세력이었다. 3분의 1 안팎이던 '독립 찬성' 여론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알리는 주민투표의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평한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주민투표를 앞두고 벌어진 여러 토론회에 '독립 찬성' 쪽 토론자로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대중과 정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았다. 런던 중앙정부의 시장지상주의 공세에 체념하거나 좌절만 하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말문을 열고 다시 공동의 꿈을 만들어갔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열정이 체념과 좌절을 압도했다.

알리는 이 과정을 '정치의 대중적 부활'이라 묘사했다.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는 '정치'와 '경제'를 새롭게 구획하면서 시작됐다. 생산 및 소비 영역으로 얼마간 확장됐던 민주적 결정의 영향권은 다시 축소됐다. 동시에 민주적 결정 과정에서 엘리트와 대중이 맡는 역할도 재구획됐다. 지구화, 금융화로 각 국민국가의 선출직 공직자가 실제 담당하는 권한이 대폭 축소됐고, 그나마 남은 권한도 자본의 초국적 네트워크에 맞춰 재구성돼야 했다.

결과적으로 대중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과 범위는 유례없이 줄어들었다. 민주주의의 외양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실은 더 이상 민주주의라 하기 힘든 상태(이른바 '포스트 민주주의')에 이르렀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돌출하는 정치 이변은 이런 상태에 맞선 봉기다. 스코틀랜드 주민투표에 대한 알리의 평처럼, 신자유주의 시대에 압사당한 정치를 대중 자신의 행위로서 부활시키려는 시도다.  

언론은 제도정치의 일부가 이런 대중적 흐름과 접속할 경우에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파 쪽의 접속이든 좌파 쪽의 접속이든 말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포퓰리즘'이란 그저 부활한 '정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6년 국제 면을 도배한 포퓰리즘의 사례들과한국의 촛불시민혁명은 결코 배치되는 현상이 아니다. 찬바람 이는 11월, 12월에 서울과 여러 도시의 거리를 뜨겁게 달군 광경 역시 '정치의 대중적 부활' 아니었던가. 주류 정당, 비선출직 엘리트, 재벌들이 민주공화국의 정치를 궁정과 사당, 밀실의 막장 드라마로까지 전락시키자 대중이 직접 개입하고 나선 것 아닌가. 무너진 정치를 광장에서 새롭게 정초하고 있는 것 아닌가.

트럼프-샌더스 현상, 영국과 이탈리아의 국민투표 이변, 좌우 신진 세력의 약진 등과 한국의 촛불시민혁명이 표출하는 시대정신은 그리 다르지 않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한국이든 대중은 포스트 민주주의에 맞서 정치를 되찾으려 한다. 주권자임을 생생히 경험하고 이 경험으로부터 정치의 문법을 새로 쓰려 한다. 때로 이 시도가 더 심한 혼돈으로 나타날지라도 말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성취 – 대중 스스로 선택지를 제시하다

왜 어떤 경우에는 더 심한 혼돈으로 나타나는가? 어떤 선택지가 주어지느냐에 따라 대중의 정치 행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발하기 때문이다.  

가령 선택지는 "지구화냐, 민족국가냐"일 수도 있고, "지구화냐, 사회국가냐"일 수도 있다. 국민투표로 이런 물음이 던져질 수도 있고, 각 지향을 선명히 대변하는 정당들이 총선 투표용지에 등장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지구화'의 반대항이 존재하는 선택지의 제시는 이제까지 지구화에 무력감을 느끼던 대중에게는 발언과 개입의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지구화'의 반대항이 '민족국가'냐 '사회국가'냐에 따라 모처럼 분출한 대중의 발언과 개입은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전자의 경우에 '지구화' 반대편에 서려면 '민족국가' 입장에 서야 한다. 이 경우에 대중의 관심은 민족국가를 위협하는 이주 노동자를 공격하는 쪽으로 쏠린다. 후자의 경우는 '지구화'를 반대하려면 '사회국가' 입장에 서야 한다. 이 경우에 부각되는 것은 사회국가를 위협하는 자본 세력에 맞선 비판이다.

어떤 선택지냐에 따라 정치의 대중적 부활은 이렇게 극우 성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좌파 색채를 띨 수도 있다. 영국 국민투표와 미국 대선이 기성 질서에 맞선 대중의 반란이었으면서도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짙게 띤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영국 보수당이 국민투표에 부친 "유럽연합 탈퇴냐, 잔류냐"는 물음이나 버니 샌더스가 빠진 채 트럼프와 힐러리만 유력 후보로 올라온 미국 대선 투표용지가 반란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촛불시민혁명이 앞서 나간 바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지는 너무도 간명하다. 처음부터 그것은 "박근혜 퇴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조금 더 확대하면 "박근혜 체제 해체"다. 그리고 이 선택지를 제시한 것은 기성 정치권이 아니다. 처음부터 광장의 대중이 제기했다. 촛불 시민들이 주장하면 원내 야당들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민혁명은 2016년 세계 곳곳의 정치 이변들과 마찬가지로 대중 반란이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이들 사건과 달랐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기성 정치권(혹은 그 일부)이 던진 선택지에 반응해 대중 정치가 폭발했지만, 우리의 경우는 대중이 선택지를 던지고 이를 기성 정치권에 강요하며 정치를 부활시켰다. 촛불 시민은 스스로 선택지를 던지고 답을 선택함으로써 '이중의' 주도성을 발휘했다. 광장의 길은 순전히 광장이 열었다.

이 성취는 과연 주체의 역량 덕분인가 아니면 예외적 상황 덕분인가? 일단은 후자의 측면을 직시해야겠다. 적대 세력이 박근혜-최순실 일당(+재벌)으로 쉽게 인격화됐기에 선택지가 단순해질 수 있었다. 선택지가 간단하므로 대중 편에서 기성 정치권에 압력을 넣기도 수월했다. 그래서 대중이 이중의 주도성을 발휘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질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촛불 시민들의 집단적 지혜와 의지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진짜 시험은 아직 닥치지 않았다  

문제는 기득권 세력이 현 상황의 이런 예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 뒤에는 대립 전선이 더 이상 간단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되면 광장이 선택지를 던지고 정치권이 이를 따르는 상황은 다시 역전될 것이다. 기득권 세력은 하루라도 더 빨리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개헌 논의, 반기문 카드, 대선 조기 과열 등 온갖 수를 다 쓸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박근혜 퇴진만이 아니라 박근혜 체제 해체라는 사회경제적 과제로 나아갈수록 수백만의 대열에는 금이 갈 수밖에 없다. 그간 촛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차이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 변화는 상수다. 촛불시민혁명이 과연 이 도전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까? 새로운 상황에서도 그간 시민혁명이 보여준 이중의 주도성이 지속될 수 있을까? 강요된 선택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선택지를 통한 대중 정치의 부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새 봄을 맞이하며 우리 모두 답을 찾아야 할 무거운 물음이다.  

다만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이라는 자칫 식상해 보이는 요소다. 정당은 적어도 작금의 기발한 직접민주주의(?) 아이디어들보다는 훨씬 주목 받을 값어치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의 정치적 선택지를 넓히고 선명하게 만드는 가장 유력하며 오래된 수단이 정당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분노한 자들 운동이 결국 포데모스라는 정당 실험으로 이어진 이유를 곱씹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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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12.14 17:03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칼럼]

 

국정농단과 낮은 정부신뢰 속 정부의 책무성 회복의 길
: 고약한 질문과 성실한 답변, 적절한 처벌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와 정부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재작년에 전부는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내지 못하고 눈앞에서 죽음을 지켜보기만 하는 무능함을 보여준 바 있다. 당일 7시간 동안 박대통령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작년에 메르스 사태에서 보건당국은 초기의 안이한 대처로 무려 186명의 감염자와 38명의 사망자를 냈다. 나라가 국민(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존재가 아녔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라는 속담, 임진왜란의 선조와 6.25전쟁의 이승만 대통령 등 우리 역사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이 국민들의 정부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국민들의 낮은 정부신뢰는 수치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2014년 기준 OECD 정부신뢰도 순위를 보면 한국은 26위(34%)로 중하위권에 속해 있다. OECD 평균 정부신뢰도는 42%이며, 대체로 스위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스웨덴 등 유럽국가들이 60~70% 수준으로 상위권의 정부신뢰를 보인다.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고부담 고복지의 복지국가들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국정논단은 그나마 30%대를 유지하던 정부신뢰도도 크게 하락시킬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박대통령 국정지지율은 최악의 수준인 4~5%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낮은 정부신뢰와 국정지지율은 사실상 무정부사태라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책임정치의 실종 즉, 책임 있는 정부를 구현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부터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며, 이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았다. 책무성(accountability)은 권력 행사에 대한 제도적 제약과 감시를 위해 점검과 감독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정부의 책임에 대한 개념을 저명한 정치학자 쉐들러(Andreas Schedler)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의미를 분석했다. 하나는 답변가능성, 다른 하나는 집행이다.

 

우선, 답변가능성은 ‘고약한 질문’에 대답할 의무이자 불편한 질문을 제기할 기회를 말한다. 현재,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이 있는 관련자를 문책하기 위해 국회는 3차 청문회를 진행하고 있다. 정부 공무원들은 짜증나는 질문들을 묵살해서는 안 되며 성실하고 책임 있게 답변해야 한다. 답변가능성은 정부가 국세와 예산과 같은 국가회계의 세부내용을 공개할 의무도 포함한다. 이는 법의 지배뿐만 아니라 이유의 지배를 강조하여 정부와 권력을 법적 제약과 공적 추론의 논리로 제한시키기 위한 것이다.

 

둘째, 집행은 잘한 것은 보상하고, 나쁜 행동에는 벌을 주는 것이다. 악행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따르지 않으면 악행은 언제든 반복된다. 공무원의 부정부패나 공권력의 인권 침해 등 불법적 행동에 대해서는 적절한 법적 제재가 요구된다. 현재 박-최 게이트에 대한 사상 최대의 규모의 특검이 진행 중이다. 박대통령은 검찰조사 결과 사실상 피의자 신분에 있으며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통과 후 직무정지 된 상태다. 국민들은 국정농단의 주범과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더불어 헌재의 박대통령 탄핵 인용을 바라고 있다.

 

국가 권력은 끊임없이 통제되고 감시되어야 한다. 박-최 국정농단 사태는 이러한 국가와 정부의 책무성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축적된 결과다. 정부는 국회의 견제와 불편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각종 불편한 사실과 정보를 은폐하기도 했다. 고위관료와 정치인, 대기업 회장은 부정부패 및 위법한 행위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받지 않아왔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 수습을 기회로 은폐되어 왔던 많은 것들이 국정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특검을 통해 헌법과 법률 위반에 대한 강력히 처벌이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그 길만이 정부의 책임성과 권위를 제대로 회복하고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①정부와 지자체에 불편한 질문을 제기할 의무와 성실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고, ②위법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 공무원에게는 적절한 처벌을 요구하는 등 정부와 공무원들을 문책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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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6.12.13 10:11

탄핵 이후, '촛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석준 칼럼]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은?

 

장 석 준 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다음날 전국 곳곳에서 열린 제7차 촛불 집회는 승리를 자축하는 즐거운 축제였다. 분명 대중의 승리이고 광장의 승리다. 그게 아니고는 새누리당 의원 중 절반이나 저희들이 만든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는 광경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승리라고 하기에 흔쾌하지 않은 국면임도 분명하다. 피의자 박 씨가 청와대에서 쫓겨나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판결이 아무리 빨리 나와도 내년 봄은 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때까지 촛불 시민은 실은 승리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물론 그래서 촛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광장이 닫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데 촛불을 계속 들더라도 박근혜 체제에 맞서 더 확실히 승리의 기세를 다지려면 이제 무엇을 외치고 무엇을 관철할지 고민이 된다. 황교안 내각을 손 봐야 한다거나 재벌 개혁,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박근혜의 자진 사퇴냐, 탄핵이냐를 놓고 벌이던 열띤 논란에 비하면 이 고민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짧아도 내년 봄까지 석 달은 족히 될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고민에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들을 잠시 훑어보자.

1905년 러시아, 1987년 한국, 2011년 스페인  

장면1. 1905년 러시아  

1905년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러시아는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느라 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되자 그간 묵혀두던 모순이 폭발하고 말았다.  

1월 22일, 20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황궁으로 행진했다. 차르(황제)의 초상을 들고 평화 행진을 벌이던 시위대에게 정부는 무차별 총격으로 답했다. 분노한 대중은 당장 차르의 초상을 찢어버리고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 후 거의 1년 가까이 혁명 상황이 계속됐다.  

사실 1년 동안 매주, 매일 시위와 파업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민 대다수가 참여한 총파업에 당황한 차르 정부는 2월에 개혁을 약속했다. 의회도 설치하고 헌법도 제정하겠다고 선포했다. 러시아판 '6. 29 선언'이었다. 민중의 승리였지만, 실제 개혁이 추진된 게 아니라 '약속'만 했으니 아직 절반의 승리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상황하고도 닮았다.

이때 러시아 민중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정치적 요구를 내건 시위가 잦아들기는 했다. 민주개혁을 약속했으니 일단 진행 과정을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대중은 일터에서도 크고 작은 승리를 일구려고 집단행동을 쉬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새로 결성했고,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정치' 투쟁에서 '경제' 투쟁으로 옷을 갈아입기는 했지만 투쟁 자체는 멈추지 않은 것이다.  

곳곳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다. 봄 햇살이 느껴질 무렵, 대다수 러시아 공장들의 작업 시간은 9시간, 8시간으로 줄었다. 이 무렵 유럽 전체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이었다. 의회조차 없는 나라의 노동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일터의 승리로 더욱더 자신감을 얻은 노동 대중은 민주개혁이 지지부진하자 다시 정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1905년 1월, 한 겨울에 시작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겨울이 올 때까지 뜨겁게 이어졌다. (당대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놀라운 사건들의 전말을 <대중파업>이라는 저서에 담아 우리에게 전했다.)  

장면2. 1987년 한국  

29년 전 6월 말도 지금과 비슷했다. 6월의 거리에서 시민들은 "군부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쳤다. 6월 29일 제5공화국의 권력 후계자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역시 아직은 '약속'이었다. 게다가 정권 교체는 개헌 뒤에 다시 선거를 거쳐야 할 일이었다. 이때 다들 6. 29 '항복' 선언이라 하고 시민의 '승리'를 이야기했지만, 돌이켜보면 때 이른 자축이었다.  

한데 이것으로 1987년의 드라마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7월 첫째 주에 울산 현대그룹 사업장에서 '민주'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민주노조 결성 바람은 삽시간에 현대 재벌 산하 대공장 전체로 확산됐다.  

현대만이 아니었다. 바람은 거제의 대우조선으로, 창원의 금속 사업장들로, 전국의 수많은 기업들로 퍼졌고, 중소공장들까지 덮쳤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거나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사측은 탄압 일변도였고, 자연히 파업이 뒤따랐다. 그렇게 해서 9월까지 무려 3천 건이 넘는 쟁의가 폭발했다. 휴가철이라는 8월에 하루 평균 83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민주혁명 와중에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현상이 20세기 말의 한국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치 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다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더 큰 정치 투쟁으로 모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군부 독재는 정리했으되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경제체제는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시작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노동자대투쟁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여의도 국회의 닫힌 방 안에서는 원내 보수정당들만의 협의로 새 헌법안이 작성되고 있었다. 창 밖에 여전히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그나마 경제 민주화 조항 등이 담긴 헌법안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대중의 목소리가 그렇게 '창 밖'의 함성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중운동과 개헌 과정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됐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6월의 여진은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정도로 마감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12월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갔다.

장면3. 2011년 스페인  

2011년 초에 지중해 연안은 '아랍의 봄'으로 떠들썩했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등에서 민주혁명이 승리했다. 혁명의 주역은 하나같이 청년들이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들한테는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도 속수무책이었다. 조직도 없이 온라인 네트워크만으로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고, 수도 한 가운데의 광장을 점거한 채 결국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랍의 봄'은 곧바로 지중해 건너편 남유럽에 해일을 몰고 왔다. 마침 남유럽 여러 나라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 나라의 정부는 좌든 우든 모두 긴축 정책을 실시해 경제위기의 고통을 서민에게 전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희생양이 됐다. 가뜩이나 학자금 대출과 비정규직 증가로 움츠러들어 있던 청년층은 50%에 가까운 실업률까지 마주해야 했다. 스페인도 이런 나라들 중 하나였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도 아랍 친구들처럼 해보자"고 모의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했고, 이곳의 논의는 어느새 행동계획으로 발전했다. 5월 15일이 거사일로 정해졌다.

이날 전국 50개 도시에서 총 13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 나선 이들 중 일부는 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해 천막을 쳤다. 경찰이 몇 차례 천막을 철거하고 농성자들을 연행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젊은이들이 다시 광장을 채우고 점거 시위를 이어갔다. 이름도, 조직도 없었지만, 새롭고 결의에 찬 사회운동이었다. 언론은 이들에게 '분노한 자들(indignados)'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천막들에서는 스페인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토론이 시작됐다. 거듭된 토론 끝에 표결이 아닌 전원 합의로 다음의 요구들을 결의했다.

- 정치 엘리트의 특권을 폐지하라. 부패를 일소하라.  
- 선거 제도를 개혁하라.  
- 긴축 정책을 철회하라. 
- 실업 문제를 해결하라. 
- 주거권을 보장하라. 
- 교육, 의료, 대중교통 등의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라. 
- 은행을 규제하라. 필요하면, 국유화하라. 
- 참여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라. 

점거 시위는 몇 주 뒤에 끝났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 운동은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광장에서 합의한 개혁 요구를 들고 이후 몇 년 동안 빈번히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어느덧 기성 좌파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분노한 자들 운동이 부패 정치와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됐다.  

'분노한 자들' 운동도 점차 여진이 약해지는가 싶던 2014년에는 이 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내건 새 정당 '포데모스'가 출범했다. 포데모스는 작년 12월과 올해 6월, 두 차례 총선을 거치면서 스페인 3대 정당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분노한 자들' 운동은 포데모스를 통해 계속 스페인 사회의 근본 개혁을 채근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한국의 '최저임금 인상' 운동?  

이런 역사 속 장면들에 지난 7주간의 광장 혁명을 비춰보자.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가? 나는 문득 이런 광경을 떠올려봤다.

장면4. 2017년 한국  

제7차 촛불 집회 이후 집회 참석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중에 서울 도심 곳곳에서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게릴라 시위가 벌어졌다. 시내에서, 홍대 인근에서, 강남역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최저임금 인상'을 외쳤다. 이런 시위가 처음 등장한 주의 토요일 촛불 집회에서는 최저임금, 비정규직, 청년 주거권 등을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만의 연단이 주목 받았다.  

다음 주부터는 지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언론은 이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보수신문은 대학가에 남아 있는 운동권 계보를 다시 들이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이 소셜 미디어를 진원지로 지목했다.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촛불 시위의 미래를 토론하던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최저임금 인상' 운동에 나서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논의는 아주 복잡하고 치열했다. 기본소득 이야기도 나오고 반론도 나오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최저임금 인상이 청년들이 바라는 사회개혁의 출발점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최저임금 시급 1만원!'을 외치는 다양한 행동계획이 제출됐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문제가 청년층의 첫 번째 개혁 요구가 된 것은 최저임금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로 승리감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자신의 일상과 직결된 문제에서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을 맛보길 원했다.

그런데 최저임금은 모든 원내 야당들이 총선에서 개선을 공약한 사안이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에는 2/3가 찬성해야 했지만, 최저임금법 개정에는 과반수의 찬성만 있으면 됐다. 야당들이 탄핵 표결할 때만큼의 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야당들에게 바로 이 의지를 촉구하기로 결의했다.  

젊은이들이 이런 구체적인 요구를 들고 나온 덕분에 촛불 집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1월부터 10대, 20대를 중심으로 토요일 집회 참석자 수가 다시 늘어났다. 장년층 사이에서도 최저임금 문제가 뜨거운 관심사가 됐다. 날이 풀린 2월부터는 청년들이 국회의 결단을 촉구하며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 발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봄바람이 완연한 3월의 첫 주 토요일에 서울의 촛불 집회 인원은 작년 12월 3일의 숫자에 육박했다. 200만 명 가량이 광화문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열흘 가까이 점거 시위를 벌이던 청년들이 이 인파를 맞이했다. 작년 초겨울과 달리 촛불을 든 시민들의 관심사는 더 이상 피의자 박 씨의 운명만은 아니었다. 최저임금 인상을 시작으로 사회개혁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게 어느새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이 돼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혁명적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전망이나 상상은 대개 현실에 의해 무참히 추월당하곤 한다. 위의 상상 역시 그렇게 몇 달 뒤에 닥칠 현실에 견줘 한낱 웃음거리가 될 수 있고,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탄핵 소추안 가결이라는 잠정 승리를 거둔 뒤에 광장 혁명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234표라는 너무나 구체적인 실물로 육박했던 승리가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누구는 이후의 대안으로 '시민의회'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촛불혁명당'을 말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다면 모두 공허한 종이 위 작전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박근혜 퇴진에서부터 내 호주머니 사정의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승리의 연쇄 속에서야 비로소 박근혜 체제 전체, 즉 재벌-비선출직 관료-보수언론의 지배 체제에 맞선 도전은 12월 3일에 살아 꿈틀대던 정도의 대중의 의지로 타오를 것이다. 그날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불길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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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11.29 13:40

지금 우리는 '문명의 단두대'가 필요하다

[장석준 칼럼] 우리가 광장에서 배운 세 가지

 

장 석 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대통령 퇴진 운동이 한 달이 넘었다. 벌써 다섯 차례나 주말에 광장이 열렸다. 이제 수백만이 모이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은 혁명이다.

 

광장에는 논란도 있다. 그 중에는 차벽에 갇힌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항변이 있다. 노래하고 떠드는 게 혁명은 아니라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차벽에 갇힌 것은 광장이 아니다. 청와대가 차벽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또한 바리게이트가 혁명의 유일한 장면도 아니다. 혁명의 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축제다.

 

하기는 광장에 모인 얼굴이 수백만이니 광장의 얼굴도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뽑아내 광장을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이런 오랜 관성에 맞서려고 광장에 나서는 것 아닌가. 저마다 자신이 광장에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무엇을 키워나가는 일, 그게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여야 하지 않을까.

 

내가 광장에서 찾은 가장 반가운 얼굴은 '민주주의의 학습장'이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지금 거리에서 배우고 있다. 가르쳐줄 교사를 찾지 못하던 민주주의를 서로한테서 배우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국인들은 1987년 이후 30여 년 동안 잊거나 미뤄온 학습을 한꺼번에 몰아 하는 중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피의자 박 씨를 한낱 괴뢰로 만들었다는 사이비 종교의 내막? 평소 듣도 보도 못한 향정신성 의약품 이름? 이런 건 한 번 듣고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이런 곁가지 이야깃거리들 때문에 우리가 이참에 진짜 배워야 할 내용을 놓쳐선 안 된다. 이런 학습의 교란이야말로 '박근혜'를 낳고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보수 언론이 원하는 바다.

 

사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주공화국은 부패한다

 

 우리가 진짜로 배운 것은 무엇인가? 저마다 초점이 다르고 표현도 다르겠지만, 나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한국 사회에는 남아돌아서 썩어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은 전화 몇 번으로 재벌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모았다. 이번에 세운 스포츠 재단 두 곳 외에도 그 동안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불법 재산을 다 합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된다. 박근혜는 지하 경제를 양성화하겠다더니 스스로 지하 경제의 역군으로 나섰다.

 

재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엄청난 잇속을 챙겼다. 눈물 삼키며 골목 깡패에게 상납금 바치는 영세 상인을 떠올리면 안 된다. 재벌들은 박근혜-최순실 일당에게 갖다 바친 돈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득을 보았다. 그래서 뇌물이라는 것이다. 정의당 부설 정책 연구소 미래정치센터의 추계에 따르면, 재벌들은 박-최 일당에게 808억 원(현재 알려진 것만)을 투자해서 약 3조7000억 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지배 블록 안의 일부가 박근혜로부터 돌아서는 바람에 이 사실들이 폭로되기 전까지 이 사회에서는 이런 거액이 대중의 눈길 닿지 않는 곳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 돈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어느 강물을 흘러 바다로 모여야 할 돈이 땅 밑을 떠돌고 있는가?

 

박근혜가 2007년 대선 무렵부터 민 핵심 정책이 이른바 '줄푸세'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세금을 줄인다니 많은 이들이 서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 준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겪고 보니 세금이 줄거나 아니면 늘어나야 할 만큼 늘지 않아 불어난 것은 재벌의 뒷주머니뿐이었다. 재벌들 뒷주머니에서 다시 수백억 원이 나와 '줄푸세'를 밀어붙인 박-최 일당의 뒷주머니로 갔다. 이게 '줄푸세'의 정치경제학이었다.

 

또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되자마자 한 게 세금을 더 걷을 수 없으니 자기가 선거 운동 중에 내뱉은 '복지 확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공약은 다 실현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일이었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한창 부풀어 오르던 복지 국가의 꿈은 박근혜 정부 5년(이제 4년으로 줄어들려나)간 감금당하는 신세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 확대 할 돈 없다고 하소연할 때 정작 거기에 쓰여야 할 돈이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정치 모리배와 재벌의 복지에 쓰였다. 건전 재정을 위해 복지를 줄여야 한다고 떠들던 경제학자는 둘 사이의 돈 배달 심부름을 했다. 이 모두가 기업이 어려워서 임금을 묶고 하청 단가를 낮추고 비정규직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외환 위기 이후 20년째 듣고 있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미련했다. 우리는 너무 소박하고 소심했다. 이 나라는 비정규직 임금 올리고 복지를 확대하는 데 쓸 돈이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노동권 보장하라고 더 세게 밀어 붙이지 못하고 복지 확대하라고 더 강하게 들이받지 못해서 그 돈이 모조리 지하 경제로 간 것이다. 우리가 징수하지 못하니 저들이 마음껏 착복한 것이다.

 

이번에 제대로 배웠다. 사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주공화국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민주공화국은 한 세대가 안 돼 다시 왕과 귀족들의 나라로 뒷걸음질 친다. 부패와 퇴행을 막는 길은 단 하나, 민주공화국의 진화형인 사회 국가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복지를 늘려 저들의 부패를 막아야 한다. 법인세를 늘리고 소득세 누진성을 강화하고 자산세를 신설해서 공공 서비스 확대가 됐든 시민 기본 소득이 됐든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재벌들의 식상한 하소연에 흔들리지 말고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나서야 한다.

 

문명화된 단두대(=선거 제도 개혁)가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가 배운 것은 권력의 목을 쉽게 벨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지금 국민 90% 이상이 반대하는 인물이 청와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저희가 살려면 탄핵소추안이 빨리 가결돼선 안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는다. 이런 황당한 광경을 마주하며 우리는 이 나라 정치의 불문율 중 하나를 새삼 확인한다. 그것은 공직 선거 당선은 왕관이나 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며 다음 선거까지는 권력 앞에 거칠 게 없다는 것이다.

 

선거로 뽑히면 그나마 낫다.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 중 다수는 아예 선거와는 무관하다. 최태민 일가야 너무 황당하니 피의자 박 씨의 특수한 인격적 결함 탓이라 치자. 박근혜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신나게 칼자루를 휘두르던 자들, 즉 청와대의 현대판 환관들, 기획재정부 등 힘 있는 부처의 고위 관료들,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등은 몇 년 뒤에 돌아올 선거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음번 꼭두각시만 보장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떠오른 상징이 있다. 이번에는 왕의 목을 확실히 베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상징, 바로 단두대다.

 

단두대라니까 너무 섬찟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문명화된 단두대가 있다. 선거가 그것이다. 선거는 본래 주기적으로 왕의 목을 베는 의식이다. 주권자인 시민이 권력의 목을 베는 (혹은 목숨을 너그러이 연장시켜주는) 문명화된 의식이다.

 

이번에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선출직 공직자들의 권력을 모두 단두대 앞에 세워야 한다. 선출직으로 바꿔야 한다. 검찰총장도, 경찰청장도 이제 선거로 뽑아야 한다. 그래서 제 목구멍이나 상위 공직자가 아니라 오로지 유권자인 시민만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머지 행정부 고위 관료나 대법관, 헌법재판관, 공영방송 임원 등도 직접 선출이 아니라면 의회의 강력한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또한 선거로 뽑힌 자들도 이제는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몰라 긴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무능과 비리가 드러나면 쉽게 쫓아낼 수 있어야 한다. 국민 95%가 반대하는 대통령을 집에 보내려고 수백만이 차디찬 겨울바람 맞으며 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편리한 제도와 절차를 갖춰야 한다.

 

간단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선출직 공직자의 소환제를 도입하면 된다. 그러면 하야 선언과 탄핵 의결을 기다릴 필요 없이 국민 소환 서명을 받아서 투표로 피의자 박 씨 같은 인물을 몰아낼 수 있다. 혹은 이런 제도의 존재만으로 제2, 제3의 박근혜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혹자는 그래서 내각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구석도 있지만, 절반은 사기다. 서유럽 내각제 국가에서 정권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각제라서가 아니라 다당 구도라서다. 이들 나라에서는 100%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가 뒷받침하는 덕분에 좌부터 우까지 여러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해 있다. 그래서 민심의 변동에 따라 쉽게 정당 간 합종연횡을 통해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정부를 구성한다.

 

핵심은 내각제보다도 선거 제도 개혁이다. 만약 현행 승자독식 선거 제도를 그대로 두면서 내각제로 바꾼다면 제왕적 대통령보다 더 끔찍한 제왕적 총리가 등장할 수도 있다.

 

우리도 이제 알만큼 알았다. 자꾸 '개헌', '개헌' 하는데 개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광장 시민의 편인 아닌지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선(先) 선거 제도 개혁'을 말하는가 아닌가다. 선거 제도 개혁이란 곧 단두대의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이다. 지금은 무슨 방도가 됐든 권력의 목을 베는 데 뜻을 함께 하는 자만이 우리 편이다.

 

광장의 힘이 일상에서도 지속될 수는 없을까?

 

셋째로 우리가 배운 것은 광장의 힘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만든다는 진실이다.

 

지난 한 달만큼 민주주의를 실감한 적이 있었던가. 정치인들이 이렇게 시위대의 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집회가 거듭될 때마다 집회에서 나온 요구의 뒤꽁무니를 따른 적이 없다. 모두 시민들이 광장을 연 덕분이었다. 광장이 열리자 여당 의원 중 그나마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혼비백산했고 야당 의원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재벌도, 보수 언론도 촛불 시민들의 눈치를 본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웅성대니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장면이 예외적 순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피의자 박 씨를 청와대에서 퇴거시킨 뒤에도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돌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결국 광장의 힘이 일상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 삶 곳곳에서 광장의 촛불이 계속 타올라야 한다.

 

광장의 일상화…. 방향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광장에 나선 우리들은 이 과제를 반드시 함께 토론해야 한다. 그것만이 4월 혁명과 6월 항쟁의 회한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당장 행동 계획이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회의 여러 장소들 중에 가령 기업에 광장의 힘이 살아서 작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노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노동조합으로는 약하다고? 그럼 촛불 시민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조합은 대기업 정규직만 위한다고? 그럼 다수의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입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기업 안에 광장의 힘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촛불 시민들이 권력을 흔들고 새로 세우듯 일터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노사 공동 결정제처럼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정도 되면 국가와 노동자, 소비자 대표가 지배 구조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면 그게 지금처럼 창업주 일가가 농단하는 것보다 못할까?

 

기업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학교에서도, 상가에서도, 동네에서도 광장의 힘을 구현할 조직과 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무리의 2류 정치인들과 재벌, 보수언론이 시민혁명의 성과를 낚아채는 일도, 다시 한 30년쯤 지나 또 다시 왕과 귀족을 몰아내려고 거리에 나서야 하는 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이런 값비싼 교훈들을 배웠다. 아니,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더 배워야 한다. 이제부터 답을 만들어가야 할 물음들이 아직도 더 많다.

 

하지만 일단은 이런 집단적 학습 과정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경이롭다. 이 희귀한 순간을 허투루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러니 마땅히 우리는 더 많이 발언하고 더 진지하게 의심하며 더 확고히 결의해야 한다. 이런 우리 하나하나의 모든 행위가 이 경이로움을 이어가고 연장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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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11.25 10:22

"문재인-민주당은 '촛불'보다 <조선>이 무섭다"

[장석준 칼럼] 촛불에 필요한 것은 폭발력이 아니라 지구력

 

장 석 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6년 11월 12일의 서울은 경이롭기만 했다. 600년 넘는 이 도시의 긴 역사에서도 처음인 백만 이상의 인파가 시내를 꽉 채웠다. 사람의 파도 탓에 발 딛기도 힘들었지만, 어디에서도 불편함이나 짜증의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들은 부대끼는데도 낯선 해방감이 광장을 지배했다. 나는 이 광장의 백만 시민 중 하나여서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내 밤은 깊어졌고 시계는 자정을 향했다. 백만이 모일 수 있으면 그 백만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걸 실증이라도 하려는 듯 저마다 마지막 대중교통 편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광장에는 박근혜가 여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인 채로 13일의 해가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가슴에는 역사의 무대에 함께 했다는 뿌듯함과 더불어 뿌연 안개가 끼었다.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모은 군중이 최루탄에 무참히 해산 당하던 기억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을 테고, 2008년 장마가 시작될 즈음 마지막 촛불을 태우고 기약 없이 헤어지던 때를 기억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김수영의 시로 1960년 4월의 고뇌를 전해들은 이들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시구를 불길하게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찬란했던 하루를 보내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불안감과 의구심은 무거운 물음이 돼 우리를 짓누른다. 청와대 진격 불발을 아쉬워하며 SNS에 격정을 토로하는 이들의 말처럼 시민혁명의 골든타임을 영영 놓쳐버린 것일까? 12일 집회는 대한민국 시위 참여인원 기록을 갱신한 점에서나 의의를 찾을 하룻밤 축제에 불과했던 것일까? 과연 지금 우리는 역사의 길목 어디쯤에 서 있는가?

 

싸움은 이제 시작이고, 이제껏 우리는 잘 싸웠다

 

하루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정세 속에서 과연 이런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거나 지나쳐는 안 될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 첫 번째는 싸움이 이제야 시작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제껏 광장의 시민들이 주인공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것이다.

 

JTBC의 충격적인 폭로가 있고 벌써 3주가 흘렀다. 토요일 집회도 12일이 세 번째였다. 하도 믿기 힘든 폭로가 쏟아지고 선거 때보다 더 치열한 청와대와 원내 정당들의 정치 행위가 계속된 탓에 3주가 아니라 한 달은 넉넉히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체감과는 달리 우리는 아직 JTBC 폭로 직후 등장한 첫 번째 정치 국면의 여운 속에 있다. 이게 막 마감되면서 새 국면이 열리려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 첫 번째 국면의 쟁점은 실은 박근혜 퇴진이 아니었다. 물론 대다수 시민은 처음부터 하야/탄핵/퇴진 이외의 해법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치권은 달랐다. 지난 몇 주간 정의당을 제외한 원내 정당들의 논란거리는 거국 내각이었다. 달리 말하면, 박근혜는 없는 셈치고(그게 가능하다면) 새누리당과 야당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방안이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일보> 같은 보수 여론의 사령부가 이를 열렬히 주창한다. 이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박근혜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박근혜의 하야로 조기 대선 국면이 열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새누리당과 야당들을 대연정으로 묶어 위기를 봉합한 뒤에 개헌을 통해 정계 개편을 시도하려 한다. 박근혜는 도려내되 박근혜 체제와 그 기획(개헌-정계 개편)은 이어가려는 것이다. 

 

정치 이론에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꺼낸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이 있다.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기존 지배 세력이 도전 세력의 일부 흐름과 요구를 흡수해서 위기를 타개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이는 지배 세력 입장에서는 가장 능동적인 위기 대응이지만, 기존 체제와 단절한 새 출발을 원하는 민중 입장에서는 새로운 지배 체제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꼴이다. 1987년 6. 29 선언 이후가 이런 수동혁명 국면이었다. 지금 <조선일보> 등은 이를 반복하려 한다.  

 

가장 눈에 띠게 이 전략의 도구가 돼 움직이는 것은 새누리당의 비박 세력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내 친박파는 이에 저항하면서도 결국은 한 걸음씩 뒤늦게 따라오는 신세다. 그러면 남는 것은 원내 야당들이다. 이들이 권력 분점안을 덥석 받아야 수동혁명 전략이 관철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주간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대통령 퇴진은 논외로 하고 거국 내각을 둘러싼 입씨름만 계속하며 이 기조에 따라 움직여줬다. 심지어 문재인-민주당 주류는 지금도 이 궤도로부터 좀처럼 이탈하지 않고 있다. 

 

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거의 끝난 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왜? 무엇 때문에? 바로 우리들, 광장의 시민들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우리는 지금 충분히 주인공이다.

 

1주일이 지날 때마다 수십 배로 불어나는 촛불의 힘은 청와대의 ‘괴뢰’는 몰라도 정당들에게는 확실하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수야당들은 광장의 눈치를 보며 거국 내각의 최종 서명을 미루다가 하나 둘 박근혜 퇴진 투쟁의 바리게이트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수동혁명의 손쉬운 성공으로 끝날 뻔했던 첫 국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우리는 아직 박근혜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의 준비를 훼방 놓을 만큼은 강력함을 입증하고 있다.

 

촛불 시민이 바라는 다음 국면은 야당들이 새누리당과의 권력 분점이 아니라 새누리당의 권력 배제에 과감히 나서는 것이다. 우선 새누리당과의 협의 없이 야3당 단독으로 특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야3당은 이 힘으로 과도 내각 총리도 합의해야 한다. 박근혜의 하야 선언이 늦어지면, 결국 탄핵 절차에 착수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그 잔당들은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들의 의사 방해 따위는 촛불의 연료가 돼줄 뿐이다. 이상은 13일 정의당이 발표한 ‘질서 있는 하야 4대 실천 과제’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이 관철되려면, 19일에도, 26일에도 광장에는 수십만, 수백만의 촛불이 타올라야 한다. 민주당, 국민의당이 거국 내각에 차마 동조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아우성이 계속돼야 한다. 대중운동의 힘이 제도정치를 거의 매개 없이 규제하는 이 예외적 국면이 이어져야 한다. 2주 안에 특검법 등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 26일로 예정된 다음번 대규모 집회 장소를 시내가 아니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옮기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게 다 우리가 당분간 촛불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대열을 불려가며 밀어붙여야 할 일이다. 주춤거릴 때가 아니다. 그럴 틈이 없다.

 

광장 혁명은 더 깊고 더 넓어져야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촛불에게 필요한 것은 폭발력보다도 지구력이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기까지는 몇 주가 아니라 몇 달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뜨거운’ 겨울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이미 승기는 잡았지만,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장기간을 염두에 둬야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우리가 확인한 게 단지 박근혜를 꼭두각시로 내세운 지배 체제의 부패와 타락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수야당들의 민낯 또한 똑똑히 보았다.

 

보수야당, 그 중에서도 차기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문재인-민주당 주류는 95%의 국민이 박근혜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고 60% 이상이 하야/탄핵/퇴진에 찬성하는데도 ‘하야’나 ‘탄핵’은 입도 벙긋 하지 않는다. 이 유례없는 민심의 해일에도 이들은 오히려 기득권 세력의 눈치부터 보았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여론조차 이들이 <조선일보>를 압도하는 용기를 내기에는 부족했다.

 

이런 세력이 집권한다고 과연 박근혜 체제와 크게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을까? 새누리당 집권 10년 동안 보수야당들이 진보정당 정책 중 일부를 흡수하기는 했다. 사회 개혁의 열망이 정권 교체와 동일시되면서 보수야당과 그 대권 주자들에게 대중의 기대가 온통 쏠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집권 후 개혁적 공약이 기득권층의 사정없는 공격을 받게 되면, 어찌 될까? 광장에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도 미적대는 지금 모습을 대입해보라. 답은 빤하다. 퉁명스러운 현실론을 내세우며 공약을 미련 없이 폐기해버릴 것이다. 정권 교체는 사회 개혁의 기회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광장 시민들의 바람대로 박근혜가 퇴진하고 조기 대선이 성사되더라도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수동혁명은 거국 내각-개헌 카드를 통해서는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카드, 보수야당의 집권 이후 개혁 약속 파기로 다시 한 번 승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근혜 퇴진’이라는 첫 번째 목표에 승리한 뒤가 오히려 ‘박근혜 체제 해체’라는 궁극 목표의 실현에 더 위험한 국면일 수 있다. 촛불의 지구전을 각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전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 우리는 12일에 그랬던 것처럼 주기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야 하지만, 또한 그만큼의 열기로 광장을 우리 삶 곳곳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다른 나라 혁명사에는 ‘구민 협회’니 ‘평의회’니 하는 이름의 조직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민중 스스로 토론하고 실천하는 조직들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조직이다.

 

이름은 뭐든 좋다. 낯선 번역어들 대신 편하게 ‘00 촛불 모임’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노동조합, 협동조합, 농민회, 학생회, 시민단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이들 조직이 그 역할을 맡으면 된다. 혹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협동조합을 새로 만들어서 참여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제도정치의 옥신각신이 계속될 겨울부터 봄까지의 시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촛불 모임들을 만들며 새 봄을 준비해야 한다.

 

촛불 모임들은 행동의 기본 단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중요 임무는 토론과 결의다. ‘박근혜 체제’, 그러니까 재벌과 비선출직 관료, 보수 언론이 민주공화국을 농단하던 이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 사회로 나아가려면 우리 주위에 어떤 개혁 조치들이 필요한지 토론해야 한다. 각각의 촛불 모임이 내놓은 개혁 방안은 엉성할 수도 있고 다른 방안과 충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모임들이 낸 개혁안을 종합한 결론은 87년 체제를 극복하는 데 가장 확실하고 뚜렷한 대헌장이 될 것이다.

 

개혁도, 개헌도 이런 아래로부터의 토론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조기 대선이 있을 테고 정당들이 선거에 뛰어들겠지만, 더 이상 기성 주류 정당의 행보와 선택에 시민들의 개혁 열망이 포획돼선 안 된다. 곳곳에 퍼진 촛불 모임들이 제도정치권과 소통하고 필요하면 이들을 협박하거나 특정 정치 세력과 동맹하면서 함께 새 권력을 만들어가야 한다. 

 

말하자면 이번의 도전은 1960년, 1987년의 혁명-준혁명에 비해 훨씬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위력을 폭발시킬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우리 삶 곳곳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제도정치의 변화와 사회운동, 시민권력의 성장이 서로 밀고 당기며 수동혁명의 유혹과 함정을 뿌리치고 나아가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박근혜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났다. 지금 막전 막후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은 박근혜 이후를 둘러싼 싸움이다. 대중혁명과 수동혁명의 싸움이다.

 

그러니 오늘 아침도 박근혜가 대통령인 세상에서 눈을 떴다고, 이번 주도 민주당의 헛발질이 반복된다고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촛불은 흔들리거나 멈칫 거릴 여유가 없다. 이제는 저물어가는 저들의 시간이 아니라 12일 자정이 지나도 닫힐 수 없는 촛불의 시간에 우리 삶을 맞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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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11.24 14:57

<조선일보>, 박근혜 도려내고 권력접수?

이 정국의 변수는 촛불을 든 우리다

 

 

 

 

 

 

 

 

장 석 준 (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힉위원

 

  

“민주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

 

지난 며칠간 정국이 숨 가쁘게 요동치는 가운데 내 가슴 속에 그리고 동료 시민들의 아우성 속에 끊임없이 반복된 말들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빨간 불이 켜졌고,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그간 심각하게 부패했으리라 짐작만 하던 정치 체제가 실은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껍데기만 남은 신세라는 사실이 갑자기 눈앞에 드러나며 우리 모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체제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던 우리는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라면 시민혁명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일 테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만 해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시민혁명 이념을 요약하고 있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촛불에 물대포로 답하는 나라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헌법의 약속과 실상이 다름을 뻔히 알면서도 그 격차에 그래도 한도는 있을 줄 알았다. 국가가 사회주의 고전에서 말하는 ‘자본가계급 집행이사회’ 쯤은 될 줄 알았다. 어느 것 하나 사리사욕 아닌 것 없는 안건들을 다루겠지만 어쨌든 회의실에 모여앉아 어엿한 회의 문서를 넘기며 제 욕심 챙기는 정도의 격은 갖추었을 줄 알았다.

 

오판이었다. 미몽이었다. 부패는 우리 머릿속의 막연한 한도를 훌쩍 뛰어넘었다. 공화국을 실제 통치한 것은 무슨 이사회 같은 게 아니라 이성의 불빛이 잠자는 어두컴컴한 사당이었고, 또 아직 확인되지 않은 풍문에 따르면 유흥업소의 밀실 혹은 유한부인들의 마사지실이었다. 이렇게 좁고 음침한 공간에서 기획된 부패이지만, 그 정도는 가히 ‘영혼’과 ‘우주’의 수준을 넘나들었다. 이제야 실상이 드러난 청와대의 무능력자는 이 부패극의 한낱 괴뢰였다. 지난 4년간 이렇게 공화국은 실종 중이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지금이라도 실상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껍데기조차 무너져 내리기 전에 민주공화국을 되살릴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 그런 마음으로 지난 며칠을 넋 나간 듯 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우리’ 안에 낯선 이들이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조중동’. 보수언론들이다. 한편으로는 이제 이들까지 우리 편이냐며 마음이 들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정말 그들은 ‘우리’인가?

 

제1막은 궁정혁명

 

지금 그들은 단지 ‘우리’ 안에 섞여 있기만 한 게 아니다. 곰곰이 따져 보면, 지난 1주일 동안 정국 급반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박근혜는 끝났다”는 보수언론의 단호한 판단과 결연한 논조였다.

 

물론 최초의 파문은 <한겨레>, JTBC(이 방송 또한 중앙일보의 종편 채널인 점은 논외로 하고) 등의 잇단 폭로 보도에서 비롯됐다. 폭로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보수언론으로서도 어느 편에 설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주말 조중동의 어조는 단순히 시류에 끌려가는 것 이상이었다. 심지어 이들의 사설 논조와 종편 채널의 시위현장 중계방송이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자신감을 높여줄 정도였다. 

 

현 국면에서 보수언론은 결코 조연이 아니다. 어쩌면 주연은 이들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둘러싼 추악한 진실들이 조금씩 드러난 것은 이들의 손아귀 바깥에서 벌어진 우연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우연의 고리들을 엮어 필연의 사슬로 만들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 보수언론이다.

 

청와대가 유명무실해졌고 새누리당이 무력한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일선 정치 담당자들이 치명타를 입었기에 이제 보수언론이 이들 대신 사령부로 나서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지배층을 대표하는 ‘정당’은 조중동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조선일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일보>는 이미 청와대와 치열한 권력 암투에 돌입해 있었다. 그런 <조선일보>이기에 JTBC의 폭로 보도 이후 가장 기민하고 선명하게 입장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사설과 기명 칼럼에 지침을 담아 내보내고 있다.

 

“박근혜는 끝났다. 그러나 탄핵과 하야는 해법이 아니다. 거국중립내각을 이끌 총리부터 임명하라. 그러고는 개헌 정국으로 돌입하라.”

 

지금 새누리당은 정확히 이 지침에 따라 움직인다. 

 

실은 새누리당만이 아니다. 사령부의 지령을 직접 따르지는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손발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있어서 보수언론이 그리는 전체 그림이 맞춰지고 있다. 바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다. 두 당은 만약 탄핵이나 하야를 추구한다면 대립 전선이 크게 바뀔 것이라는 보수언론의 신호에 우호적인 답신을 계속 보내는 중이다. 말하자면 기득권층의 비상 사령부가 내놓은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공포인가 아니면 교감인가. 아무튼 적어도 지금까지 두 당의 태도는 이렇다.

 

이렇게 탄핵이나 하야 가능성을 차단한 후에 보수언론이 노리는 바는 개헌 정국이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이미 당론으로 받아들인 이른바 ‘거국중립내각’을 통해 박근혜 따위는 잊고 개헌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김종인, 손학규 등 총리감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모두 개헌론자들이다.

 

이 시국에 왜 하필이면 개헌인지는 4월 총선 이후 보수 세력이 위기 대응책으로 줄곧 개헌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개헌은 정치 세력들을 위로부터 새로 재편할만한 쟁점이기 때문이다. 사령부는 기성 거대 정당들 사이의 상층 논의를 통해 기존 지배 질서와 발 맞춰 나갈 새 정당 체제를 짜려 한다. 

 

한데 개헌 논의는 박근혜가 참혹한 몰락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던졌던 승부수가 아닌가? 그 개헌 카드를 계속 꺼내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보수언론이 구상하는 바의 핵심과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다.

 

JTBC 보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건 그제야 알게 됐건 박근혜-최순실은 보수언론이 보기에도 한도를 너무 넘어선 추문 덩어리였다. 청와대의 무능력자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외양을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챙기던 안온한 관성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보수언론은 청와대 무장 해제 작전의 사령부를 자임하고 나섰다. 박근혜만 도려낸 채 이제껏 박근혜 정권이 추진해온 전략과 정책을 이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그 전략 중에는 개헌도 있다.

 

이런 점에서 지난 1주일간 벌어진 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궁정혁명’이다. 궁정동의 총탄을 대신하는 펜과 카메라의 반란이다. 자칫 대선 닥쳐서 폭로됐으면 지배 세력에게는 대파국이 됐을지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예방혁명’이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지배층 전체를 낭떠러지에 빠뜨릴 성 싶은 박근혜를 숙청하려는 ‘자정혁명’이다. 이 위로부터의 혁명은 일단 지금까지는 거침없이 승리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주연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궁정혁명에는 딜레마가 있다. 무능한 왕을 몰아내려면, 성난 민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민심은 어느 정도는 민란으로 터져 나와도 좋다. 궁정혁명 주역들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한 번 터져 나온 민심은 그침을 모른다. 위로부터의 궁정혁명은 자칫 아래로부터의 대중혁명으로 비화할 수 있다. 그 칼끝은 이제 시체나 다름없는 왕뿐만 아니라 궁정혁명 주역들에게도 향한다.

 

10월 29일(토) 첫 번째 촛불 시위를 생중계하는 종편 채널들의 시선에서 이런 딜레마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청와대 포위 작전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당장은 시위 참여자가 많았으면 하면서도 시위대가 철저히 자신들의 가이드라인 안에서만 움직이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주연이 직면한 딜레마뿐만 아니라 또 다른 주연의 등장과 마주하게 된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 시민, 바로 촛불을 든 우리다.

 

우리야말로 이 정국의 최대 변수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야말로 밀실 기획가들이 예측하기 힘든 변수다. 이 말에는 어떤 과장도 없다. 지난 토요일 이 ‘우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궁정혁명이 힘을 받기도 했지만 또한 미묘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원내 양대 야당조차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중인 개헌 정국 시나리오에 시끄럽게 딴 소리를 낼 단 하나의 세력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세력은 박근혜의 ‘2선 후퇴’가 아니라 ‘퇴진’을 원한다. ‘책임총리’가 아니라 ‘조기 대선’을 원한다. ‘개헌’이 아니라 ‘개혁’을 원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력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괴뢰’ 박근혜의 퇴장과 함께 그를 내세워 연명하던 체제도 해체하길 원한다.

 

해체 뒤에 그 자리를 차지할 내용들은 차고 넘친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권리 확대, 공공부문 사유화 중단, 복지의 대폭 확충, 사드 배치 철회, 핵발전소 폐지, 정치 개혁 ... 오랜만에 열린 광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이제야 우리의 말문이 터지려 하고 있다. 얼마나 소중한 광장인가. 마땅히 이 광장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돼야 한다. 그렇게 확산된 광장들이 제2막의 주 무대가 돼야 한다. 궁정혁명이 아니라 광장혁명이 시작돼야 한다. 그러자면 전두환을 놔두고도 새로운 미래의 설계가 가능할 것처럼 생각했던 1987년을 반복할 수는 없다. 박근혜는 퇴진해야 한다. 기성 정당들이 저희들끼리의 밀실 협상으로 새 헌법을 짜는 꼴을 지켜만 보던 1987년을 재연할 수는 없다. 개헌 정국은 대중이 열어야만 한다. 우리는 30여 년 전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진실을 입증해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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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11.08 11:00

[영광군민신문-미래정치센터 공동 칼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거버넌스 붕괴, 하야가 답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온 나라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혼란스런 상황이다. 박대통령을 이용해 최순실 씨가 벌인 각종 국정 농단들은 나름대로 유지해왔던 국가 거버넌스를 송두리째 흔들어 붕괴시키고 말았다. 최근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5% 까지 곤두박질 치고, 하야나 탄핵을 원하는 국민은 약 55%, 여야 합의 거국내각 구성을 원하는 국민은 약 20%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사실상 국정운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소위 식물정부, 식물대통령으로 표현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우리 국민은 언제나 유능하고 질 높은 정부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라 부른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마커스 아그나포스는 이러한 좋은 거버넌스 혹은 질 높은 정부의 구성요소를 6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우리나라는 박대통령 집권 기간 가장 나쁜 거버넌스(Bad Governance)로 전락했다. 그 이유를 좋은 거버넌스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최소의 도덕성과 공무원 정신이다. 존 롤스는 정의란, 사회제도의 첫 번째 덕목이라 칭한 바 있다. 모든 공동체(community)는 도덕적 기준점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최소의 도덕성이다. 공동의 확립된 자격을 갖춘 도덕성이 바로 공무원 정신의 한 예이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 제한 및 폭력성이 담긴 공권력 행사를 하는 정부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최순실씨는 박대통령을 이용하여 문화체육 분야에서 각종 이권을 차지했고,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을 정부 고위급 공무원으로 앉혔다. 각종 국토교통부 미공개 개발정보를 미리 빼내어 밝혀진 것만 약 18억원의 부동산 차익을 얻은 바 있다. 이러한 비선실세의 농단에 대해 청와대 수석·비서진, 정부부처 장차관들은 침묵 혹은 동조하였다.

 

둘째, 좋은 의사결정과 합당한 이유 제시이다. 절차에 따른 공정한 의사결정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 않으며, 투명하고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모호한 창조경제 정책, 갑작스럽게 인사 혹은 경질되는 고위공무원 인사 등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 최순실 씨, 차은택 본부장이 만든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대한 대통령의 협조 아니, 협박에 못 이겨 대기업들의 지원금을 받아, 아니 뜯어내어 창조경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정 좋은 의사결정이고, 제대로 된 이유제시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셋째, 선행의 원칙이다. 법과 정책 체계에서, 실제적·해석적 차원의 갈등과 차이들이 존재하다. 아무리 해결이 어려운 갈등이라도, 이를 판단할 가치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국정운영 과정에서 보다 중요한 가치이자 우선순위가 명확히 서 있어야 한다. 적어도 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나 사실은 바람직한 국정방향, 투명성, 효율성, 합법성 등 행정이 응당 구현해야할 당위적 가치보다 앞선 것은 최순실 등 비선실세들의 사익이었을 뿐이다.


넷째,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 가, 즉, 효율성이 중요하다. 국가 예산은 무엇보다 효율성이 중요하다. 투입 대비 산출을 고려하는 등 정책 및 사업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진 밝혀진 최순실 관련 예산만 한류사업, ODA, 창조경제 등 5,200억원이다. 이 사업들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면, 최순실 실소유의 기업이나 재단으로 돈이 흘러 들어간다. 사업이나 정책타당성 같은 건 예초에 없다.

 

다섯째, 법치와 공명정대이다. 법치란 국가가 법을 지키는 것으로, 공권력의 공정한 행사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과 조직, 기업들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제공한다. 정부가 법에 종속되지 않고, 자의적으로 이용하면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침해되게 된다. 최순실은 법적 권한도 없이 대통령 연설문을 뜯어 고치고, 고위직공무원 인사에 무시로 관여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사업과 예산을 마음대로 편성 및 증액하고, 기업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

 

여섯째, 안정성이다. 정부가 각종 기능을 유지하고, 법과 정책을 안정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공권력의 역량을 말한다. 법적 근거가 전혀 없고 전문성이 없는 비선실세가 국정을 농락한 마당에 거버넌스 안전성은 이미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집행하는 법과 정책에 대한 국민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정부의 권위는 상실됐기 때문이다.

 

약탈국가는 헌법의 권위와 국가 위세를 활용하여 국민을 약탈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에만 몰두한다. 효율성과 법치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약탈정권의 국가약탈로 전락하였다. 합법성과 정당성이 부재한 정부의 공권력을 누가 인정하겠는가? 우리 국민은 이 나라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국가 거버넌스가 붕괴된 상황에서 재건을 위한 가장 우선적이고 필요충분조건은 박대통령의 하야 뿐이다. 정부 관료제가 국정을 떠받치고 있기에 혼란이 있지만, 견딜 수 있으며, 곪은 것은 터뜨려야 새살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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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8.10 16:58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공동칼럼]

법치의 진짜 얼굴은 국민이 아닌, 국가가 법 지키라는 것이다!

 

 

 

 

 

 

 

고광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누구나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인 데, 우리 국민 상당수가 잘 못 알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법치’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기존 대통령과 정치인들 즉, 위정자들이 자주 썼던 말이기도 하며, 실제 그러한 오용 때문에 국민 상당수가 법치를 오해하고 있다.

 

‘법치’에 대한 오해는 법치를 바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집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나 반대세력을 압박하면서 활용된다. 결국,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여당 국회의원들이 법치구현을 외치며 정부·여당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국민, 야당 정치인, 노조·시민단체들에게 강력한 처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본래의 법치는 이러한 위정자들의 오용에 따른 오해로 절대 변질되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정 반대 개념이며, 잘못된 법, 절차가 결여된 법을 가지고 위정자들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가가 국민의 인권(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이념이다. 즉, 국가가 법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구속되는 것, 입법자(국회)와 집행자(행정부/대통령)를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 즉, 국가가 헌법과 법률의 통제를 받는 다는 것이다.

2015년 11월 24일 YTN 기사를 인용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지난 11월 14일, 서울 도심 시위(민중총궐기)와 관련하여 불법 폭력 행위는 대한민국의 법치를 부정하고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했으며, 불법 폭력 행위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해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2005년 농민집회 때 경찰 진압 과정에 2명의 농민이 사망하자,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면서, “국민여러분과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 말씀 드린다. 정부는 책임자를 가려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국가가 배상하겠다.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이다.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매우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책임과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하며, 공직사회 모두에 다시 한 번 명백히 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박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법치에 대한 상반된 인식을 여실히 알 수 있는 상반된 발언이다. 박대통령은 법치를 법에 의한 지배(국민이 법 지키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법의 지배(국가가 법 지키기)로 바라보고 있다. 법치는 민주주의 구현의 기본 요소다. 최고권력자의 법치에 대한 인식을 민주주의 수준이라 본다면, 어쩌면 후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법치란 무엇일까?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레이첼 클라인펠트(Rachel Kleinfeld)는 혼동되는 법치의 개념을 크게 제도기반(based on institutions) 법치와 목표(ends)기반 법치 등 2가지 방식의 정의로 정리하였다. 먼저, 형식적 혹은 절차적 법치를 의미하는 제도기반 법치란, 한 사회가 법치구현을 위해 1)공개적으로 잘 알려지고 비교적 정착된 법들(laws), 2)정치적 조작과 부패로부터 독립적인, 타당성 있고 효율적인, 법적 지식과 추론 등 교육받은 법관(judiciry), 3)공공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청렴한 경찰력과 판결 집행 및 법 시행의 힘(force) 등 3가지의 제도적 속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다음, 실질적 법치를 의미하는 목표기반 법치란, 5개의 상충되지만, 상이한 목표들을 얼마나 달성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구축된 입법 수단을 통해 법과 정책을 결정하고 변경하는 법에 구속된 정부다. 법에 국가를 종속시켜 자의성을 막는 것이다. 둘째, 법 이전에 평등으로, 모든 시민들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같은 법에 의한 판결이 보장되는 것이다. 계급, 여성, 인종, 종교 등 소외계층 권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셋째, 시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필수적인 법과 질서의 확립이다. 사회적 위협에 노출된 빈곤하고 소외된 자들의 인권보호가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넷째,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정의와 법적 체계로, 자유시장 형성과 범죄행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능케 한다. 즉, 독과점이나, 불공정거래, 각종 범죄행위에 대한 공정하고 엄격한 처벌이 이루어질 경우 공정거래 및 자유시장, 범죄예방이 가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국가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의 인권과 자연권 침해를 막는 것이다. 경찰은 인권유지를 목표로 훈련되지만, 오히려 경찰이 인권을 종종 침해하기도 하는데, 사법부는 국가(행정부)의 인권 및 자연권 침해로부터 전통적 개인의 자유와 소수자 권리 보호를 위한 수호자가 되기도 한다.

 

법치는 점차 수단으로써 제도에서 목표로써 제도로 변화되고 있다. 법치는 1)상설법, 2)공정한 법정, 3)집행기제 등 형식적인 절차와 제도적 기반이 얼마나 갖추었는가에서 1)법에 구속된 정부, 2)법 이전에 평등, 3)법과 질서, 4)공정한 정의, 5)인권(자연권) 보호 등 5가지 목표들이 실질적으로 달성되고 있는 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법치의 진짜 얼굴은 국민이 아닌, 국가가 법 지키라는 것이다. 진정한 법치구현을 위해 국민(군민)들의 지속적 관심과 참여, 투표를 통한 견제가 여실히 요구된다.

 

[영광군민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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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8.02 16:20

왜 노벨 과학상 한 명 배출하지 못할까?

 

 

 

 

 

 

 

 

고광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R&D투자 세계 1위인데, 노벨과학상 한 명도 배출 못한 나라!... 무엇이 문제일까?

 

지난 2015107,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그 주인공은 일본과 캐나다 과학자였다. 일본은 2년 연속 노벨 물리학상을 배출하며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반면, 노벨 화학상은 전통의 강호, 영국과 미국 학자들이 차지했다.

우리나라 중고교 학생들의 과학수학능력은 세계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3년 정부 R&D예산은 OECD 국가 중 6, GDP 대비 비중 1.14%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의 정부 R&D예산은 OECD 국가 중 각각 12위이나, GDP 대비 비중은 0.79%(12), 0.75%(14)이다. 한국은 여전히 상대적인 자원과 역량을 과학기술 선진국들에 비해, 과학기술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수한 인적자원과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고려대 이종필 교수는 한국이 노벨 과학상을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를 3가지로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과학연구가 인간 지성의 경계를 넓히는 일인데, 우리의 과학교육은 경계를 넘지 못하는 주입식 교육, 둘째, 노벨상은 인간 인식의 경계를 넓히는 원초성이 핵심이나, 정부투자는 당장의 산업유발효과나 경제적 기대효과에 집중, 셋째, 정부 고급인력 투자는 노벨상 받을 만 한 1~2명에 올인하고 있어 대단히 위험한 투기이자 도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2015주요 R&D 예산배분 조정안을 보면, 기초연구 투자는 4.2% 예산증가를 보인 반면, 성장동력창출중소기업지원 등 단기 일자리창출에 각각 7.5% 예산증가를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 지원은 치밀성과 계획성이 요구되는 데,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중심으로 한 정부주도의 일방적인 시혜적 지원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정부 R&D 중 기초연구 비중은 ‘1538% ’1740%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인들의 자율성 보장 및 의견수렴, 창의적 연구지원보다 여전히 미래창조과학부 주도 기초연구 투자방향 및 투자우선순위 수립, 추격형(fast follower) 기조 아래, 단기 성과창출과제(사업화 성공 11.9% 예산증가) 집중, 예살절감 위한 유사중복사업 정비 및 성과평가 강화에만 몰입하고 있다. 반면, 과기인(기관)의 자율성이 제한되고 도전적창의적 연구가 어려운 환경에, 기초연구에서 상용화까지 가치사슬 단계별 전방위적 지원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 선진국... 창의적고위험 연구 적극 지원

 

과학기술 선진국들은 공통적으로 도전위험성 높은 R&D연구 및 가치사슬 전 단계 지원, 연구자의 자율성을 대폭 보장하고 있다. 미국 과학재단(NSF)은 연구개발 도전성 및 모험성 강화 위해 과제선정 시 연구의 잠재적 혁신성을 평가한다. 국방부 고등연구기획국(DARPA)은 고위험대형과제 성공률 제고를 위해 과제기획에서 원천응용기술개발까지 단계별 경쟁형 R&D를 실시한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과학기술진흥기구 첨단기술 탐사연구 프로그램은 연구자에게 연구진행 전권을 부여하고, 20~30년 장기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창의적 연구환경을 제공한다. 영국은 자유공모형 R&D지원이 공학자연과학연구회(EPSRC) 예산(‘10년 기준)의 약 40%를 차지한다. 7개 과학기술연구회에서 소관 분야별 기초연구에서 상용화까지 칸막이 없는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노벨과학상 배출 위해 과학기술 R&D에 파괴적 혁신과 창의적 교육연구환경 필요!

 

경제성장 둔화는 역사적으로 기초연구 결과가 적을 때 발생했으며 대공황 극복의 기본은 기초연구에 있었다(A. Slywotzky, Bloomberg Business Week, 2009). 그러나 한국의 기초연구 경쟁력은 대단히 낮고 R&D 경영효율성과 사업화 효율성 또한 현저히 낮다. R&D 및 기초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파괴적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 기초연구 투자 및 R&D 우선순위 수립 과정에 정부관료 참여를 제한하고, 공공민간 과학기술인들의 참여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둘째, 기초연구비 투자를 45%이상 대폭 확대해나가고, 연구자(연구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 자유공모형 과제를 40% 이상 확대하여 도전적모험적 과제를 선지원하고, 연구지원기간은 정권변동에 관계없이 최소10년 이상 안정적 지원하되 연구책임자에 대한 전권 부여가 요구된다. 기초연구에서 상용화까지 가치사슬 단계별 전방위적 지원이 요구된다. 셋째, 양적질적(전문가) 평가를 병행하되, 양질연구의 판단평가능력 향상에 집중해야하며, 종국에는 질적 우수성이 전부인 풍토를 함양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인 처우개선 및 인력양성 방향 및 체계를 내실화 및 다양화해야 한다. 과학기술인 사기저하의 주 요인인 과학기술 출연기관 임금피크제 적용을 취소하고, 정년연장 및 정규직 비중을 높여나가야 한다. 은퇴여성 과학기술 양성 및 활용 정책의 적극적 추진이 요구된다. 대학교육에서 비판적 사고배양, 학제간 융합형 인재양성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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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2016.06.02 11:14

[미래정치센터․영광군민신문 동시게재 칼럼]


민주화 이후의 지방자치
- 근 20년의 지속적 발전과 최근 3년의 급격한 후퇴, 향후 발전의 길 -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민주화 이후의 지방자치

 

고려대 최장집 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87년 민주항쟁 이후, 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구조, 변화를 다루면서, 새로운 위기를 지적하고 발전과제를 제시한 책으로, 2000년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읽혀져 왔다. 지방자치는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 불리며 민주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지방자치는 지방분권 구조가 서비스 제공과 업무수행 면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주민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에 민주주의를 공고화 시킨다는 의의를 갖는다.


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도입된, 아니, 박정희 정권이 무기한 전면 중단시켰다 재실시 된 것이 지방자치다. 민주화의 상징 김대중 대통령이 ‘지자제 없는 민주화’는 인정할 수 없다며, 정치생명을 건 투쟁 끝에 부활된 것을 우리 역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91년 지방의원 선거, 1995년 지자체장 선거 실시와 함께, 지방자치가 시작되어, 현재 20년이 지난 시점에 지방자치의 제도화 및 성숙 단계에 이르고 있다.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발전이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만큼, 민주화 이후의 지방자치 또한 우리에게 중요하다.

 

근 20년 간 지방자치의 지속적 발전과 한계

 

지방자치는 1991년 부활이후, 지방분권 확대, 주민참여 증대와 더불어 근 20년 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 로드맵을 실시하고, 참여정부 기치를 내걸며, 시민참여 역량증진 및 제도화에 역점을 기울이며, 지방자치 발전을 견인하였다. 지방분권은 사무․인사․재정분권이 핵심인데, 자치사무 비율이 김대중 정부에 41.7%에서 이명박 정부에 63.5%까지 증가로 사무분권이, 기구․정원 승인권 대폭 이양, 총액인건비제 실시, 지자체 내 지방직공무원 98%로, 인사분권이, 지방교부세율 상향(13.2%→19.24%), 지방채발행 총액한도제 및 지방소득․소비세 도입, 탄력세율제 확대 등으로 재정분권 수준이 고루 높아졌다. 아울러 주민조례 제정․개폐 청구제도, 주민투표제, 주민소송, 주민소환제, 주민참여예산제도 등 다양한 주민참여제도가 만들어졌다.


한편, 근 20년간 지방자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제도화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실질적 성숙화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사무 3할 자치(국가․지방사무 7:3), 재정 2할 자치(국세․지방세 8:2)로, 일(사무)는 줬는데, 돈(재원)은 주지 않고 있다. 중앙정부는 지자체 행정사무 감사․조사권, 지방세 과표․세율결정권, 지방재정 60%의 지방재정조정제도(교부금․보조금)을 갖고 있어 중앙정부 의존성은 여전히 큰 상황이다. 다양한 주민참여제도가 도입됐으나, 그 기준이 엄격하거나 인지도가 낮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3년 지방자치의 급격한 후퇴 : 박근혜 정부 지방자치 10대 후퇴․파괴

 

그러나 박근혜 정부 최근 3년간, 지방자치는 후퇴일로를 거듭하고 있다. 시행령 정치를 통해 중앙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자치권(입법․행정․조직․재정)은 총체적으로 침해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근혜 정부 10대 지방자치 후퇴․파괴 실정을 거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리과정 예산 2.1조원을 지방교육청에 전가시키며, 국가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둘째, 박근혜 정부의 지방 사무이양 실적은 0이다. 셋째, 사회보장제도와 유사중복 지자체 복지사업은 행정자치부와 협의 미 이행시 교부세 삭감 조치를 하며, 삭감대상 지방 자율복지사업 1,496개, 관련 예산 약 1조원에 이른다. 넷째, 특별시 자치구 의회 및 광역시 자치구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다섯째, 교육감 직선제 폐지 시도, 교육부의 교육감 직무이행명령 불이행 고발 등으로 지방교육자치를 침해하고 있다. 여섯째, 행자부는 「지자체 예산편성 운영기준」을 강화하여 하달했다. 기준에는 자치권을 총체적으로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담고 있다. 일곱째, 지자체 고유세원인 지방소득세 세무조사권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여덟째, 공정거래위원회는 각종 지역경제 활성화 지원 조례를 경쟁제한 조례로 간주하고, 무분별한 조례폐지를 요구하고 있어, 자치입법권 침해가 심각하다. 아홉째, 취등록세 면제, 지방세 감면 정비, 담배값 인상, 복지재원 전가 등 지자체와 상의 없는 중앙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지방재정 건전성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열째, 이러한 지방재정 악화 책임을 지자체에 덧씌우는 지자체 파산제를 도입하고 있다.

 

지방자치의 성숙과 발전과제 모색

 

지방자치! 험난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경제적 사고를 가진 효율론자들은 지방자치를 중복과 비효율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시행착오 끝에 성숙된 지방자치체제는 가외성을 갖기에 오히려 신뢰성․안정성을 높이고, 오류를 줄여 효율적이다.


지방자치는 지방분권과 주민참여, 자율과 책임이 금과옥조다. 사무․재정 모두 4할 자치 시대를 지향해야 한다. 지방재정에 영향을 주는 정책결정은 반드시 지자체협의체와 함께 하고, 지방세 세목․세율결정권 또한 점차 지자체협의체에 이양해야 한다. 보조금을 제외한 재원사용은 지방에서 알아서 하고, 그 재정악화 책임도 지방 몫이다. 이는 지방의회 역량강화, 주민참여 증대로 가능하다. 지방의회 유급보좌관을 통한 전문성 강화, 주민참여제도의 기준 완화와 적극적 홍보 및 활성화가 그들의 책임성을 높이는 가장 빠른 길이다.

 

[영광군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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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5.16 17:32

[영광군민칼럼]

 

우리나라 국민들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고 광 용(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유엔이 발표한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국민행복지수는 전 세계 158개 국가 중 10점 만점에 총 5.984점으로 47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세계 경제순위는 2015년도(GDP기준)에 11위를 차지했던 것을 보면, 경제적 풍요로움에 비해, 실제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턱없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로 OECD 국가 중 세계 1위의 자살률,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1.25명, 미국 중앙정보부 2014년 6월 ‘월드팩트북’)이 우리나라 국민행복의 현실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한편, 가장 행복한 나라는 스위스였고, 아이슬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순으로 나타났다.

 

국민행복은 정부역량과 밀접

 

놀랍게도 유엔의 국가별 행복지수와 유사한 순위를 보이는 지수가 있다. 그것은 정부역량(strength of state) 지표를 활용하여, 고려대 김태일 교수가 OECD 국가를 대상으로 분석한 정부역량(부패통제, 정부효과성, 정치적 안정성, 법치주의, 규제의질, 참여/책임성) 수준이다. 정부역량이 가장 높은 국가는 핀란드였고,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가 5위권 안에 들었으며, 네덜란드와 노르웨이가 각각 7위와 8위를 기록했다. 즉,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로 상위권에 위치한 국가들이 정부의 크기(큰정부/작은정부)와 관계없이 유능한 국가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정부역량(정부의 질)과 국민행복(국민 삶의 질)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은 무능한 작은 정부에 해당되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고 행복은 육체적․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쾌락에 있다’고 주장하듯, 대체로 행복은 욕구와 관련이 높다. 한편, 종교나 철학에서는 욕구를 줄여야 행복이 커진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욕구수준을 낮춤으로써 욕구충족을 더욱 빨리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욕구충족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 필요조건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미국의 심리학자 머슬로우(Maslow)는 5단계로 제시했다. 1단계 의식주 등 생리적 욕구, 2단계 추위·질병·위험 등 위협으로부터 안전 욕구, 3단계 애정과 소속 욕구, 4단계 자기존중 욕구,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이다.

 

욕구 충족 못 시키는 박근혜 정부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행복의 필요조건인 국민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주고 있는가? 우선, 우리 국민의 10명 중 4명 이상이 ‘내집 마련’을 못하고 있어, 1단계 생리(주거)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 국토교통부 2014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자가주택 보유율은 58%였는데, 첫 조사를 시작한 2006년 61%에서, 2008년 60.9%, 2010년 60.3%, 2012년 58.4%로 지속적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같은 기간 중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자가주택 보유율은 각각 0.2%p, 2.9%p가 줄어 주거양극화도 심화되었다.

 

둘째, ‘세월호 침몰사건’과 ‘메르스 확산’은 2단계 욕구인 국민안전을 크게 위협했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3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무분별한 규제완화와 민간위탁, 책임성 부재, 초동대처 실패 및 뒤늦은 구조 등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메르스 확산 또한 정부의 안일한 초기 대응, 뒤늦은 병원공개, 컨트롤 타워 오작동 등으로 6월 30일 기준, 사망 33명, 확진자 182명으로 세계 2위의 메르스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사스가 발생하자 국내유입 차단, 빠른 초기대응, 선제적 콘트롤 타워 작동 등으로 1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동시에 WHO로부터 ‘사스예방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최근 ‘삼포세대(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의 집값,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 지출 등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인데, 이러한 삼포세대는 3단계 애정과 소속 욕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심지어 청년세대를 실업자와 신용불량자가 넘쳐난다는 의미에서 ‘실신세대’라고 까지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년세대의 취업난과 비정규직 문제를 통해 청년들이 4단계 자기존중의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까지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청년문제에 대한 이해는 있으나 내놓은 청년고용정책은 취업지원 서비스, 일자리 창출지원, 직업능력개발 지원 등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하는 대안들이다.

 

박근혜 정부는 현재 1단계 생리(주거) 욕구부터 5단계 자아실현 욕구까지 모두 적절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박근혜 정부가 국가비전으로 제시한 ‘국민행복시대’ 달성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정부가 유능하고 역량이 높아야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국민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마커스 아그나포스(Marcus Agnafors)는 ‘좋은 거버넌스(국가관리/협치) 혹은 정부의 질은 ①최소의 도덕성과 공공정신(public ethos), ②좋은 의사결정과 이유제시, ③선행의 원칙(갈등의 가이드라인 제시), ④효율성, ⑤법치와 공명정대, ⑥안정성 등 6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6가지 구성요소와 욕구 5단계의 충족여부는 정부가 국민행복을 가져오는 좋은 정부(Good Government)이자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기준으로 삼을 만 하다 생각한다.

 

영광군민뉴스 2016년 5월 11일자 6면 게재.

-> 연구소 칼럼 <정부가 유능해야 국민이 행복하다> 내용을 조금 다듬었으나, 내용은 거의 동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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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3.08 15:44

총선에서 진보도 지역발전을 이야기 할 때!
-지역발전특별회계 바탕 균형·자율 발전의 상생 지향-

 

 

고 광 용 (미래정치센터 연구위원)

 

진보정당이 지금껏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 있는 데, 바로 지역발전이다. 지역발전에서 지역경제는 빼놓을 수 없고, 토목·건축 등 개발에 대해서 얘기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역발전 개념을 농·어업·식품을 포함한 지역경제, 문화, 복지, 중소기업, 레저, 환경 등 전반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고민해보면, 당연히 진보정당은 지역발전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반드시 해야만 한다.

 

국민 전체로 볼 게 아니라, 조금 더 쪼개서 지역민들, 서민들,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지역발전에 더욱 중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역민들의 삶을 대변하고,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진보정당과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진보정당이야 말로, 지역발전과 지역경제를 더 먼저 얘기하고, 제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의당이 지역발전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염두 할 것은 무엇일까? 사실, 진보정당만이 고민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슨 돈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할 것이냐의 문제다. 공짜로 지역 문화시설을 확충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보정당이 힘 있는 야당이 되고, 미래 비전을 쌓기 위해서는 역시나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되, 그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고, 쓰느냐에 상당히 민감해야 한다. 복지국가를 구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힘 있는 진보정당이다.

 

정부가 지역발전을 위해 마련하고 써 온 돈이 지역발전특별회계다. 이 회계는 당초 노무현 정부가 균형발전특별회계(이하 균특회계)로 도입했으며, 지방주도 예산편성, 지방의 신축적인 예산집행 및 자율권 확대, 중복투자 방지 및 투자효율 제고 등이 주요 특징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역발전정책 패러다임을 ‘균형발전’에서 ‘광역경제권 발전’으로 전환하면서, 핵심기조를 ‘광역화, 효율화, 자율화’로 정하고, 지역 중심의 개발과 전략적 국가재원 배분의 조화를 통한 지역경쟁력 제고에 주안점을 두고 광특회계로 변경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지자체 자율성 제고 및 신지역발전정책 지원을 위해 지특회계로 개편하였다. ‘국민행복 시대 구현’이라는 국정비전 아래 기본 방향은 ➀지역주민 기반확충과 지역발전 역량강화, ➁지역경제 활력회복 투자 강화, ➂지역 일자리·복지·의료지원 통한 삶의 질 향상, ➃지역균형발전 시책 지속추진 등이다.


이 지역발전회계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재원으로, 2005년에 약 5.5조원으로 시작하여, 2015년 약 10.3조원(정부예산 대비 2.7%)에 이르고 있다. 포괄보조사업으로 분류되는 생활기반계정은 4.5조원으로 총 재원의 약 44% 수준이며, 시도 자율편성사업은 2.8조원, 시군구 자율편성사업은 1.7조원 규모다. 그 외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발전계정 5.4조원, 제주계정 0.3조원, 세종계정 0.1조원 수준이다.


그러나 이 지특회계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우선, 균형과 자율발전 가치의 동시 퇴색이다. 한국의 지역발전은 개발시대 이후 차등적·불균형적으로 이루어져왔고, 균형발전이 특히 요구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도모하고자 했던 균형발전의 개념과 가치는 상실하고, 차등적 지역발전으로 변화되고 있다. 최초 2005년 균특회계가 도입된 이후, 지역별 지역총생산(GRDP)을 보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반면, 시도·시군구 자율편성사업(포괄보조사업) 또한 4.5조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둘째, 국가 전액보조가 아닌, 대부분 지방비부담 매칭사업이므로 재원여력이 넉넉지 않은 지자체는 지역발전재원을 사실상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업집행률에 따라 다음 해 인센티브를 지급하므로 이러한 상황은 악순환이 되고 있다. 또한, 시도·시군구 자율편성사업 신청에 대한 유인이 부족하다. 실제 지자체 정책 현장에서는 행복생활권사업 초기단계로 사업화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낮다. 또한 보조율이 낮아 지방비매칭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어, 보조율 상향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예산신청 실적에 따른 차등지원 등 재정인센티브 제공에 대해서도 지자체들이 공평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균형발전 목표는 더욱 달성하기 어렵고, 지역 간 빈익빈부익부가 더욱 가속화 될 수 있으며, 차등적 지역발전이 우려된다.


셋째, 지특회계 재원규모는 이명박 정부이후 9~10조원 수준에서 머물러 있어, 자연점증도 없이 답보상태에 놓여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지특회계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낮다는 것을 반영한다. 특히, 포괄보조사업은 생활기반(지역)계정에 한정된 것으로 재원확충이 요구되는 부분인데, ‘11년 이후 오히려 2천억원이 줄었고, ’15년에 포괄보조사업이 확대되면서 4.5조원 규모로 증가했으나, 향후 추가적인 증가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재정 총지출 연평균 증가율에 계속해서 못 미치는 양상이다. 


넷째, 포괄보조로 지역의 자율성은 일부 높아졌으나, 여전히 국고보조사업의 형태이다. 내역사업들이 살아있고, 기획재정부가 기 설정한 포괄보조 사업별 보조율이 정해져 있기에, 진정으로 원하는 사업을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데 여전히 제약이 있다. 실질적으로 지자체는 여전히 국고보조사업의 형태로 보조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지역별 재정여건을 감안하지 않은 채 사업별로 동일한 보조율을 설정하고 있다. 사업별 보조율이 30~100%로 동일하게 설정되어 있어 지자체별 재정여건에 따라 사업집행율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사업별 보조율 차등화는 고보조율 사업을 우선 추진할 개연성이 높아지는 등 시도의 재원배분 교란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부담인 부지매입비는 정작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 현행 지특회계사업 지침에 따르면, 타당성 검증과 부지확보, 각종 영향평가, 지방재정투융자심사 등 사전행정절차 미이행 사업은 원칙적으로 신청자체를 불가하고 있다. 사전행정절차 중 부지확보를 제외하고 재원투자 타당성 확보를 위해 충분히 수긍이 되나, 국고지원이 미확정된 상황에서 과중한 재원부담이 요구되는 부지매입부터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또한 지특회계 실질집행률을 저하시키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지특회계 포괄보조금 제도는 균형발전에 크게 역행하는 제도다. 무엇보다 지특회계의 지향 및 추진전략에 균형발전의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가칭 ‘지역균형발전특회계(안)’로 명칭변경하고 생활기반계정은 다시 ‘지역(자율)개발계정’으로, 국가직접사업으로 운영되는 경제발전계정을 ‘균형발전계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농·산·어촌/특수상황 지역 등 낙후된 곳을 우선순위로, 지역범주를 넘거나 한정된 재원으로 사업추진이 어려운 SOC 및 광역교통(버스/기차)·물류체계 구축, 병원(고령자보호, 산부인과 등) 설립, 인구규모 영세한 지역연계 소규모 대학 설립 및 경쟁력 향상, 지역인적자원 개발사업 및 이와 연계한 지역연계특화산업 육성 및 일자리 창출, 지역 과학기술 진흥 및 문화·관광자원 육성 등에 지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차역이 없는 기초 시군구에 순차적인 기차역 설치가 가능할 것이다.

 

지역발전특별회계 및 계정 명칭변경()

지역발전특별회계 지역균형발전특별회계

균형적 지역발전

자율과 균형의 조화

생활기반계정 지역(자율)개발계정

경제발전계정 균형발전계정

 

지특회계 총 재원규모를 정부예산 대비 2.7%(10조원)에서 4%(15조원) 수준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최소한 정부재원의 자연증가분 만큼의 매년 점증적 재원증가가 필요하다. 국토균형발전 재원마련을 위해 과거 재벌기업이 받았던 각종 국가지원을 다시 환원하고, 책임을 나누는 자세가 필요하다. 5조원 세수확보 기반은 법인세 실효세율 증대를 통해 가능하며, 그 시작은 연구개발세액공제 등 다양한 법인세 감면혜택을 축소하는 데 있다. 2014년 기준, R&D 세액공제액은 3.4조원에 이른다.


국고보조사업의 포괄화에서 진정한 포괄보조금 제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기존 내역사업들을 그대로 둘게 아니라, 포괄사업의 성격에 맞게 창의적으로 구상하여 신청한 사업이 기존 내역사업과 다르다고 해서 예산신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각 지역의 자원과 현실에 맞는 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방안이 요구된다, 지역별 포괄보조금의 총액을 제시하고, 실질집행율을 높이기 위해 포괄보조사업별 보조율을 높여주고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광역시도와 기초시군구가 참여의지가 높아지고 진정한 포괄보조금으로 변화될 수 있다.


지자체별 재정여건 감안 보조율 재설정이 요구된다. 특히, 성장촉진지역의 경우 타 지역에 비해 문화·체육·관광시설과 농림·해양 관련 산업지원에 대한 지역수요가 높을 수 있게 20~30%p 상향적용 차등보조율제가 필요하다. 또한 성장촉진지역과 광역시 자치구 중 재정자립도와 자체사업비 비중을 동시에 감안하여 지특회계 사업 부지매입비를 국비에서 50% 이내로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역발전 포괄보조사업 대상 및 재정여건 감안 차등보조율 설정(예시)

 

부처

포괄보조 사업명(적용대상)

보조율

(기존)

성장촉진지역/

광역시 자치구

차등보조율

시도

자율편성

사업

문화부

문화시설 확충 및 운영

40%

6080%

관광자원 개발

50%

7080%

체육진흥시설 지원

30%

5060%

지역문화산업기반 지원

50%

7080%

산업단지폐산업시설 문화재생

50%

7080%

문화재청

문화유산 관광자원 개발

50%

7080%

농림부

농촌자원복합산업화지원

50%

7080%

농업기반정비

80%

-

지역전략식품산업육성

50%

7080%

해수부

어촌자원복합산업화지원

50%

7080%

어업기반정비

80%

-

해양 및 수자원 관리

50%

-

수산물산지가공시설

30%

5060%

농진청

지역농촌지도사업 활성화

50%

70%

행자부

지역공동체 일자리 지원

50%

70%

고용부

사회적기업 일자리창출

75%

85%

복지부

지역자율형 사회서비스 투자사업

5080%

7090%

시군구

자율편성

사업

국토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

50%

70%80%

농림부

일반농산어촌 개발

70%

8090%

지역행복생활권 협력사업

7080%

8090%

 


결국, 새로운 정의당식 지역발전 구상은 완전히 새로운 방안의 창조보다는 기존의 틀에서 개혁을 고민하되, 그 틀을 깨고 나가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부터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들은 지특회계와 포괄보조사업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역랑 있고, 창의성 넘치는 사업들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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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2.03 14:28


이 승 환 (미래정치센터 기획실장)



제1야당의 인재영입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를 시작으로 시작된 인재영입은 안철수 의원 탈당으로 침체된 당의 분위기를 붐-업하는 데 일조했다. 지나치게 성공한 사람만 불러들이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런 영입 자체에 부정적일 이유는 없다. 모든 정치인이 처음부터 직업정치인일 수는 없다. 정치인은 그 이전에 다른 직업의 누군가였다.


자기 직업세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이 정치의 무대에 불려나오는 것은 선거 자체가 갖는 귀족정(Aristocracy)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는 그 어원이 동일한 단어로, 고전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민주적 제도로 간주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도 선거의 귀족정적 특징은 유지된다. 선출되는 사람은 선출하는 사람보다 무언가 더 뛰어난 개인으로 간주된다. 아니 그런 개인이어야 한다. 선출되는 사람은 지적, 도덕적, 경제적 역량이 뛰어난 유명인이다.


하지만 선거에서 시민 다수와 다른 모습의 엘리트만을 선출할 수밖에 없고, 의회가 그 엘리트가 속한 직업과 계급의 제한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기관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 근대 초 의회는 그런 모습을 띄고 있었는데, 의회가 민주주의의 기관이 된 것은 보통선거와 대중정당이 출현한 이후의 현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하게 되고, 공천권을 행사하는 정당의 존재로 정치의 모습과 기능은 비로소 바뀌었다. 초등학교 교육경험이 전부인 노동운동가 룰라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인구의 8%에 불과한 흑인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한다. 이것은 노동자당이나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당은 자기가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엘리트를 만들어 내며, 시민이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할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의 정치엘리트들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직업적 정치인이 되는 한국적 경로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비좁다는 것이다. 19대 국회의원 직업군을 보면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출신이 4.3%, 기업인 4.7%, 교수 등 학자가 8%, 관료가 5.3%이다. 하지만 이 조사는 19대 총선 당선 직전 직업을 묻는 조사이다. 재선 이상까지 보면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비율은 15%까지 뛴다. 교수나 관료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도 크고 경제력도 큰 직업과 집단에 속했던 이들이 대한민국 국회의 ‘얼굴’들인 것이다. 사회의 엘리트는 곧바로 정치엘리트가 되며, 정치엘리트는 정당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일한 관점에서 한국 정당들의 인재영입을 바라보면 단지 그들이 성공한 엘리트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이 약한 정치체제에서 사회엘리트가 정치 엘리트가 되는 방식의 문제이다. ‘정치를 하고 싶으면 정치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역설에 따라 엘리트들은 정치를 시작할 때 으레 비정치적 이력을 읊어야 한다. ‘정당에서 일하게 될 줄 몰랐다’거나, ‘정치 같은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로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엘리트가 당연히 가져야 할 민중성을 벌충하기 위해 시장가서 떡볶이 사먹는 등의 어색한 일을 해야 한다. 시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 엘리트들이 이전에 무엇을 대표했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화려한 직업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치와 시민의 사이의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지지 못한다. 시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도 점점 멀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2016년에는 세대배제라는 더 불길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종인, 윤여준 같은 70대의 노책사들이 전면에 나서 야당의 당권을 행사하는 것이나, 4-50대의 비정치적 엘리트 영입은 어쩌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제론토크라시(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학 교수의 개념으로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고령자 지배체제)는 그보다는 더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 20대 총선 예비후보 중 정당을 불문하고 40세 미만 출마자는 고작 40여명 규모라고 하는데, 이는 19대 총선의 80명은 물론 100명을 훨씬 넘겼던 17대 총선에 비하자면 거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성공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는 이제 자기 세대의 불행을 말할 대표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당들은 애써 만들어진 청년 정치인들에게 “젊은 사람이 기회가 더 있잖아” 식으로 치어리더 취급한다. 사실 이런 제론토크라시에서 그 기회가 오기는 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정치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바꾸는 변화가 가능할까?


얼마 전 지역정치인 내 동료 한명은 이런 상황을 두고 “그냥 정당활동이 아니라 고시나 볼걸 그랬다”고 말했다. “그게 더 정치하기 쉬웠을 것 같다”면서. “그건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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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6.01.22 14:13








최 석(미래정치센터 부소장)


대학생이 되어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 밑에서 취업을 준비하다 직장인이 된다. 직장생활을 하다 전세금대출을 받거나 주택을 구입하여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해 결혼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할부로 차량을 구입한다. 빚의 릴레이 경주가 우리 인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대다수 대한민국 일반인의 이야기일 것이다. 


금융권은 대학생 신분과 소정의 서류만으로 학자금을 대출해 준다. 캐피탈 회사는 차량을 담보로 차량 구매대금을 대출해준다. 직장인은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급여를 담보로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준다. 돈이 없어도 매매대금의 30%(2014년 8월 이후 LTV 70% 일괄 적용)만 있으면 구입할 아파트를 담보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 부모님에게 물려 받은게 없다면 보통 40대 전에 이 정도의 빚은 누구나 갖고 있다. 심지어 생활필수품으로 인식되는 휴대폰으로도 대출이 가능하다. 이 모든 대출의 전제는 경제적 수입 면에서 ‘내일도 오늘과 같다.’ 라는 것이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로 수입이 줄어든다면 이미 받은 대출금은 어떻게 해결하나.


이런 이유로 정부는 성실하나 불운한 채무자를 위한 제도로 개인회생, 개인파산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부터 이 제도는 존재하였으나, 그 활용 면에서 죽은 법이나 마찬가지였으나 2004년을 기점으로 증폭하기 시작하였다. 2004년 증폭한 이유는 1997년 경제대란 이후, 정부 주도하에 내수활성화를 위해 거리에서조차 카드를 발급해 준 이유가 크다. 필자도 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증보여주고 카드를 만들어 그 자리에서 현금을 받아 그 돈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신 경험이 있다.


노동력이 있는 사람이 부양가족을 포함한 최저생계비용 이상의 수입이 있다면 최저생계비용을 제하고 나머지를 5년간 변제하면 다 갚지 못할지라도 변제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 회생이다. 최저생계비용 이하를 버는 사람이라면 파산, 면책해주는 것이 개인파산이다.


개인회생제도보다 개인파산제도가 채무자에게 유리한 제도이다. 파산은 벌어서 갚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벌어서 갚을 만큼의 돈을 못 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실제 먹고 살 돈도 없는 채무자는 민사집행법상 강제집행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결론적으로 채권자는 채무자를 심적으로 괴롭히는 것 외에는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파산의 요건을 갖춘 자는 파산, 면책해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추세는 파산 신청의 수요는 적어지고 회생의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개인파산 신청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꾸준히 낮아져 2014년에는 55,467건에 머물르는 반면, 개인회생 신청은 같은 시기에 꾸준히 증가해 2014년에는 110,707건에 이르렀다 한다. 회생사건이 파산사건의 두 배에 다다른다.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연구 자료는 없지만, 파산신청의 면책율이 낮아진 것이 주원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산신청을 하면 법원의 회생권유가 있다. 벌어서 갚으라는 판사의 말을 듣고 어느 일반인이 싫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회생 권유를 듣고 채무자들은 파산이 아닌 회생으로 전환한다. 파산신청을 했다 면책을 받지 못하면 파산자로 살아야 하는 불이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것은 옷처럼 유행이 있다. 제한적으로 법 조문을 만든 탓에 법은 항상 해석이 뒷 따른다. 면책불허가 사유를 좁게 해석하면 그만큼 면책율이 높아 지는 것이고, 넓게 해석하면 면책율은 낮아지는 것이다. 현 정부 들어서 파산으로 면책받기는 힘들어 졌기에 파산 신청율은 낮아지고 회생 신청율은 높아진 것이라 해석된다.


파산과 회생의 긍극적인 목적은 면책이다. 면책이란 채무자의 변제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채무자에게만 있는 것인가. 길가에서 신분증 하나로 카드를 발급해 주고 카드 하나로 모자라 모든 카드사에서 경쟁적으로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결국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은 더 쉬운 소비를 했고, 심지어는 일명 돌려막기까지 가게 된 것이다. 집 값의 30%만 있어도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게 했고, 부동산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격이 상승할 거라 미디어에서는 호언장담을 했다. 채권자들은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이들을 모럴헤저드라며 비난했다. 채무자들 조차도 윤리적 책임감을 넘어서 죄책감에 시달리곤 하였다. 그러나 주식을 한 주라도 사서 돈을 날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는 대원칙을. 주식에서 돈을 날린 사람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를 욕하기 보다는 투자를 잘못한, 경제 흐름을 제대로 파악 못한 본인을 탓 할 것이다. 금융권은 채무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투자자인 것이다. 그들이 채무자의 신용을 판단해서 투자한 것이다. 그런데 왜 채무자를 탓한단 말인가. 같은 논리라면 제대로 갚을 것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돈을 빌려준 본인을 탓해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돈 못 갚는 사람을 편드는 것이 아니다. 같은 경우에 같은 규칙을 적용하자는 소박한 주장이다. 면책받은 이들은 넘어졌다 단지 일어난 것 뿐인 것이다. 남들은 저 멀리 앞에 달리고 있는데, 이제 면책 받은 이들은 출발선에 선 자들인 것이다. 출발선보다 더 뒤에 출발하던 이가 이제 출발선에 선 것 일뿐이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 파산, 회생으로 면책받은 이들이 있다면 비난하지 말고 따뜻한 시선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전쟁이 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자와 아이라 한다. 가장 힘없는 자들부터 피해를 보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는 가장 힘없는 채무자들일 것이다. 망하려 해도 망할 수 없는 사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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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5.12.29 16:40

 

 

 

 

 

 

 

 

 

 

 

박철한 (미래정치센터 연구실장)

 

 

 

 

2015년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새해에 서민들은 무엇보다도 경제, 통일, 복지국가 등 거창한 대의명분 이전에 삶을 지탱해 주는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기원했다. 아니, 서민들의 가장 큰 대의명분이 살림살이였으며, 이 서민들의 대의명분이 조금이라도 실현되길 바랬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한 해의 석양 속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국민의 살림살이라는 대의명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기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2004년 대한민국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후, 십년이 훌쩍 지났지만, 집 없는 서민들은 전세대란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대출에 대출을 낀 '빚더미 집'과 수도권 외곽으로 전세를 찾아 떠도는 전세난민 중 양자택일의 처지에 놓여있다. 양자택일의 처지에 놓여있다.

 

그나마 도심의 삶에서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거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우리나라 재활용 쓰레기 재사용 비율을 90%이상 끌어올렸던 도심 재활용품 수거사업은 고물상의 입지조건 강화 정책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폐지 등 재활용 수거가 어려워지면서 노인층의 궁핍한 삶이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취업전쟁에 내몰린 청년들은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의 위정자들이 만들어 놓은 황량하고 쓸쓸한 도시의 풍경 속에 오늘도 삶을 지속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제 ‘자수성가’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보다 힘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경제적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수단은 선대로부터의 재산 증여와 상속만이 유일해 보인다. 사실 최근 시중의 ‘금수저, 흙수저’ 얘기는 부르주아냐, 프롤레타리아냐를 호명했던 과거 사회과학 담론의 새로운 방식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사회현실은 아주 잠깐 사람들이 계층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사회 자체가 급속 냉동된 빙하기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OECD 통계는 우리사회가 얼마나 절망적인가에 대해 가감없이 보여준다.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는 2003년 1위가 된 이후 13년 동안 요지부동이다. 노인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저출산 1위, 급격한 고령화 진입 속도 1위, 가계부채 증가율 1위 등 열거하기도 힘든 우울하고 참혹한 자화상을 한 해가 지나는 길목에 마주하고 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욱 꼬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참혹한 우리사회 본모습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정치’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정치가 우리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적 피로도를 높이고 사회적 문제를 끊임없이 양산해 내는 집단이자, 원천이 되었다.

 

현대 정치의 요체는 대의민주주의라고 한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의 정치가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여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러나 2015년이 저물어 가는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통합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통합 최고의 상징이자, 실천가인 대통령은 통합이 아니라, 선거구 획정 개악, 노동개악, 위안부 합의로 갈등과 분열을 오히려 부추기고 국민들의 분노와 국제적인 망신을 사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대통령은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친박세력을 ‘진실한 사람’ 운운하며 홍위병으로 불러 세우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오롯이 자기를 위한 정치에 올인하고 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구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대 총선의 ‘자기 살길 찾기’ 위해 집안싸움이 한창이다.

 

통치자와 정당, 정치인은 모름지기 국민들의 ‘자기 살길 찾기’를 귀담아 듣고 조정과 타협을 통해 ‘살길’을 마련해 주는 통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자와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자기 살길 찾기’에 몰두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정치 상황은 정치가 아닌 투기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무능한 정치가 불러온 국민의 살림살이의 위기와 붕괴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위정자들이 내세우는 창조경제니, 통일대박이니, 포용적 성장이니 하는 말만 그럴듯한 얘기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비루하고 의미없는 말들의 나열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가 국민들을 배반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고 해법이다.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2016년 4월 13일 개인적, 정치적, 사회적 선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국회의원 선거에서 변화의 원천인 ‘정치의 변화’를 위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2016년은 무엇보다 국민들의 제1의 대의명분인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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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연구소 칼럼2015.12.22 16:43

 

 

 

 

 

 

 

 

 

  

 

김혜련(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고양시 의원)


 


서울 엑소더스가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치솟는 전셋값을 버티다 못한 3040세대들이 대거 경기도와 인천으로 옮겨가고 있다.
서울에서 탈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남, 고양, 구리, 남양주 등으로 자리 잡는다.

 

대규모 택지개발지역이 있고, 서울접근성이 좋은 고양시는 대표적인 신흥이주 지역이다.
은평구에서 파주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 통일로에 접해있는 한 지역은 최근 3년 동안 빌라건설이 급증하였다.

 

아파트를 단 한 동도 짓지 않았는데도 인구가 1만명이 증가할 정도로 빌라가 많아졌다.
20호(20세대)까지는 조건없이 지을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농촌마을 자투리 필지마다 3-5층짜리 빌라가 들어와서 마을전체가 빌라로 가득 찬 곳이 되었다.
그런데 놀이터 하나, 자투리 공원 하나 없다. 시립어린이집은 말할 것도 없으며, 초등학교는 콩나물 교실이 되었다.

 

20호 미만의 건축에 대해서는 기반시설 조성에 대한 조건을 붙일 수 없으니,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공간인 놀이터며, 공원이며 고양시 예산으로 조성해야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곳에 인도가 없는 곳도 있다.
대규모 빌라단지를 조성하는 곳에서 ‘단열재를 기준미달제품을 쓴다’는 제보가 있어서 공무원이 감사를 나갔더니, ‘실제로 기준미달의 단열재가 쓰이고 있었다’는 결과가 행정감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짓고 분양하고 사라지는 빌라에 대해서는 향후 문제가 생겨도 대응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울의 작은 평수 전세 값으로 넓은 평수의 빌라를 구입할 수 있으니 분양률도 100%에 가깝다.

 

하지만 주거환경은 이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시내와 한참 떨어져있고, 주변에는 변변히 산책할 곳도 없다. 아이들 놀이터도 없고, 어르신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눌 공원도 없다.
누가 봐도 난개발 지역이 되었다.
공중파 방송의 메인뉴스에 이곳의 초등학교가 난개발로 인해 콩나물 시루교실이 되었다는 뉴스가 나간 후 마을 전체와 학생들 전체가 우울감에 빠졌다.
규제가 없는 난개발 지역에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서울의 ‘미친 전세값’을 탈출해서 왔더니, 이사 온 곳은 변변히 살만한 곳이 못 되는 곳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정부의 건축 규제완화는 계속되고 있다.
2014년 6월, 주택법 시행령 개정으로 공동주택의 기준이 20호에서 30호로 완화되었다. 즉, 30호까지 기반시설 없이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지난 10월 고양시의회 임시회에서는 규제제도 개선 차원이라며, 개발행위 허가시에 허가권자인 시장이 조건을 붙일 수 있도록 되어있는 조항을 삭제하는 조례개정안이 제출되었다.
시장의 권한을 규제라는 이유로 없애게 되면 개발행위에 대해서 조건을 붙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난개발이 더욱 심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중앙부처에서 불필요한 규제개선 실적을 보고하라는 공문이 계속 내려오고, 이에 따라 공무원들은 난개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와 권한을 규제라고 하며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규제완화로 이익은 특정인에게 집중되고 극대화 되지만, 그 피해는 불특정 다수에게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고, 결국은 누군가의 불이익과 손해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지역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시의 예산으로 작은 공원과 놀이터를 만들고 인도가 없는 길에 인도를 설치하고 있으나 가속화되는 난개발을 막기 어려운 상황이다.

 

난개발 문제를 제기했더니 시민단체 활동가 한분이 “그런 저렴한 집이라도 있어야 전세난민들이 갈 곳이 있는 것 아니냐” 고 하신다.
과연 그럴까?

 

전세난민의 탈출구,
어떤 개발, 어떤 집이어야 하는가?
난개발 지역의 빌라인가?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공급하는 공공임대주택인가?

 

전세난 대안마련과 동시에 어떤 주거환경인가에 대한 고민을 함께 시작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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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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