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칼럼2015.10.30 10:54

 

김정순 (미래정치센터 사무국장)

 

얼마 전 여고 동창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다른 친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툭하고 불거져 나왔다. 마치 아주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탄사처럼, 혹은 아주 형편없는 음식에 대한 짜증 섞인 저주처럼.


이후 식사자리의 화두는 단연 그 친구의 삶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들로 엮어졌다. 조실부모 했다는 얘기, 위로 언니와 남동생이 있으나 그네들의 삶도 신산하다는 얘기, 그나마 신랑을 잘 만나 한동안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는 얘기, 그러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홀로 남매를 키우기 위해 서울 살이를 접고 경기도 어느 변두리로 스며들었다는 얘기, 그러다 병을 얻었고 급기야 남편과 이혼을 하고 키우던 남매까지 시댁으로 보내고 홀홀단신 산골의 어느 요양원으로 스며들어 결국 지켜보는 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얘기, 주검이 생기자 요양원 관계자들이 그녀의 휴대폰을 뒤져 겨우 친언니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고 문상객도 없는 장례식이 치러졌다는 얘기, 발인 후에야 어찌어찌 소식이 전해져 결국 우리들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는 얘기까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하고도 기구한 한 생명이 스러져간 이야기는 간단한 브리핑으로, 혹자의 두 어 번의 혀 차는 소리로, 안타깝지만 짧은 신음 몇 마디로 우리 앞에 놓여졌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얌전하고도 정갈했던 입성에 대해, 그리고 곧잘 말없이 물끄러미 응시하곤 하던 그녀의 검고도 슬픈 눈동자가 생각나서 얼마 동안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온통 가난과 불행으로만 설계된 것 같은 그녀의 삶을, 그나마도 너무 일찍 거둔 것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지난여름 여행지에 우연히 함께 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정적인 운전 솜씨로, 조용하고 나긋한 말투로, 음악과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함께 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나는 그가 휴게소에서 장애인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기 전까지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 혈우병 환자였다. 반복적인 출혈로 인한 관절의 이상 증상에서인지 오른쪽 팔 다리가 변형되어 절룩거리는 등 제 기능을 수행하기가 어려워보였다. 한 달에 몇 백 만원, 경우에 따라서 천 만 원이 넘는 병원비는 다행히 아내가 다니는 대기업의 복리후생비로 충당한다고 했다. 직원의 배우자까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어렸을 때에는 오롯이 부모의 몫이었을 터. 중산층이긴 했지만 부모님의 병원비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던 탓에 장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어떤 일에 대한 소망도 제대로 품어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장애를 장애로 보지 않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병이 유전될 것을 우려해 그는 자식을 갖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원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 웃으며 즐겁게 가고 싶다는 것.일 년에도 몇 번씩 응급실 신세를 져야하는 그는 자연히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우리랑 함께 한 여행기간에도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기백만 원 되는 주사를 맞고도 상태가 위급하여 근처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그가 내린 죽음의 정의는 삶의 마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꼭 두렵고 슬프지만은 않다는 것으로 죽음 뒤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야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이나마 살아낼 힘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울음 대신 웃으며 갈 수 있도록 세팅을 해두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어떤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소망이 너무 진지하고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서 돌연 혼란스러웠다. 누군가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의 끝일까? 아니면 새로운 어떤 것의 시작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이며 또 어떻게 죽어야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로 누군가의 삶을 혹은 죽음을 행과 불행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마흔이 넘은 죽음은 그 어떤 것이든 하등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죽음과 가까워진 나이라는 의미이리라. 한편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이 어떤 것의 마감이든 아니면 시작이든 간에 생에 있어서만큼은 미련을 남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놓는 삶을 살 것인지, 그냥 유유자적 게으르게 살 것인지만 결정하자. 그 다음의 것은 내 영역이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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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의당 부설 정책연구소 미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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