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칼럼2017.07.26 16:54

프로세스의 한계와 주체의 진화, 관료주의의 사회적 비용

 

 

안 오 성 전문위원

(항우연 책임연구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기반 전문위원)

 

 

1. 중대형 도전적 과제 개발 PM으로 트레이닝 받았던 회상

 

KAIT-50 개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에, 2가지 일을 했었다. A-B-A-End 형식으로.

세부계통중심의 시스템설계통합 -> 착륙장치개발 기술관리 PM -> 시스템설계통합 기반 지상-비행시험 준비와 T/S -> 10회 비행시점 퇴사

B의 일을 할 때, 일생을 바꿀만한 빛을 조우했다. B의 과업을 리드했던 록히드 마틴의 최고 엔지니어 (구루라 할 만한 인물) 한 사람이 세계 굴지의 프랑스 기업을 상대로 매주 그리고, 2 ~3회 전면적 현장기술협상 "전투"에서 번번이 윈윈으로 이끄는 장면은, 한 사람의 기술전문인이 얼마나 큰 가치를 길어 낼 수 있는지를 눈 앞에서 보여주었다.

해당 기업은 번번이 밀리고 그에 따른 비용을 자신들이 치르게 되자, 자신들이 가진 베테랑급 기술협상 전사들을 대거 투입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역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첨예한 기술논리 대결은 한 순간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수개월이 요구되는 해석과 검증의 방향과 기준을 정하고, 이력을 관리하는 디테일과 다른 이슈와 연결짓는 통합성, 그리고 댓가를 감내하는(-을 관계의 일방적 소통이 아닌) 결정이 포함된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건 해 볼만하다 여기고 2년동안 그를 copy 했다. 논리 전개에서 그가 사용한 접속부사까지... 학습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자 매주 진행되던 Teleconference 에서 구루의 도제 방식은 다음 단계로 진화하였다. 100 여개의 기술이슈 리스트를 정리-업데이트하고 회의 사전에 릴리즈하여 협의의 기준점을 선행-선점하는 것 정도는 기본기이다.

그중 우선순위와 전략을 따져서 두어 시간 프랑스와 비디오를 통해 협상하는 자리. 상대는 PM과 기술관리 PM 그리고 변호사와 서기 등 보통 3~5명으로 구성된 "군단"이 들어오고 모든 대화는 회의록으로 남아 하나의 구속력을 가지는 자리.

하나의 이슈를 해결하려 동원한 논리가 다른 이슈에서는 곧이어 역으로 이용당하거나 이용할 때의 쾌감과 긴장이 지배하는 게임의 자리. 회의에 들어오기전 수많은 자료와 기술 기준서를 뒤적이고, 공학적 계산까지 들먹이며 논리축적을 한 뒤에, 설계의 문제와 해결방향을 서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전투하던 자리. 그 자리를 통해 수 백가지의 기술현안들이 일정지연이나 단 한 건의 비용증가 없이 해결되었던 자리.

그 자리를 그는 내게 내어준 뒤에, 상대의 군단에 밀릴 때까지 그 어려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밀려서 어쩌지 못하는 듯 하면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step in 해서 다시 초토화 시켜버리고 미소짓는...

그가 떠나고 1년 정도 홀로 협상을 응대했던듯 하다. 착륙장치 개발은 T-50 개발에서 기체구조를 제외한 하드웨어 시스템중 가장 큰 규모의 "순수개발" 프로젝트였다. 여타 시스템은 기존 제품의 최소변경 혹은 중급변경후 구매와 그에 따른 설계통합이 주된 과업이였던 것과 대조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여유와 유머는 배우지 못했다. 나의 상태가 그걸 담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고로... 하지만 내가 그토록 그를 copy하고자 했던 것은 일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인간다운 면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맘 깊은 곳을 짓누르던 의미에 대한 갈급, 허무주의는 그 때 어떤 길을 찾은 듯했다. 그 의미를 우연한 계기로 오늘 다시 깊이 생각해본다. 주체는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퇴화하는가와 관련하여. 그 때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한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는 상상보다 매우 크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평소의 준비와 공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방향도 중요하지만, 임계치에 이를 수 있는 "세기"도 필요하다. 그 진화의 임계치를 넘어설 세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니 그 방향과 세기에 어떻하면 늦지 않게 이를 것인가? 혹은 그렇게 도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2. 어제 조우한 문제의식과 화두

 

도전적 연구과제의 기획과 리딩에 있어서, MBA의 훈련, 체계공학, PMP 교육 등은 모두 도구일 뿐이다. 이 모든 것를 익힌다 해도 그가 전사로 거듭나지는 않는다.

국가 과학기술연구체제의 진화를 위해 그동안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중심으로 TF가 구성되어 마련한 "성실도전 체제" (기존 성실실패제도와 대조된 개념으로, 사후 약방문식(연구개발 실패에 따른 제제 면제를 위한)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기획단계(전략과 구체적 사업계획을 정렬시키는)-진행단계(중도중단이나 계획변경에 보다 유연한)-결과단계(계획대로 판단이 아닌 과정중심과 가능성 중심 판단, 실패의 자산화 포함)의 전면적 업그레이드를 유인하려는 프로세스와 제도의 개혁 시도)와 관련한 매뉴얼과 훈련-교육시스템 정비가 약 1년 남짓 활동으로 마무리 되었고, 어제는 그 교육 시범운영 결과와, 체제의 질적 업그레이드가 논의되었던 자리였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내 눈에 다시 들어왔다.

"고기 잡아주기 보다 낚시하는 법을.." 이라 하지만, 아무리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해도, 그 보다 비견할 수 없이 더 중요한 것 - "바다에 대한 열망" - 은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 이 모든 지식과 툴을 이용해 국가 중대형 과제, 융합과제에 있어서 세밀한 비전과 전략, 혁신적인 기획과 그것을 구체적인 사업계획으로까지 표현하고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열망은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열망의 문제인데...?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TF 동료들에게 여러차례 던졌다.

프로세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무엇을 자극하고 대안을 성숙시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의 답변은 계속 "교육체계 설계"로 회귀한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주체성의 진화와 분화"의 가치를 놓치고 있는 우리사회를 반영하듯... 교육으로 인간이 진화할 수 있다는 이 가정의 유효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공교롭게도 같은 날 오후에 또 다른 회의, 소속 기관의 All-Hands Meeting 에서도 동일한 화두에 이른다. 향후 중장기 비전과 관련한 회의였으나 허점이 너무 많이 보여 준비한 분들에게 결례를 무릎쓰고 많은 말을 쏟아내고 "지적질" 했지만, "이 모든 아이디어가 무슨 상관?" 일까라는 생각.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이 누구인가? 내가 아는 가장 착한 사람들... 성실한 연구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제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20년전 보았던 것은 빛이었다. 2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훈련해준 리더십의 본. 하지만 리더십만 있다고 진화의 폭풍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관찰자의 인식체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도 관건이므로.

빛을 본다는 건, 행운이면서도 자기 자신이 만드는 인연이기도 하다. 그 행운과 인연이 만들어지는 장소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소통의 환경보다 더 좋은 환경을 상상 할 수 없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본이 있어야 하겠고 그 본을 제대로 바라보고 copy하는 팔로워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시 인간의 문제, 출연연이라는 기관의 문제로 회귀하지 말고 환경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니클라스 루만이 주장하였듯이 성찰과 진화는 주체적 존재만이 가능하다. 그 진화를 자극하는 지각과 능동적 행위(베버, 1968), 그로 인한 자가적 피드백과 자가진화의 선순환은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만 가능(루만, 1991)하다. 따라서 "그래도, 니가 잘하면 되지..." 라는 편리한 책임전가형 대안전에 던져야 할 질문은, "연구자들과 출연연은 과연 주체인가?" 라는 질문.

중대형 과제 잘 따오는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구조. 그리고 그걸 위해 본부의 연구전략을 정렬시켜야 하는 구조. 모양새 좋은 장기연구에 부처와 기관이 영합할 수 밖에 없는 구조. 그게 아니라도 중소형 과제 따와서 소사장으로 일하면 되는 구조를 깨치고, 전략적 기획자요 DARPA PM형 리더로서 성장하는 좋은 경로를 만들고 이러한 중간 Agent를 육성하는데 공을 들여야 "내일의 정책적 대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질적 경로로의 성장을 섬김으로 도와줄 자치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미래부 시킨 일, 상위 부처의 존재감을 위한 여러행사에 동원되는 현재의 부처종속-앵벌이 환경에서는 이런 리더가 만들어질 수도, 리더십이 발휘될 수도 없는 구조이다.

 

3. 출연연과 연구자의 주체적 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회초리?

 

나는 믿지 않는다. 관료주의의 폐부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면서 출연연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특히 그들이 오피니언 리더임을 자처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일인지하만인지상 의식의 발로, 권력에만 고개숙이는 나르시즘 환자, 공공의 판단을 편협한 판단으로 왜곡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또 믿지 않는다. 관료주의에 모든 문제를 전가시키는 사람들을. 그들도 밤잠을 설치고 일하는 이들이고 누구보다 현실적 한계를 맛보는 이들이다. (특히 하위직 5~6급일수록) 누구보다 공공의 가치를 위해 도전했다가 길이 막히고 감사의 전횡과 국회의 무지, 시민사회의 요구에 응급으로 대응해야 하는 부담, 과학기술정책의 허약한 기반위에서 부실한 꿈을 팔고 실적경쟁해야하는 상위자들의 행위기제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4급이상 고위관료 중심으로 뭉친 한선재단은 바로 고위관료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이들 5~6급 하위직 관료에게 전가시키고 개혁의 방향을 I자 경로니,  Y자 경로니 하며 한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믿지 않는다. 리더 몇사람 바꾸면 잘 될 것으로, 사업기획체제나, 과제평가체제, 인사/기관 평가제도, 예산 경로와 배분율, 예비타당성 조사분석 시스템 좀 바꾸면 잘 될 것으로 기대하는 순진한 상상과 개혁 아젠다의 단순화에 집착하는 정책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적폐의 반대급부로 우연히 형성된 기회와 가치요인을. 지적호기심의 대가로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관료주의에 쩌든 출연연은 자율을 위해서라면 어떤 양보도 합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자율의 모양새를 갖춘 온갖 꼼수와 "기-승-전-도로 관료 시다바리"의 전력을 성찰하는 견고하고 입체적인 개혁안이라야 신뢰를 받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토론하고 싶다. 출연연을 고소하는 여러 스피커들과 만나 나의 무지를 깨치고 싶다. 그가 출연연을 희생양 삼아 고소하는 국가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개방된 장에서 토론하고 싶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인식이 현상을 거론함인지 뿌리를 거론함인지. 산학연 연계성 단절에서 출연연이 주체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의 범위가 어디라고 보는지-전세계적 기술수명 단축으로 이 문제는 선진국들도 골머리 싸매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 대기업 및 세계적 기술수준을 선도-혹은 견주어야 하는 출연연의 "공공-선행기술" 연구기능으로서의 본질과 이미 다 검증된 것을 빠르게 사다 쓰길 원하는 국내 대기업들의 추격형 혁신체질의 부조화-충돌 문제를 풀기 위한 그의 거대 전략은 무엇인지?,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해야 하는 기능과 연구자들의 Down Shoot 에 따른 부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전문인들을 육성하고 공급해야 하는 기능과 그럴만한 연구유닛 안정성-자율성을 전연 보장받지 못한 환경의 대립, 그리고 희망을 주는 사례로서 이런 환경이 가능했던 일부 사례에서 혁신적으로 일어난 기술개발-기술이전의 놀라운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된 질좋은 일자리를 젊은 이들에게 성공적으로 제공한 사례를 이해나 하고 있는지. 그 어느 기관장보다 혁신적으로 조직를 개혁한 상향식 조직개편의 시도자이자 과학기술최고 행정기관 장관을 00 명이나 배출한 모기관 원장이 미래부 일개 과장에 의해 "사전보고 없이" 조직개편 했다고 복도에서 꾸중이나 들어야 하는 모욕적 사건을 알고나 있는지. 그 기관장에게 그럴 정도면 타 기관은 어떤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출연연 거버넌스 문제만 아니라 과학기술 정책기관이 가진 모든 성찰과 개혁담론이 관계행정 기관에 사전에 보고되고 스크리닝 되어 정작, 국정에는 행정부가 원하는 목소리만 전달되는 기제를 알고나 있는지.

무엇보다, 이 모든 갑갑함 속에 갇힌 연구조직 현장에서, 창의적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주제를 사회-산업-공공문제 해결과 주도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 연구전략과 이를 추진할 리더십의 성장이 얼마나 제한되었을지 이해하고 있는지.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서 DARPA형 PM 교육 훈련 운운, 산업연계협력 운운이 사치가 아닐런지. 반대로, 그런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 놓으면 00억 3년으로 해결할 과제를 000억 10년 과제로 뻥튀기 하여 부처예산 경쟁에 활용하기 위해, 이런 저런 사전기획사업 만들고 예타를 들먹이며 여러 해 끌고 다니다가 버려버리는 ("저 생각 없는 연구자 놈"이라는 딱지와 함께...) 못된 관료주의가 지금도, 아니 최근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그래서 기어이 대형 사업을 만들게 되면, 부처 산하기관과 지방분원 등등으로 Lion Share를 돌리고, 퇴직 관료의 보직을 강제하며 그 부실의 이면을 출연연을 앞세워 성과 앵벌이시키거나 매도하는 사례가 횡횡함을 알고나 있는지.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강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용하는 두 가지의 "그림자 기제"가 작동함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 "통합 권한"을 가진 강력한 행위자에게 자연스럽게 강화되는 하위기관에 대한 "배제지향형"(루만, 1997, 618~620) 갑질 기제이다. 예를들어, 조금만 말 안들어도 각종 불이익의 화살을 날리는. 그리고, 이로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개인"(루만, 1997) 즉 연구자에게 쏟아지게 된다. 둘째, 통합-통제 권한을 강화한 최상위자의 철학 - 국정운영자 - 이 대개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구조속에서 면피의 구실을 찾게 된다. 그리고 쏟아지는 과학기술정책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행정기관에 돌리고, 행정기관은 다시 출연연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군상의 이면에, 사회체제의 진화적 방향에 대한 철학부재가 존재한다. "기능중심 체제분화와 분화에 따른 복잡도를 줄이고 분화주체의 자율을 지원하기 위한 구심력(공동의 가치 믿음 비전 형성에 관한 상위자의 소통역량과 정책적 리더십, 분화되고 세밀한 제도) 형성(루만, 1997) 에 있음을 이해하는 행정전문가가 잘 보이지 않거나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다. 관료 눈밖에 나니. 공부 부족한 경세인들은 행정관료가 다 짜주는 판 위에서 안온한 엘리트 의식에 잠들어 있다. 시민들은 답답하여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에 의존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우리 사회체제의 문제해결 역량은 후퇴하는 이 악순환의 군상..

끝으로 그 모든 나르시즘 스피커들의 장기적 안목 없는 지적질과 파편적 개혁안으로 만신창이가 될 뿐 아니라 점점 "Infantilize" 되는 국가 주변기관 (출연연 포함)과 국가간의 신뢰형성 상실의 문제를 심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국회의원의 영웅적이면서도, 영웅적일수록 피상적인 국정감사 이슈폭탄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유아적인지. 이 모든 구조적 적폐로 인해 우리 시민사회와 미래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손실의 크기, 싱크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름하고 위기 의식을 감지하고 있는지... 이 모든 의문의 끝에서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지고 싶다. 출연연 때리기로 귀착된 그들의 파편적 개혁 아이디어들이 실행되었을 때에, 이 모든 구조적 문제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을지?

관료적 합리성과 관료주의적 성과주의를 위해 자율성을 억압한 대가, 사회적 비용이 지대하다. 실질적으로 부처에 종속된 연구자, 출연연, 정책연구자 및 관련 기관, 연구회...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르는 가장 큰 비용은 어떤 성과 창출을 위한 "기회비용"의 손실도, 낮은 경제적 파급효과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진화하는 연구자"의 가치, 전문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진화한 그들만이 채우고, 예방하고, 창출할 수 있었을 그 "미지의 가치"들일 것이다. (폰 브라운의 아폴로 계획의 허점을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바꾸어낸 휴볼트가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모든 자율적 사유와 성찰은 딱 관료들이 허락하는 선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상은 불경죄로 통제당한다. 관료의 통제를 벗어난 학계의 저명인사들은 전략적 기획의 강조, 질적 평가의 강조에서 맴돈다. 이미 수십년 거론되었어도 아무 진전이 없었던 레토릭이다. 현재와 같은 강력한 중앙통제 속에서는 지방도, 각종 기관도, 그리고 이들에 속한 리더십도 딱 관료들 수준까지만 성장이 가능하다. 관료가, 아니 관료주의가 이 사회의 모델이요 기준이요 한계가 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이런 사회인가?

연구자와 출연연은 보호하고 성장시켜야 할 국가자산이다. 까대고 회초리 든다고 진화하지 않는다. 회초리는 충분한 교감과 신뢰 위에 마지막으로 들어야 한다. 운이 좋으면 회초리 들지 않아도 대개는 그 과정에서 해결될 것이다.

 

2017.07.26.

 

- 글재주 한계로 자기자랑이 지나치게 들어있다. 실상, 주변에 누가 안되면 다행인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는다 -

 

* 그림설명: 1960년 NASA 리더와 전설적 인물 폰브라운의 권위에 대항하여 기존의 아폴로 계획의 문제점과 자신의 대안을 설명하고 있는 John C. Hubolt. 역사가들은 휴볼트의 아이디어와 설득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달탐사 계획은 실패하거나 상당한 비용과 일정이 허송되었으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미국의 성공은 John C. Hubolt라는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한 성실한 전문인이 국가 초대형 사업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소신을 갖고 표현할수 있는 정책광장의 존재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 등의 환경을 소유한 미국사회의 진화된 체계가 자연스럽게 취한 사회적 편익이었다. 이러한 환경의 구조적 개혁, 민주적 리더십은 광대한 사회적 편익을 양산하는 울타리이다. 과학기술의 진화는 사회의 민주성과 비례한다. (https://history.nasa.gov/SP-4308/ch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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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부설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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